좁은문 범우 사르비아 총서 625
앙드레 지드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긴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다. 유리같은 감수성을 가진 제롬 - 그리고 지드를 떠올릴 수
있었고, 그가 향유할 수 있었던 프랑스의 전원 풍경을 동경했다. 그러나 책을 덮은 후에
내 가슴을 꽉 채운 것은 알리사와 제롬의 슬픈 사랑 이야기였다. 그것은 순수한 슬픔의
정화가 아니었다.

책을 읽어가면 갈수록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내러티브가 잘못된 영화를 볼 때와
같이 말이다. 하지만 지드는 어리숙한 작가가 아니다. 그는 일부러 알리사라는 인물을
설정한 것이었다. 그녀는 고귀하지만 자폐적이고, 사랑 앞에서 헌신적이지만 잔인하다.
그런 그녀와 사랑에 빠진 소심한 소년 제롬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 독자는 숨막힘을
느끼게 된다.

지드의 좌파 성향을 고려해서 알리사를 안티테제로 설정하면 이 숨막힘은 쉽게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는다. 과연 지드는 세속을 떠난 정신적
사랑을 부정하는 주제를 택한 것일까? 나는 지드가 해답을 내리지 않았다고 본다. 해답은
우리에게 열려 있다. 그리고 그 사실 자체가 숨막힘에 숨막힘을 더한다. 어떤 선택을
해도 괴로움을 피할 수 없는 딜레마 앞에, 지드는 우리를 앉혀놓고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지드는 계량주의적인 타협안조차 비추어주지 않는다. 제롬은 한없이 무력할 뿐이다.
나라면... 내가 제롬이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제롬에게 알리사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부조리가 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 자신은 이데아를 추구하기에 이 또한
아이러니컬하다.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알리사의 말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결국 독자의 가슴만이 탈 뿐이다.

이 작품을 유년시절에 읽었다면 지금 내 삶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지드의 문학과 재능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패배적이라
해도 세속적 사랑을 계속하겠다. 지독한 숨막힘은 문학 속에서만으로 끝내고 싶으니까.


2002. 1. 6
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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