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다르크 - [할인행사]
뤽 베송 감독, 대니 드비토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0. intro.
술에 취한고로 다들 아는 얘기는 각설하고, 나는 뤽 베송의 열렬한 팬은 아니다. 그가 감독한 영화 중 내가 본 것은 TV를 통해 본 니키타나 레옹이 전부다. 뤽 베송의 아내라는 밀라 요보비치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존 말코비치니 더스틴 호프만이니 하는 나머지 조연급 배우들도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거기다 '스펙터클한 전투신'이라는 카피는, 내가 이 영화 잔 다르크를 꼭 봐야만 할 필연성을 사라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의 수난]이나 빅터 플레밍의 [잔 다르크]를 접하게 되면서, 특히 닫힌 형식으로 인물들의 내면 그리기에 성공한 [잔 다르크의 수난]에 강한 인상을 느껴서, 과연 뤽 베송은 잔 다르크를 어떻게 그려냈는지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다. 뤽 베송의 [잔 다르크]의 영상은 1999년의 기술력 때문인지 화사하고 현란했다. 특히 더스틴 호프만과 밀라 요보비치가 대화하는 부분과 같은 숏 테이크의 교차 편집을 통한 몽타쥬는 물론, 어두운 감옥 속 격자무늬 쇠창살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얼굴에 맞으며 서 있는 더스틴 호프만의 모습 같은 미장센 역시 훌륭했다. 이것은 - 잘은 모르지만 - 뤽 베송의 역량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정작 중요한 잔 다르크역의 요보비치의 연기는 내게 짜증을 유발하였다. 그 히스테릭함과 다분히 의도적으로 느껴지는 말더듬기 등, 영화 전체를 보기 전에 이미 그녀는 내게 연기 못하는 배우로 각인되었다.(모델도 한댄다 흥.)


1. Jeanne, juvenile
어쨌거나 비디오 테잎 2개를 빌려와 집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잔은 어렸을 때 매우 신앙심이 독실했는지 하루에 2,3번씩 고해를 했던 모양이다. 고해를 끝마치고 들판을 뛰어가는 잔은 너무나도 순진무구 + 말괄량이틱해 보인다. 이미 요보비치의 히스테릭한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아역 배우의 행동 속에서도 미래의 히스테릭함의 전조를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과장이 될까? 하지만 정말로, 그녀는 외모뿐 아니라 성격조차 요보비치와 같은 것 같았다. 캐스팅을 잘했군-_- 그리고 신1)의 말씀. 음악과, 거기에 어울리는 편집의 독특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잔 옆에 난데없이 떨어져 있는 검. 잔은 계시로 생각하고 검을 들고 집으로 간다. 때마침(-_-) 마을은 영국군의 습격하에 있었다. 잔의 언니는 잔을 숨겨주고, 집에 들어온 군인에게 잔이 들고 온 검에 찔려 매달린채로 屍姦당한다. 이를 모두 숨어서 지켜본 잔에게 있어 크나큰 트라우마가 남으리란 것은 충분히 상상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이 검이나 강간 같은 것은 역사적 문헌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분명 뤽 베송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장치를 등장시켰는지 짚어봐야 할 것이다. 검의 등장은 언듯 성녀의 이미지에 부합한다고 생각되지만, 그 검으로 곧 자신의 언니는 살해당하고 이후 다시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검은 聖적인 장치는 아닌 듯하다. 오히려 언니를 죽이는 그 검은 부정적인 이미지이다. 즉, 잔이 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인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어쩌면 영화 전체의 내용을 이미 예고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어지는 강간 역시 단지 볼 거리를 위해서라기보다는(물론 그런 측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잔의 트라우마를 극대화시키고 잔이 나중에 복수를 위해 강박적이다시피 전투에 집착하게 되는 것을 설명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보여진다.


2. Victorious Jeanne
이후 어찌어찌하여(뤽 베송도 잔이 행한 기적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는다.) 잔은 일개 농부의 딸의 신분으로2) 프랑스의 군대를 지휘하게 된다. 전투 장면은, 뤽 베송이 갑옷을 입고 그 속에서 돌아다니며 찍었다던데 암튼 정말 ‘스펙터클’했다. 뤽 베송이 21세기의 자본과 기술력을 등에 업고 창조해낼 수 있는 잔 다르크 영화란 결국 이런 사실적이고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 하나밖에 볼 것이 없을런지도 모른다. 대중, 혹은 일반적으로 잔 다르크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다가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오를레앙에서의 전투 승리 직후에 잔은 주검들의 속에서 “What are you doing, Jeanne?”이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때 그녀의 대답이 압권인데 바로 “I'm playing.”이다. 신의 목소리와 그녀 자신의 행위 사이의 괴리를 뚜렷이 드러내는 장면이다.

마침내 파죽지세의 잔 덕택에 샤를 7세는 왕위에 즉위하게 된다. 왕위 즉위식 장면은 빅터 플레밍의 작품과 비교되는 부분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두 영화의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뤽 베송 쪽은 무채색, 플레밍 쪽은 원색으로 점해져 있는 영상이었는데, 둘 다 聖歌를 BGM으로 깔며 괜찮게 그려낸 듯하다. 물론 그 성스러운 의식 이면에 페이 더너웨이의 성유 조작사건(-_-)을 깔고 있는 뤽 베송은 일관되게 성스러운 것의 경외시를 부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3. Jeanne, prisoned
왕의 즉위 이후에도 잔은 고집스럽게 전투를 고집하고, 마침내는 무리한 전투 때문인지 부르고뉴 공국에 붙잡히게 된다. 이때 그녀와 함께 싸우던 장군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조금 궁금(-_-a)하다. 전투 장면에 눈을 빼앗겼다가 갑자기 감옥 같은 영상과 롱테이크(전투 장면과 비교해볼 때)의 연속은 충분히 관객으로 하여금 늘어지는 느낌을 가지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풀, 덩굴들에 의해 온몸이 감싸이는 죽음의 꿈(상상?)에서 깨어난 잔은 신 본인과 대면하게 된다. 신은 고난이도의 블랙 유머를 구사한다. 물론 지금까지 그녀 머리 속에서만 이따금씩 나타나던 신이 이제는 그녀 눈 앞에 현현해 귀찮도록 따라다니는 상황 자체도 유머러스하다. 어째서 신은 이제야 나타났을까? 신의 메시지를 받들어 행해야만 하는 전령 잔은 자기 자신의 의지와 신의 목소리를 혼동하게 되고 결국 자기 자신의 의지를 ‘신의 이름으로’ 남용하게 된다. 한마디로 죄를 지은 것이다. 이에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신이 손수 왕림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조금 뻔한가-_-?

플레밍의 작품에 비하면 뤽 베송이 그리는 꼬숑은 그다지 속물적이거나 부패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역시 뤽 베송의 의도로 보인다. 플레밍은 잔을 성녀로 그렸기에 상대적으로 꼬숑과 같은 인물들은 잔을 억압하는 부조리의 인물로 설정된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는 당연히 잔의 성스러움이나 고귀함이 돋보이게 된다. 그러나 플레밍이 악의 화신 정도로 꼬숑을 설정했던데 반해 뤽 베송은 꼬숑을 오히려 인간적이고 잔에 대해 어떤 동정심도 느끼는 것으로 그린다. 그리고 그녀를 재판하는 다른 인물들 역시 잔에 대해 불합리한 악의에 차 있지는 않다. 다시 말해 악의 화신급의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 잔이 살인을 했냐는 심문 장면 같은 부분에서는 오히려 신부의 말이 설득력이 있고(사실이고), 잔은 사실을 감추려고 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외부 억압과 부조리의 부재는, 뤽 베송이 그리는 잔 다르크에 있어서는 그녀 내부의, 그녀 스스로의 죄로 대체되게 된다.


4. Jeanne, burned at the stake
꼬숑은 잔을 화형에서 면하게 해주었으나, 그것은 잔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죄였다. 그래서였는지 그녀는 자신을 남장시키는 잉글랜드의 장군(누군지 모르겠다.)을 거부하지 않았고, 다시 화형에 처해지게 된다. 이때 꼬숑은 잔의 고해를 들어주는 것을 거부하는데, 이것은 아마 꼬숑 스스로 모종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지 아니었나 하고 좀 비약이긴 하지만 추측해본다.3) 화형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그녀는 신에게 “I was proud... and stubborn”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요보비치는 이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영화 전체에 걸쳐 보이던 히스테릭한 모습이나 당황함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말더듬기 따위 없이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구원받은 것이리라.

한 가지 더, 마지막에 비디오 자막 해석은 “비로소 500년이 지나서야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따위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 500 years later”로 끝나는 평서문이었다. 즉 그냥 500년 후에 성인으로 인정받았다는 평범한 뜻일 뿐이다.


5. end
이 영화는 플레밍이나 드라이어와 같이 잔 다르크의 성녀화를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 전에도 그랬다고는 하지만 불어가 아닌 영어로 영화가 제작된 것으로 보아 잔 다르크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분명한 것은, 신의 목소리는 인정하되, 그 목소리를 전하는 전령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크리스챤들이 이 영화를 극찬해놓은 리뷰4)도 있는 걸 보면, 뤽 베송은 어느 한 방향에 치우치지 않고 영화를 잘 만들 것 같다. 하지만 요보비치의 히스테릭한 연기는 보는 이를 더욱 히스테릭하게 만들었고, 검이나 잔 언니의 죽음 등과 같은 근거없는 상상력이 좀 지나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잔 다르크라는 표상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술에 취해서 그리고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다보니 논지가 좀 산만하다. 암튼 끝.(200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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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mdb에 가보면(http://us.imdb.com/Title?0151137) 신(혹은 성자)이 아닌 The Conscience라고 되어 있다. 잔 자기 자신의 의식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을 듯한데, 이것이 진정 뤽 베송의 의도일런지도. 어쨌든 이 글에서는 그냥 신이라고 부르겠다.

2) 농부라든지 여자라든지 하는 계급 문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다른 잔 다르크 영화들에서도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신의 이름으로’라는 측면에서 볼 때 평등이 주장될 만도 한데, 어쨌든 전쟁만 생각하기도 바빴었나보다. 혹은 잔 다르크에 페미니즘을 차용할 경우, 비약이라는 비난을 듣기 싫었던 걸까나.
3) 비디오 자막의 해석은 기분나쁜 듯한 말투로 기억나는데 실제로는 “I can't, Jeanne. / I can't hear your confession. / I'm very sorry.”였다.

4) 씨네서울 참고할 것(개편되서 링크는 지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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