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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키와 같은 인기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행운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시나위 정도의 중견 밴드가 신보를 발표할
때면, 이번 음반은 또 어떤 음악으로 돌아왔을까, 하고 기대하다 못해 (경제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사지 않고는 못 베기기
마련이다. 나에게 하루키는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이다(그래서 가끔은 하루키가 한국인이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본다).
그러나 좋아하던 예술가의 신작이 언제나 기대를 채워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변하고, 그들의 창조물 역시 변해간다.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 간에.
일단 본작에서 특이하게 다가오는 것 중 한 가지는 ‘우리’로 지칭되는 전지적 ‘카메라 시점’의 사용이다. 이런 시점은 작법상
상당히 색다른 시도이며, ‘알파빌’의 기계적인 이미지와 맞물리며 효과적으로 내러티브를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과거
개인적 차원에 머물렀던 하루키가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하던 쿨(cool)한 내러티브와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전작 [해변의 카프카]에 대한 반응(실패라고까지는 부르지 않겠다)을 의식했는지, 본작 [어둠의 저편]에서 차용되고 있는 이미지들은 비교적 명확한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주제를 요약하자면, 인간에게서 밤을 빼앗아가버린 현대 문명의 폭력성에 대한 성찰,
정도로 명쾌히 풀어쓸 수 있을 정도이다(여기에 프로이트적 해석을 끌어다붙이는 건 평론가의 재량이지만, 개인적으로 책에 실린
권택영 교수의 해설은 납득하기가 조금 어렵다). 탁월한 문제의식에 비해, 대안적 메시지는 (여전히) 다소 허술한 구석이 없지
않지만(정말로 ‘기억’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까, 하루키 상?), 전반적으로 일관성과 유기성을 갖추고 있으며,
흠잡을데 없는 한 편의 근사한 소설이라 평할 수 있겠다.
그래서, 하루키 팬들이여, 만족하는가?
하루키는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이후로,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변모해가고 있다. 아쉽지만 이것은 사실이고, 그로 인해
그의 문학적 위상이 향상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바꿔 말하면, 하루키는 좀더 ‘재미없는’ 소설을 쓰고 있다. 500년쯤,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난 후에 사람들은 [어둠의 저편]을 고전의 반열에 끼워줄런지도 모른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지금 내가
느끼는 것과 같은 아쉬움, 실망감, 나아가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하루키와 동시대 속에서 그의 작품들과 더불어
살아온 나로서는,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05-6-15)
덧1:
본서의 역자는 문학사상사 편집고문이라는 임홍빈 씨로 되어 있는데, 약력을 보니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56년에 기자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연세가 6~70세라는 얘기인데, 과연 이 분 혼자서 본서를 번역했는지 심히 의심스러운 바이다.
출판업체의 사정이야 일개 소비자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데뷔 25주년 기념작이라는 거창한 카피와
함께, 도무지 하루키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 분의 고리타분한 후기를 읽고 있노라면, 의심은 더더욱 깊어진다.
덧2:
이것 하나만은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여전히 소설 속에 등장하는 jazz들은 하나같이 추천하고 싶은 작품들이다. 특히 국내 모
유통사에서 대대적인 홍보를 벌인바 있는 커티스 풀러의 [Blues-ette]는, 정말로 명반이다. 그리고 문학사상사는 매우
친절하게도, 책 속에 등장한 뮤지션들에 대한 소개를 책 말미에 부록처럼 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