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개
이외수 지음 / 동문선 / 1989년 5월
평점 :
절판


*89년 초판으로 나온 [들개]를 읽고 난 후 느낀 소감입니다.

 

 [들개]의 후기에서 이외수 씨는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려 혹은 이론적으로 분석하려 들지 말아달라고 말한다. 웃기는 건 그 후기 바로 앞에 문학평론가 두 '분'의 비평이 실려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한자어가 난무하는 매우 '분석적인' 비평이 말이다. 그 비평들의 논지는 충분히 수긍할만한 찬사이다. 일관되게 순수성(그리고 반문명적인 메시지)을 추구해온 이외수 씨의 노고는 분명 한국 문학사에 있어 의의 있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의 유려한 문체는 그에게 대중적인 인기뿐만 아니라 '글을 잘 쓰는' 작가로서의 명성도 가져다주었다.(하루키의 댄디즘을 모방하는데 급급했던 90년대 한국 문학계를 생각해보자. 다른 건 둘째치고 일단 '글을 잘 쓰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우리 작가들에게 있어선, 대단한 찬사이다.)

 다 인정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나름의 비판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들개]에 대해서 작가 자신이 허락하듯 욕설로 도배를 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욕이나 줄창 하고 넘어가면 될 것을,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formal하게 글을 쓰고 앉아있는 것은, 먼저 위에서 언급한 그 고상한 비평들이 찬사로 가득차있다는데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니라, 그 비평가 양반들이 응당 읽어냈어야 할 것을 읽지 못한데 대해 '그들이 알아들을만하게' 비난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길게 말해 무엇하랴. 사실 그 비평들조차 책의 초판이 나온 89년에 쓰여졌을테니 말이다. 그렇다, 사실인즉슨 89년에 쓰여진 이 [들개]라는 소설은 2004년을 살아가고 있는 적어도 '나'라는 한 사람의 독자에게 있어서는 참을 수 없으리만큼 고리타분한 소설인 것이다.

 먼저, 15년 전의 소설에 대해 촌스럽다고 욕하는게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외적인 이야기부터 하자. 그래, 15년의 갭이 가져오는 이 작품의 전반적인 유치함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아니, 노력중이다.) 개인적으로 유미주의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tilt를 가지고 있는 나이지만, 그 주제를 풀어내는 내러티브에 있어서 느껴지는 유치함 내지 naive함 역시도 세대차이라고 생각하고 못 본 척하고 말자. 그의 유려하다는 문체도, 위트 있는 문장들도, linear한 플롯이 몰고 오는 지루함을 커버하기엔 역부족이었다는 사실도, 국문학도도 아닌 나의 읽기 능력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생각하자.

 자, 그럼 내적인 이야기를 하자. 한마디로 요약해서, 이외수는 소설지망생인 여주인공(이하 그녀)에 대해 매우 불순한 사상을 투사하고 있다. 그녀는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며, 그 속에서 오직 문학만을 자신의 길로 결심하고는 대학도 때려치고 창작에 매진하게 된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살 돈이 없는 그녀는 노숙자(라기보다는 불법점유자)로 살면서 애지중지하는 책도 팔고, 별 수 없이 몸도 판다.(그녀 자신의 생각 - 사실은 이외수의 생각 - 과는 달리 그녀의 행위는 분명히 성매매이다.) 여기까지는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사치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나름대로 그녀의 생활상 및 정신상태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 문제는 여기부터다. - 그녀는 불감증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즉 돈 한 푼 없고 불법점유자인 주제에 예술은 하고 싶어하는 한 화가(이하 그)를 만나게 된다. 처음엔 그녀는 물론 그에게 끌리지 않는다. 그럴 여유가 없다는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러나 곧 그의 작품에 끌리게 되고, 결국에는 그라는 인간(좋은 말로는 예술가의 영혼)에게 매료되어,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치게 된다. 몸도, 마음도, 돈도, 음식도 등등등. 그러던 그녀는 우연히 바다를 보게 되더니만, 모종의 각성을 하게 된다.(이외수 씨의 반문명 내지 자연에의 경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때마침 그는 필생을 바쳐 그리고 있던 그림을 완성하기 직전에 이르고, 오랜만에 그녀의 몸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sex를 통해 그녀는 '육체의 쾌락'에 눈을 뜨게 되고, 그는 그림을 완성하고는 죽는다.

 [들개]를 읽지 않은 사람이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면 대부분은 욕부터 나오는게 당연하리라 여겨진다. 그러니 이 소설을 직접 끝까지 읽은 내 기분은 대체 어떻겠냔 말이다. 유미주의를 그녀의 육체적 각성과 교묘하게 꿰어맞춘 이 소설의 말미는 내게 극도의 거부감을 가져왔다. 요컨대 남자 화가의 정욕이 '예술을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여자 소설가 지망생의 몸에 제멋대로 투사되는 모습이, 그야말로 역겨웠다. 이외수는 예술이라는 이름을 빌려서(그것도 하필 '예술'이라는 이름 말이다!) 여성을 유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의미에서 유미주의의 테제를 '남용'하고 있다. 이 남용이라는 단어는 유미주의의 어의와 모순되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유미주의의 어의적 의미에 탐착하자면, 의식주의 욕구로부터는 초연하되 성욕은 주체하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화가를 어떻게 예술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이것은 당연히 지극히 개인적이며 근거도 없는 입장이지만, 나는 sex에 제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혐오한다. 대개 그런 제의의 주체는 남성이요, 대상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외수 자신이 그 들개 같은 화가와 자기 자신을 암암리에 동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숨길 수 없다. 그래서, 사실 그다지 좋아해본 적도 없긴 하지만, 나는 이외수가 매우 싫어져버렸다.(2004.7.23. 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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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4-10-08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정말 멋진 리뷰입니다. 저처럼 말을 하려고 하면서도 표현력이 부족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독자들을 위한 리뷰같습니다. 저도 이외수씨의 '훈장'을 읽고 이 글과 비슷한 불만을 느꼈습니다. 추천합니다.

몸냥 2024-01-11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에 입각한 주관적 불편감
 
좁은문 범우 사르비아 총서 625
앙드레 지드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긴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다. 유리같은 감수성을 가진 제롬 - 그리고 지드를 떠올릴 수
있었고, 그가 향유할 수 있었던 프랑스의 전원 풍경을 동경했다. 그러나 책을 덮은 후에
내 가슴을 꽉 채운 것은 알리사와 제롬의 슬픈 사랑 이야기였다. 그것은 순수한 슬픔의
정화가 아니었다.

책을 읽어가면 갈수록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내러티브가 잘못된 영화를 볼 때와
같이 말이다. 하지만 지드는 어리숙한 작가가 아니다. 그는 일부러 알리사라는 인물을
설정한 것이었다. 그녀는 고귀하지만 자폐적이고, 사랑 앞에서 헌신적이지만 잔인하다.
그런 그녀와 사랑에 빠진 소심한 소년 제롬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 독자는 숨막힘을
느끼게 된다.

지드의 좌파 성향을 고려해서 알리사를 안티테제로 설정하면 이 숨막힘은 쉽게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는다. 과연 지드는 세속을 떠난 정신적
사랑을 부정하는 주제를 택한 것일까? 나는 지드가 해답을 내리지 않았다고 본다. 해답은
우리에게 열려 있다. 그리고 그 사실 자체가 숨막힘에 숨막힘을 더한다. 어떤 선택을
해도 괴로움을 피할 수 없는 딜레마 앞에, 지드는 우리를 앉혀놓고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지드는 계량주의적인 타협안조차 비추어주지 않는다. 제롬은 한없이 무력할 뿐이다.
나라면... 내가 제롬이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제롬에게 알리사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부조리가 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 자신은 이데아를 추구하기에 이 또한
아이러니컬하다.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알리사의 말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결국 독자의 가슴만이 탈 뿐이다.

이 작품을 유년시절에 읽었다면 지금 내 삶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지드의 문학과 재능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패배적이라
해도 세속적 사랑을 계속하겠다. 지독한 숨막힘은 문학 속에서만으로 끝내고 싶으니까.


2002. 1. 6
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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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 - [할인행사]
뤽 베송 감독, 대니 드비토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0. intro.
술에 취한고로 다들 아는 얘기는 각설하고, 나는 뤽 베송의 열렬한 팬은 아니다. 그가 감독한 영화 중 내가 본 것은 TV를 통해 본 니키타나 레옹이 전부다. 뤽 베송의 아내라는 밀라 요보비치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존 말코비치니 더스틴 호프만이니 하는 나머지 조연급 배우들도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거기다 '스펙터클한 전투신'이라는 카피는, 내가 이 영화 잔 다르크를 꼭 봐야만 할 필연성을 사라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의 수난]이나 빅터 플레밍의 [잔 다르크]를 접하게 되면서, 특히 닫힌 형식으로 인물들의 내면 그리기에 성공한 [잔 다르크의 수난]에 강한 인상을 느껴서, 과연 뤽 베송은 잔 다르크를 어떻게 그려냈는지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다. 뤽 베송의 [잔 다르크]의 영상은 1999년의 기술력 때문인지 화사하고 현란했다. 특히 더스틴 호프만과 밀라 요보비치가 대화하는 부분과 같은 숏 테이크의 교차 편집을 통한 몽타쥬는 물론, 어두운 감옥 속 격자무늬 쇠창살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얼굴에 맞으며 서 있는 더스틴 호프만의 모습 같은 미장센 역시 훌륭했다. 이것은 - 잘은 모르지만 - 뤽 베송의 역량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정작 중요한 잔 다르크역의 요보비치의 연기는 내게 짜증을 유발하였다. 그 히스테릭함과 다분히 의도적으로 느껴지는 말더듬기 등, 영화 전체를 보기 전에 이미 그녀는 내게 연기 못하는 배우로 각인되었다.(모델도 한댄다 흥.)


1. Jeanne, juvenile
어쨌거나 비디오 테잎 2개를 빌려와 집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잔은 어렸을 때 매우 신앙심이 독실했는지 하루에 2,3번씩 고해를 했던 모양이다. 고해를 끝마치고 들판을 뛰어가는 잔은 너무나도 순진무구 + 말괄량이틱해 보인다. 이미 요보비치의 히스테릭한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아역 배우의 행동 속에서도 미래의 히스테릭함의 전조를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과장이 될까? 하지만 정말로, 그녀는 외모뿐 아니라 성격조차 요보비치와 같은 것 같았다. 캐스팅을 잘했군-_- 그리고 신1)의 말씀. 음악과, 거기에 어울리는 편집의 독특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잔 옆에 난데없이 떨어져 있는 검. 잔은 계시로 생각하고 검을 들고 집으로 간다. 때마침(-_-) 마을은 영국군의 습격하에 있었다. 잔의 언니는 잔을 숨겨주고, 집에 들어온 군인에게 잔이 들고 온 검에 찔려 매달린채로 屍姦당한다. 이를 모두 숨어서 지켜본 잔에게 있어 크나큰 트라우마가 남으리란 것은 충분히 상상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이 검이나 강간 같은 것은 역사적 문헌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분명 뤽 베송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장치를 등장시켰는지 짚어봐야 할 것이다. 검의 등장은 언듯 성녀의 이미지에 부합한다고 생각되지만, 그 검으로 곧 자신의 언니는 살해당하고 이후 다시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검은 聖적인 장치는 아닌 듯하다. 오히려 언니를 죽이는 그 검은 부정적인 이미지이다. 즉, 잔이 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인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어쩌면 영화 전체의 내용을 이미 예고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어지는 강간 역시 단지 볼 거리를 위해서라기보다는(물론 그런 측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잔의 트라우마를 극대화시키고 잔이 나중에 복수를 위해 강박적이다시피 전투에 집착하게 되는 것을 설명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보여진다.


2. Victorious Jeanne
이후 어찌어찌하여(뤽 베송도 잔이 행한 기적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는다.) 잔은 일개 농부의 딸의 신분으로2) 프랑스의 군대를 지휘하게 된다. 전투 장면은, 뤽 베송이 갑옷을 입고 그 속에서 돌아다니며 찍었다던데 암튼 정말 ‘스펙터클’했다. 뤽 베송이 21세기의 자본과 기술력을 등에 업고 창조해낼 수 있는 잔 다르크 영화란 결국 이런 사실적이고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 하나밖에 볼 것이 없을런지도 모른다. 대중, 혹은 일반적으로 잔 다르크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다가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오를레앙에서의 전투 승리 직후에 잔은 주검들의 속에서 “What are you doing, Jeanne?”이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때 그녀의 대답이 압권인데 바로 “I'm playing.”이다. 신의 목소리와 그녀 자신의 행위 사이의 괴리를 뚜렷이 드러내는 장면이다.

마침내 파죽지세의 잔 덕택에 샤를 7세는 왕위에 즉위하게 된다. 왕위 즉위식 장면은 빅터 플레밍의 작품과 비교되는 부분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두 영화의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뤽 베송 쪽은 무채색, 플레밍 쪽은 원색으로 점해져 있는 영상이었는데, 둘 다 聖歌를 BGM으로 깔며 괜찮게 그려낸 듯하다. 물론 그 성스러운 의식 이면에 페이 더너웨이의 성유 조작사건(-_-)을 깔고 있는 뤽 베송은 일관되게 성스러운 것의 경외시를 부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3. Jeanne, prisoned
왕의 즉위 이후에도 잔은 고집스럽게 전투를 고집하고, 마침내는 무리한 전투 때문인지 부르고뉴 공국에 붙잡히게 된다. 이때 그녀와 함께 싸우던 장군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조금 궁금(-_-a)하다. 전투 장면에 눈을 빼앗겼다가 갑자기 감옥 같은 영상과 롱테이크(전투 장면과 비교해볼 때)의 연속은 충분히 관객으로 하여금 늘어지는 느낌을 가지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풀, 덩굴들에 의해 온몸이 감싸이는 죽음의 꿈(상상?)에서 깨어난 잔은 신 본인과 대면하게 된다. 신은 고난이도의 블랙 유머를 구사한다. 물론 지금까지 그녀 머리 속에서만 이따금씩 나타나던 신이 이제는 그녀 눈 앞에 현현해 귀찮도록 따라다니는 상황 자체도 유머러스하다. 어째서 신은 이제야 나타났을까? 신의 메시지를 받들어 행해야만 하는 전령 잔은 자기 자신의 의지와 신의 목소리를 혼동하게 되고 결국 자기 자신의 의지를 ‘신의 이름으로’ 남용하게 된다. 한마디로 죄를 지은 것이다. 이에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신이 손수 왕림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조금 뻔한가-_-?

플레밍의 작품에 비하면 뤽 베송이 그리는 꼬숑은 그다지 속물적이거나 부패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역시 뤽 베송의 의도로 보인다. 플레밍은 잔을 성녀로 그렸기에 상대적으로 꼬숑과 같은 인물들은 잔을 억압하는 부조리의 인물로 설정된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는 당연히 잔의 성스러움이나 고귀함이 돋보이게 된다. 그러나 플레밍이 악의 화신 정도로 꼬숑을 설정했던데 반해 뤽 베송은 꼬숑을 오히려 인간적이고 잔에 대해 어떤 동정심도 느끼는 것으로 그린다. 그리고 그녀를 재판하는 다른 인물들 역시 잔에 대해 불합리한 악의에 차 있지는 않다. 다시 말해 악의 화신급의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 잔이 살인을 했냐는 심문 장면 같은 부분에서는 오히려 신부의 말이 설득력이 있고(사실이고), 잔은 사실을 감추려고 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외부 억압과 부조리의 부재는, 뤽 베송이 그리는 잔 다르크에 있어서는 그녀 내부의, 그녀 스스로의 죄로 대체되게 된다.


4. Jeanne, burned at the stake
꼬숑은 잔을 화형에서 면하게 해주었으나, 그것은 잔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죄였다. 그래서였는지 그녀는 자신을 남장시키는 잉글랜드의 장군(누군지 모르겠다.)을 거부하지 않았고, 다시 화형에 처해지게 된다. 이때 꼬숑은 잔의 고해를 들어주는 것을 거부하는데, 이것은 아마 꼬숑 스스로 모종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지 아니었나 하고 좀 비약이긴 하지만 추측해본다.3) 화형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그녀는 신에게 “I was proud... and stubborn”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요보비치는 이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영화 전체에 걸쳐 보이던 히스테릭한 모습이나 당황함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말더듬기 따위 없이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구원받은 것이리라.

한 가지 더, 마지막에 비디오 자막 해석은 “비로소 500년이 지나서야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따위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 500 years later”로 끝나는 평서문이었다. 즉 그냥 500년 후에 성인으로 인정받았다는 평범한 뜻일 뿐이다.


5. end
이 영화는 플레밍이나 드라이어와 같이 잔 다르크의 성녀화를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 전에도 그랬다고는 하지만 불어가 아닌 영어로 영화가 제작된 것으로 보아 잔 다르크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분명한 것은, 신의 목소리는 인정하되, 그 목소리를 전하는 전령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크리스챤들이 이 영화를 극찬해놓은 리뷰4)도 있는 걸 보면, 뤽 베송은 어느 한 방향에 치우치지 않고 영화를 잘 만들 것 같다. 하지만 요보비치의 히스테릭한 연기는 보는 이를 더욱 히스테릭하게 만들었고, 검이나 잔 언니의 죽음 등과 같은 근거없는 상상력이 좀 지나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잔 다르크라는 표상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술에 취해서 그리고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쓰다보니 논지가 좀 산만하다. 암튼 끝.(200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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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mdb에 가보면(http://us.imdb.com/Title?0151137) 신(혹은 성자)이 아닌 The Conscience라고 되어 있다. 잔 자기 자신의 의식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을 듯한데, 이것이 진정 뤽 베송의 의도일런지도. 어쨌든 이 글에서는 그냥 신이라고 부르겠다.

2) 농부라든지 여자라든지 하는 계급 문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다른 잔 다르크 영화들에서도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신의 이름으로’라는 측면에서 볼 때 평등이 주장될 만도 한데, 어쨌든 전쟁만 생각하기도 바빴었나보다. 혹은 잔 다르크에 페미니즘을 차용할 경우, 비약이라는 비난을 듣기 싫었던 걸까나.
3) 비디오 자막의 해석은 기분나쁜 듯한 말투로 기억나는데 실제로는 “I can't, Jeanne. / I can't hear your confession. / I'm very sorry.”였다.

4) 씨네서울 참고할 것(개편되서 링크는 지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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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툰 - [할인행사]
올리버 스톤 감독, 찰리 쉰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1. tragedy
플래툰은 무척이나 사실적인 영화였다. 올리버 스톤은 1967년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2번 부상당하고 훈장까지 받았다고 한다.1) 그런 그였기에 스탠리 큐브릭이 영국 로케이션으로 만든 풀 메탈 자켓에서는 재현해내지 못했던 것들을 재창조해낼 수 있었던 것이리라. 무거운 비, 기력을 지탱하기도 힘든 철야와 매복, 밤을 환하게 빛내는 화염들, 총알들, 작열하는 폭발들... 그런 것들 속에서 베트남전에 관해 끊임없는 공포감, 불안감, 그리고 거기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 하는 것 등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 하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잔인한 본성에 대한 묘사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베트남 정박아 앞에서 주인공 크리스는 본디의 선한 기질을 잃고 분노해버리고 그의 발 앞에 총을 쏜다. 그래도 크리스는 살인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백인 버니2)는 그 정박아의 머리를 M-16의 개머리판으로 부숴버린다. 안심하고 보다가 갑자기 이어지는 이 살인 때문에 여린 관객(본인-_-)의 가슴은 무너졌다. 옆에 있던 그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노파의 망연자실한 얼굴이 가슴을 찌른다.

이렇게 간헐적으로 휴머니즘의 부재를 상기시키는 부분은 이외에도 많은데, 특히 위에 쓴 마을 습격 부분에서 미군이 자행하는 일들이 그렇다.3) 이 습격 이후 사이가 크게 틀어진 반스와 엘리어스가 정글 속에서 조우하고, 무방비 상태의 라이어스에게 반스는 M-16을 발포한다. 그리고 영화를 안 본 사람이라도 한 번쯤 보았을 만한(나도 그랬다) 바로 그 장면에서 휴머니즘의 부재는 정절에 이르게 된다. 아군에게 버려진채 사냥감이 사냥개들에게 쫓기듯 베트공들에게 공격당해 절규하며 죽어가는 라이어스의 모습이 영화 메인테마곡과 함께 흐르며 지울 수 없는 상처 같은 것을 우리에게 남긴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포스터가 태양이 맑게 비치는 대낮에 죽어가는 군인의 모습이라는 것을.


2. Oliver Stone
퇴역군인이 예술가 -작가, 조각가, 혹은 영화촬영 전문가- 라고 한다면 그가 겪은 전쟁이 거의 변함없이 그의 작품의 주제가 된다. ‘피를 흘리는 것을 목격한 군인’은 이미 오점이 박힌 사람이라고 역사학자 딕슨 웩터는 말했다고 한다. 올리버 스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 마지막에 크리스는 생각한다. “Those of us who did make it have an obligation to build again, to teach others what we know and to try with what's left of our lives to find a goodness and a meaning to this life.” 결국 이것은 올리버 스톤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는 이 작품 외에도 [7월 4일생], [도어즈], [JFK]와 같은 반전의 메시지가 들어있는 영화들을 만든다. 특히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60~70년대의 격변하는 미국의 모습이다. 1960년대 미국 사회는 ‘격동의 60년대’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시대였다. 쿠바 침공, 케네디 암살, 흑인 폭동,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 등등등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여기에 약물(1966년 초까지 LSD는 합법적이었다.), 공동체, 평화, 프리 섹스 등을 주장하며 제도권을 거부하는 히피족이 등장하며, 이들은 싸이키델릭 록을 듣거나 직접 연주하곤 했다. 이것들은 모두 60~70년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들이다. 그가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재현한 The Doors나 이 영화에서 크리스가 부상 후 귀환한 캠프에서 처음 접하게 되는 마약굴 안에서 흘러 나오는 Jefferson Airplane 같은 그룹이 모두 싸이키델릭 록그룹들이다. 특히 마약굴 내에서의 몽롱하고 친근한 공동체 분위기는 히피들의 공동체 생활을 흉내낸 것처럼 보인다.4)


3. growing in war
플래툰은 하나의 성장 소설식의 내용을 그리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크리스의 하나의 모험담에 그치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다. 이는 크리스의 신분이 특권층 계층이고, 군에 자원해서 밑바닥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러 군에 자원했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그에게 있어 전쟁이란 성인이 되는 계기 -많은 신화에서 나타나는- 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청년이 순수한 어린아이 상태에서 자신의 내면에 선과 악을 동시에 내포하게 되는 인물로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라는 스톤의 말은 이를 뒷받침한다.

여기에 있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전쟁이 이데올로기가 아닌 개인의 싸움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캐릭터들 사이에는 친족의식 혹은 동료의식이 거의 없다. 그들은 함께 복무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충성심이나 단체를 위한 자기 희생정신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다. 라이어스를 위시한 캐릭터들 사이의 친밀감 역시 단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사이의 유대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영화 내내 미군은 전투를 하고, 살인을 한다. 위에서 지적한 친족의식의 부재로 말미암아 캐릭터들은 매우 냉혈한 살인마의 이미지로 부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이 전쟁이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에 대한 아이덴티티의 확인은 없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아군 간의 감정 대립이 더 문제시되는 감도 없지 않다.

하지만 어쩌면 이 모두가 감독의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결국 전쟁은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문제라는, 그러한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데올로기 따위는 전선의 당사자에게는 중요한게 아니다. 그들은 하루하루 생존하기를 바라거나, 혹은 반스처럼 단순히 살상을 즐기며 그곳에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영화 안에서 그려지는 수많은 비극들 역시 이데올로기와는 상관없이, 전쟁 그 존재 자체로부터 비롯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리라. 시체들의 산 속에는 적과 아군의 구분이 없었다. 전쟁의 상처만이 남아있을 뿐.


4. end
이번에도 역시 산만하다.-_-; 일관된 논지가 없는 탓인 것 같다. 암튼 잘 봤다. 내겐 아직 영화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읽어내는 눈이 별로 없는가보다. 늘 개인적인 문제로 귀결되니 끙... 2002.3.31


5. appendix
전쟁의 상처를 그린 애니메이션으로 대표적으로 건담 시리즈를 들 수 있다. 이중 건담 매니아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작품으로 [건담 0083 - 주머니 속의 전쟁]과 같은 작품이 있다. 이 작품 역시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전쟁과 그 상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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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리버 스톤은 영화 중에서 크리스가 할머니께 쓰는 편지에 썼던 바로 그 자랑스런^^보병(grunt)이었다.

2) 버니, 반스, 오닐 등 못된 캐릭터는 백인이 맡고 있다. 반면 킹, 프란시스, 매니 등 라이어스의 동조자격인 그나마 선한 캐릭터들은 흑인이라는 사실과 관련지을 수 있을까?

3) 토니, 모어하우스, 버니 등에 의해 12살 소녀가 강간당하는 장면에 대한 영어 대본의 묘사는 영화보다 훨씬 더 적나라하게 끔찍하다.

4) 한편 마약굴 안에서 모두 노래 부르며 춤추던 곡은 Smokey Robinson의 소울 음악(정확히는 모타운 사운드)이었다. 올리버 스톤이 흑인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또다른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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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비안의 해적 : 블랙펄의 저주 (2disc) - [할인행사]
고어 버빈스키 감독, 조니 뎁 외 출연 / 브에나비스타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일단, 스포일러 와닝---




재미있는 영화다. 헐리웃의 공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짐에도 불구하고 짜증난다기보다는 재미있다. 돈을 퍼부었을듯한 CG를 이용한 액션씬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배경이 되는 카리브 해의 정경도 멋지다. 정말로 극장에서 볼만한 '오락용' 영화다.

연기 면을 보면, 이 영화에서 조니 뎁을 뺀 나머지 배우들의 연기는 전부 형편없다. 그만큼 조니 뎁이 빛나서일지도 모르겠다. 조니 뎁의 캡틴 잭 스패로우 연기는 정말로 웃기다. 관객들이 웃는 90%는 조니 뎁 때문이었다. 옆에 포스터만 봐도, 이른바 히어로격의 윌 터너와 히로인격의 엘리자베스 스완을 합친 것보다 조연격인 잭 스패로우가 더 크게 나와있지 않은가-_-!!!

물론 내가 이 영화에 대해 특별히 리뷰까지 쓰고 있는 것은, 헐리웃 식으로 잘 만들었으니 극장가서 봐라 라고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그것도 조금 있다만), 이 영화에서 주목할만한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다. 바로 아즈텍의 황금을 차지한 해적들이 저주에 걸려 불로불사의 몸이 된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해적들은 불로불사가 되어 좋아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저주를 풀고자 한다. 불로불사가 되면서부터 모든 종류의 쾌락(-_-!!!)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일단 영화 속의 대사를 통해 추리해보면 술, 음식, 섹스에 의한 쾌락이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달(보름달)빛 아래에선 저주받은 모습 즉 해골로 변하게 되며, 바르보사 선장이 해골로 된 상태에서 마신 술은 턱을 넘어가 뼈밖에 없는 몸 아래로 그대로 흘러내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슬프다.

불로 혹은 불사라는 소재는 사실 흔해져버린 소재이다. 드라큐라에서 시작된 흡혈귀,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_-좀비, 최근 또 한번 영화화된(영화 자체는 별로였지만) 도리안 그레이, 만화로 넘어오면 [무한의 주인]과 인어 시리즈까지.


--사례별 분석--
1. 흡혈귀(불로불사)
말 그대로 흡혈에의 욕망에 지배당한다. 그리고 그것이 생존에 직결되는고로 그들의 욕망은 상당히 심각하며 때로는 고통스러운 것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개중에는 그러한 운명을 절망하며 저주하는 경우도 있으니, 대표적으로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노스페라투] 속의 노스페라투(=드라큐라)이다. 이 영화 속에서 노스페라투를 죽이는 방법은 단 한 가지로, 밤새도록 처녀의 피를 빨게 해서 아침 해를 보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노스페라투는 죽지만, 그것은 의도한 자살에 가까워보인다. 끝없는 삶이란 분명 인간 -최소한 정신적으로- 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_ㅜ

2. 좀비(불사)
대부분은 살=고기에 대한 식욕에 완전히-_-! 지배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마찬가지로 그 행위가 생존에 직결되나, 더티한 모습에서부터 정이 떨어지기에-_-대부분 인간에 의해 참살-_-당하는 역할로 그려진다. '정신'이라는 것 자체도 가지고 있지 못한 모습으로 그려지므로 동정받을 여지가 거의 없다, 이 경우는.

3. 도리안 그레이(불로 그리고 아마도 불사)
알다시피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이 원작이다(리뷰 있음-_-). 초상화가 도리안 그레이 대신 나이를 먹고, 도리안이 추악한 일들을 저질러도 초상화가 추악해진다(cf. 사람 나이 40이 지나면 자기 얼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아마 상처도 대신 받는 것 같다, [젠틀멘 리그]에서 유추해보면. 따라서 도리안은 어떠한 악행을 저질러도 좋다는 뜻이 되며, 실제로 그는 주로 보이지 않는 악행들을 저지르며 살아간다. 단 하나 그가 죽을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초상화를 자기 눈으로 보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가장 두려워한다. 원작에서는 200년도 못 살고 스스로 초상화를 보고 죽지만, 영화에서는 적어도 1000년 넘게 살다가 적-_-에 의해 초상화를 보고 죽는다. 전자라면 조금은 동정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그다지 동정할만한 경우는 아니다.

4. [무한의 주인]의 만지(불사)
사무라이-_-? 만지는 어떤 노인(800살-_-)에 의해 몸에 혈선충이라는 벌레를 주입받게 되는데, 이 혈선충이라는 벌레들이 만지가 다치면 그것을 원래대로 복구해준다([총몽] 등에서의 나노 머신과 비슷하다). 머리만 아닌 팔이나 다리 같은 건 떨어져도 붙이기만 하면 오케이. 시간이 좀 걸리지만. 이 점을 빼고는 만지는 보통 인간과 다를게 없다. 팔, 다리가 떨어져도 붙이면 그만이긴 하지만 분명 그 순간만큼은 만지는 엄청나게 괴로워한다. 아직 완결이 안 나서인지 만지에겐 보통 인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은 없는듯 보인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머리를 베인다거나 늙어서 죽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5. 다카하시 루미코의 인어 시리즈의 인물들(불로불사)
이들은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건 인어 고기를 먹고 불로불사의 몸이 된다. 그리고 주인공 둘은 불로불사를 벗어나 보통 인간이 되고 싶어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늙어서 죽거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거나 한다면 고통스러울 것 같기도 하다만(이것은 이태행의[타임 시커즈]에서도 마찬가지) 무엇보다 역시 영원한 삶에 지쳐버렸기 때문이랄까.


쓸데없이; 길게 써버렸다. 하고 싶은 말은, 캐리비안의 해적들은 기존의 어떤 불로불사의 존재들보다 훨씬더 고통스러우리라 짐작할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 그들이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 역시 훨씬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인어 시리즈 주인공들이 그나마 가장 닮아있다고 할 수 있지만, 캐리비안의 해적들이 누가 봐도 훨씬 더 불쌍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10년만에 인간으로 돌아가는데 성공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건 그간의 해적질에 대한 처벌로서의 죽음뿐이었다.

그럼에도 영화에서는 이들의 고통과 비운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다는게 나에게는 불만이었다. 아까도 말했듯 헐리웃의 공식을 너무나 잘 따른 나머지 이 영화에서는 조금이라도 심각해질만하면 금방금방 분위기가 전환되곤 한다. 정말로 오락 영화로서의 정체성에 충실한 작품이다. 그래서 나로선 불만-_ㅜ

(200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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