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certo Grosso Per1,2
뉴트롤스 (New Trolls) 노래 / 굿인터내셔널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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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월, '그'의 손에 이끌려 학교 근처에 새로 생긴 레코드샵을 갔다.
A부터 Z까지 훑던 그는(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이 음반을 발견하고는 내게 말했다.

"이거 사라. 무조건 사."

당시에는 아트록에 대한 관심보다 RnB에 대한 관심이 컸던 나였기에,
이유도 안 가르쳐주면서 무조건 사라는 그의 말이 황당하게 들렸다.
어떤 음악이냐고 아무리 물어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결국 나는 그를 믿고 이 음반을 사버렸다.
그리고는 의심반 기대반으로 집에 와서 음악을 틀었고.

 

그 다음 일이야 뭐.

나는 아트록의 세계에 빠져 들어갔다.

 

왜, 장 그르니에의 [섬] 서문에 보면,
알베르 카뮈가 그 책을 주위에 열심히 권하고 다녔다지 않던가.

'그'에게 있어서도, 지금 선물용으로 이 음반을 두 번째 주문한 나에게도,
그리고 70년대에서 90년대를 거쳐온 수많은 아트록 리스너들에게도,
이 음반은 그런 식으로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아직도 나의 시간은 그 때, 대학교 1학년 시절에 멈춰있다.
그리고 이 음반은 나를 멈춰있게 만든 최초의 사건일 것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나는, 이 음반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

들으면 들을수록 헤어날 수 없는 이 현의 울림을,
글자 그대로 감동의 물결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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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외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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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와, 전에 리뷰한 [러시아 인형]의 작가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가 공저한 추리소설집(보르헤스는 추리소설을 즐겨 읽었으며 그의 작품들 속에서도 추리소설 혹은 탐정소설의 요소가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이다. 원래는 1942년에 오노리오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가상인물의 이름으로 세상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정말이지, 보르헤스 할아버지의 장난끼란. 물론 이것은 보르헤스를 비롯한 여러 남미 작가들을 읽는 키워드 중 허구적(환상적?) 사실주의의 맥락에서 충분히 수긍가는 장난이기도 하다. 

어쨌든 추리소설이라길래 본인은 나름대로 추리를 해보긴 했는데, 뒤에 가면 언제나 그 추리는 틀려 있었다. 물론 본인의 추리가 허술한 것도 사실이지만, 애초에 이 책의 주인공 이시드로 파로디가 펼치는 추리에는 원인과 결과에 집중하는 논리적 전개과정이라든가, 증거물에 의존하는 과학적인 수사방법의 요소 같은 것이 들어있지 않았다. 파로디는 감방에 갇혀 오로지 방문자들의 '말'에 의존해 사건을 해결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파로디는 인간사의 감정적인 면과 오랜 자신의 인생경험으로부터 사건의 동기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추리라기보다는 직감 혹은 직관의 차원이지만, 그럼에도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특이한 사건 해결방법과 더불어, 대부분이 장황하기 그지없는 대화로만 이루어진 문체 역시 단연 독보적이다. 여섯 가지 사건마다 사건 관계자들이 바꿔가며 파로디를 찾아와 사건의 정황을 늘어놓는데, 이것이 정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을 만큼의 묘사와 과장으로 가득찬 생동감 있는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기지와 해학으로 가득 찬 보르헤스와 카사레스의 수사(修辭)는 정말로 일품이다. 

끝으로, 영역본을 기초로 해서인지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게다가 각주가 너무나 많다. 재미있게 읽다가도 불필요한 각주 때문에 리듬이 깨지고 만다. 보르헤스 전집에서 이미 각주의 홍수에 익숙해져버린 독자들이라면 모를까, 이런 대중적인 책에 어째서 이렇게 많은 각주가 필요한지 의문이다. 대화 속에 불어, 라틴어 등 고풍스러운 표현이 상당수 섞여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역어를 쓰고 원어를 병기하는 정도로 편집했으면 어땠을까.(05-9-5, 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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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
딕 프란시스 / 미래향문화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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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에 관한 책이라고 해서, 내심 정글 속에서 펼쳐지는 액션물이라 생각하고 읽었는데 알고 보니 그런 내용은 아니었다. 서바이벌에 대한 부분은 주인공 존이 쓴 책과 황야(숲)에서의 연명술, 그리고 그다지 흥미롭지 못한 살인방법에 국한되어 있을 뿐, 밀리터리적인 요소는 들어있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저자 딕 프란시스는 경마를 소재로 삼기로 유명한 추리작가였던 것이다.

작가는 '서바이벌은 마음가짐에서 시작된다'라는 테제에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존이 겪는 몇 번인가의 생명의 위협에도 적용되지만, 동시에 주요 캐릭터들을 관통하는 이면적인 주제이기도 하며, 제목인 Longshot(경마용어로, 승산 없는 말)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다만 이러한 다층적 구조가 문학적으로 제대로 형상화되어 있지는 못하다. 저자는 스스로가 추리작가라는 사실을 잘 의식하고 있었고 현실적인 글쓰기를 한다는 점에서 존과 자신을 동일화하고 있는데, 이것은 작품 속에서 순수문학작가 에리카 업튼이 존과 나누는 대화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추리문학이며, 순수문학이 아닌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경마라는 흔치 않은 소재를 즐긴다는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경마 혹은 말(馬)에 대한 깊은 인상이 빠져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존이 아침햇살을 맞으며 처음으로 경주마 위에 오르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 임팩트가 약하다. 묘사가 부족한 것이다. 말에 대한 애정이라든가 경외심 같은 것이 독자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서스펜스라든가 두뇌싸움과 같은 장르소설로서의 미덕은 뛰어나다. 하지만, 미안한 얘기지만, 이런 미덕을 갖춘 뛰어난 장르소설은 이 책 말고도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한편, 작가는 시골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유대와 정에 대해 상당한 중점을 두고 있다. 아마 이 책을 읽은 어느 독자라도 딕 프란시스가 매우 인간미 있는 작가라는 사실에는 동의할 것이다. 존이 사람들의 불화와 동요를 막기 위해 끝내 범인을 밝히지 않는 것도 같은 의미로 읽힌다. 좋은 사람이 쓴 좋은 책이자 흥미로운 추리소설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이 쓴 매력적인 글은 아니다.(05-8-18, 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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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ai 2005-08-18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색할 때는 딕 프란시스가 아닌 딕 프랜시스로 하세요.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대산세계문학총서 7
조라 닐 허스턴 지음, 이시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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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인 그리고 여성. 이 이중적인 억압의 굴레에 놓여있던 조라 닐 허스턴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최초의 흑인 여성소설로 꼽힌다. 주인공 재니의 일대기에 외적으로 급격한 사회 변동이 추가된다면 [접골사의 딸]이나 [영혼의 집]과 비교할 법도 한데, 반대로 두 작품에서는 다루어질 수 없었던 소수인종인 흑인에 대한 시선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흑인 여성 재니가 세 명의 남성을 만나며 겪는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 속에서,  백인 혹은 남성으로 대표되는 기득권 체제에 대한 비판이 강도 높게 제시되지는 않는다. 작가는 흑인 민속의 가치를 인류학적으로 연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이 관점이 소설 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단적인 예로, 역자의 표현을 빌리면, 흑인들의 ‘말(言)잔치’에 많은 지면이 할애되어 있다. 과장법과 언어유희 때로는 촌극적인 요소까지 가미된 이 말잔치들을 작가는 구어체와 대화체를 사용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쩌면 이 사람냄새 나는 ‘구수함’의 정서야말로 위선적인 엄숙함과 권위적인 허위 속에 군림하고 있는 백인 남성 (그리고 그것을 모방하려 애쓰는 흑인 남성들, 대표적인 예로 재니의 첫 두 남자 로건 킬릭스와 조디 스탁스) 기득권 세력에 대해 작가가 내세우는 비판적 대안(재니의 마지막 남자 티 케이크로 대유되는)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한편 뛰어난 묘사가 돋보이는 소설의 위기부 18장에서, 이 책의 제목이 된 바로 그 의미심장한 문장이 등장한다.


 바람이 세 배나 무서운 기세로 덮쳐왔다. 그리고 마지막엔 불마저 꺼뜨렸다. 그들은, 이웃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헐벗은 벽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마음으로는 신께 묻고 있었다. 신은 지금 신 앞에서의 인간의 미약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인지. 그들은 어둠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들의 눈은 신을 향해 있었다.(pp.203~4)


 여기서 작가는 흑인 대 백인을 넘어 인간 대 신의 구도를 설정하고 있다. 재니와 티 케이크뿐만 아니라 모두가 신의 의도인 허리케인이라는 자연 재해 그리고 ‘사각 발가락의 죽음’을 온몸으로 절감한다. 그리고 티 케이크의 죽음으로 재니는 결국 그 앞에 굴복하고 만다. 그러나 ‘그 싸움의 대상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것, 거짓 생각이었다.’(p.239)에서 드러나듯 재니가 싸워야 하는 대상은 신이 아닌 인간, 더 정확히는 백인 혹은 남성 중심주의가 지배하는 매몰찬 현실이었다. 결국,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라는 문장에 함축된 메시지는 사실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


 요컨대 흑인 여성의 정체성을 최초로 다루었다는 의의 외에도, 인간미 넘치는 문체와 문학적 형상화 역시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끝으로, 재니가 티 케이크에게 다분히 ‘의존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허스턴의 이런 온건적 작품 성향이 당시 급진적 흑인 문학계 내부에서조차도 환영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빤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을 현대적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비판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의 여부는, 숙제로 남는다.



덧1. 인용문: 마치 테드 창의 [Story of your life]를 제목으로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로, 책 중에서는 ‘네 인생의 이야기’로 번역한 것과 같이, 번역의 일관성이 떨어지는 부분이다.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They seemed to be staring at the dark, but their eyes were watching God’이며, 개인적으로 ‘향해 있었다’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덧2. 말잔치: 속어로 유명한 흑인 영어를 한국어로 제맛을 살려 번역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역자는 나름대로 풍부한 어휘력을 발휘해 번역하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덧3: 올해 3월 TV 영화화되었다고 한다.

     http://www.oprah.com/presents/2005/movie/movie_main.j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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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 - 키드 - [할인행사]
찰리 채플린 감독, 찰리 채플린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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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의상은 채플린의 떠돌이 의상일 것이다. 그 의상은 채플린을 그렇게도 매력적으로 만든, 허영과 위세의 복잡스런 혼융을 의미하면서, 사회적 신분과 개성을 모두 나타내고 있다. (중략) 채플린이 인간을 보는 시각은 그러한 의상으로 상징화된다. 즉 자기 기만, 허영, 부조리 그리고 끝으로 신랄할 정도의 취약성 등이다. (자네티, 영화의 이해, p.325)


*편집버전-_-인 관계로 스토리만 훑고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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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나 퍼비안스(1915년부터 8년 동안 35편의 채플린 영화에 출연한 배우)는 남자에게 버림받고 부자집 앞에 서있는 자동차에 아이를 버린다. 그때 도둑들이 자동차를 훔치고, 아이는 슬럼가에 버려진다. 그리고 산책하던 채플린이 그 아이를 발견하게 된다. 슬럼가라는 더러운 공간의 영상화가 무척 잘 되어있는데, 채플린은 자신이 태어나 자란 슬럼가 세트에 투자를 많이 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러한 슬럼가의 미장센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 격차를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 뒷부분에서의 에드나와 에드나의 전남편이 등장하는 부분은 당시의 사교계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짤막한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슬럼가와의 대비가 엄청남을 알 수 있다.

쿠건이 아프게 되자 의사가 오게 되고, 그는 쿠건을 고아원 비스무리한 곳으로 보내려고 한다. 클로스업이 사용된 바로 이 장면에서 눈물 흘린 사람 많을 것이다(채플린의 명언: “코미디에는 롱 쇼트, 비극에는 클로스업”). 여기서 고아원 원장이나 경찰 등은 역시 기득권계층(유산계급)의 대유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부랑아나 고아와 같이 사회 안정(=기득권계층의 번영)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은 억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떠올리자.)

그러나 채플린은 쿠건을 구출(?)해 여관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여관주인은 신문에 실린 광고를 보고 쿠건을 경찰서로 데리고 간다. 여기서 에드나는 이미 유산계급의 반열에 들어선 상태인지라 돈의 힘으로 미디어의 힘을 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녀는 자본주의 속에서 성공하고 자본주의의 힘으로 잃어버린 꿈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녀가 슬럼가의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나누어주고 하는 등의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돈의 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이다. 이러한 에드나에 대해서 채플린은 부정적인 시각을 명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쿠건이라는 작은 행복 하나만으로도 살 수 있는 채플린에 반하여1) 물질적으로는 부족할 것 없지만 마음속의 큰 空洞을 어찌하지 못하는 에드나나 에드나의 전남편이 긍정적으로 비추어지지 않음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확대하자면 자본주의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엔딩은 쿠건과 에드나와 채플린이 모두 함께 살게 되는 해피 엔딩이다. 그들이 그 이후에도 전만큼 행복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 엔딩에서 중반의 쿠건이 끌려가는 부분의 페이소스가 완전히 해소되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엔딩 부분이 너무 짧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미소는 지을 수는 있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볼 때 으레 해피 엔딩이라고 하면 별로 환영하지 않는 편인데 채플린의 영화만은 예외인 것 같다. 뻔한 엔딩이라 해도,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은은한 미소를 짓게 된다.

솔직히 말해,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슬랩스틱만이 채플린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감상이 채플린이라는 위대한 배우이자 감독에 대해 알아가는 기회가 되었기에 기쁘다. 채플린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 웃음과 페이소스의 공존 그리고 현대사회의 병폐에 대한 비판 등 - 에 대해 그의 영화를 더 많이 접한 뒤에 다시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02.4.8 작성.
05.7.22 짧게 편집해서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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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채플린에게 있어 쿠건의 존재는 천사와도 같다는 암시가 채플린이 꾸는 백일몽 속에서 나타난다. 단, 그 속에 등장하는 악마는 안티 테제로서의 자본주의로 보기에는 좀 애매한 감이 있다. 어쨌거나 채플린에게 있어서는 쿠건이라는 행복의 부재가, 자본주의라는 체제에의 비판보다 더 중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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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 출연/워너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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