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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외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보르헤스와, 전에 리뷰한 [러시아 인형]의 작가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가 공저한 추리소설집(보르헤스는 추리소설을 즐겨 읽었으며 그의 작품들 속에서도 추리소설 혹은 탐정소설의 요소가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이다. 원래는 1942년에 오노리오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가상인물의 이름으로 세상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정말이지, 보르헤스 할아버지의 장난끼란. 물론 이것은 보르헤스를 비롯한 여러 남미 작가들을 읽는 키워드 중 허구적(환상적?) 사실주의의 맥락에서 충분히 수긍가는 장난이기도 하다.
어쨌든 추리소설이라길래 본인은 나름대로 추리를 해보긴 했는데, 뒤에 가면 언제나 그 추리는 틀려 있었다. 물론 본인의 추리가 허술한 것도 사실이지만, 애초에 이 책의 주인공 이시드로 파로디가 펼치는 추리에는 원인과 결과에 집중하는 논리적 전개과정이라든가, 증거물에 의존하는 과학적인 수사방법의 요소 같은 것이 들어있지 않았다. 파로디는 감방에 갇혀 오로지 방문자들의 '말'에 의존해 사건을 해결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파로디는 인간사의 감정적인 면과 오랜 자신의 인생경험으로부터 사건의 동기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추리라기보다는 직감 혹은 직관의 차원이지만, 그럼에도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특이한 사건 해결방법과 더불어, 대부분이 장황하기 그지없는 대화로만 이루어진 문체 역시 단연 독보적이다. 여섯 가지 사건마다 사건 관계자들이 바꿔가며 파로디를 찾아와 사건의 정황을 늘어놓는데, 이것이 정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을 만큼의 묘사와 과장으로 가득찬 생동감 있는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기지와 해학으로 가득 찬 보르헤스와 카사레스의 수사(修辭)는 정말로 일품이다.
끝으로, 영역본을 기초로 해서인지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게다가 각주가 너무나 많다. 재미있게 읽다가도 불필요한 각주 때문에 리듬이 깨지고 만다. 보르헤스 전집에서 이미 각주의 홍수에 익숙해져버린 독자들이라면 모를까, 이런 대중적인 책에 어째서 이렇게 많은 각주가 필요한지 의문이다. 대화 속에 불어, 라틴어 등 고풍스러운 표현이 상당수 섞여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역어를 쓰고 원어를 병기하는 정도로 편집했으면 어땠을까.(05-9-5, 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