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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사냥꾼 - 이적의 몽상적 이야기
이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먼저, 대중 가수로서의 이적에 대한 선입견은 배재하고 이 책을 평가하고자 한다.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가수가 소설(시도 아니고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그 소설이 전업 소설가가 쓴 소설보다 더 훌륭하다면 도대체 소설가는 뭣 때문에 존재한단 말인가.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이 소설집 [지문사냥꾼]은 상당히 괜찮았다.
소설가 김영하 씨가 지적하듯, 이 소설집에는 고딕 문학적인 정서와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다(고딕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근래 발간된 [세계 호러 걸작선] 1,2를 참고하시길). 이것은 분명 국내 문학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작풍이며, 그래서 환영받을 만하며, 또한 칭찬을 받아야 마땅한 부분이다. 요즘 국내 작가 중에 ‘제불찰 씨 이야기’와 같은 상상력을 가진 작가가 많지 않음을 생각해보라. 또한 표제작 ‘지문사냥꾼’은 중세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그로테스크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수작이다.
‘S.O.S’나 ‘독서삼매’ 등은 열린 엔딩의 형식을 취하는 아주 짤막한 단편들인데, 과감한 형식적 실험이 돋보인다. 문학적 상상력의 깊이는 깊지 않지만, 대신 지평이 넓다. 어느 정도의 깊이를 가진 작품으로는 ‘모퉁이를 돌다’를 꼽고 싶다. 해석하기 나름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실존주의적인 메시지(“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키에르케고르를 참고할 것)를 함축하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다. ‘활자를 먹는 그림책’에서 발견되는 메타 소설적인 요소는, 조금만 더 정제되었더라면 하는 큰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물론 소설집 전체를 볼 때, 문학적 완성도가 굉장히 높은 편은 아니다(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당연한 일이다). 디테일을 생략하는 과감한 문체는 독자를 몰입하게 만들지만, 이로 인해 때로 이야기의 짜임새가 엉성해지기도 한다. 또 기지를 뽐내기 위해 불필요하게 삽입된 듯한 느낌을 주는 문장도 여럿 보인다. 완전 구어체로 이루어진 ‘자백’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오히려 솔직하고 유기적으로 다가온다.
이 정도면 꽤 객관적으로 이 소설집을 평가내린 것 같다. 요약하자면, 비교적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고딕풍의 흥미진진한 단편 소설집. 분명, 이것이 데뷔작품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적이라는 ‘소설가’의 문학적 재능에 대해서 충분히 낙관적인 전망을 할 수 있을 듯싶다.(05-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