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변화 - 상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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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결혼이 단지 사랑이나 열정 같은 감정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위 환경과 현실적인 관계(이 작품에서는 특히 신분질서) 속에서 '만들어지는'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하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이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쉽게 이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 [결혼의 변화]는 제목부터, 그렇게 사람들이 막연히 가지고 있는 '사랑과 연애의 종착점으로서의 결혼'이라는 환상이 사회적 현실 앞에서 무너져버리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작가 마라이는 직간접적으로 시민 혹은 시민적인 것에 대한 서술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막스 베버)이 인물들 사이의 장벽으로 두텁게 작용하고 있는데, 조금만 설정을 달리 하면 얼마든지 현재 우리사회에서도 통용할 수 있는 주제다.

책을 읽다가 유디트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클림트였다. 유명한 클림트의 [유디트] 속에서 유디트는 가슴을 반쯤 노출한 채 아시리아의 장군 호로페르네스의 잘린 목을 들고 있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결혼의 변화]의 유디트 알도조는 단순히 남성들을 파멸로 이끄는 요부 그 이상의 다면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하녀 출신인 유디트는 '젊은 나리' 페터와 결혼하기 위해, 그리스 남자를 이용해 상류층의 질서를 익히며 십몇 년을 기다린다. 하지만 이렇게 강한 여자였던 유디트도 결국은 계급적 한계, 즉 페터의 건초 냄새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부도 젊음도 잃어버리지만 또다시 로마의 젊은 드러머와 사랑에 빠진다. 요컨대 마라이의 유디트는 신분, 정절, 부와 명예, 예술, 그리고 사랑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현대적 캐릭터다. 페터에게 전쟁이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데 반해 유디트에게 전쟁은 기존 가치체계의 붕괴를 의미하는 큰 사건이라는 사실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일롱카와 페터의 결혼이 실패한 이유를 일롱카의 열정과 페터의 용기 없음으로 해석할 것인지, 아니면 둘 사이의 신분 차이(전자는 '시민'의 축적자, 후자는 수호자) 때문으로 해석할 것인지 반드시 양자택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것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아말감해놓은 것이 산도르 마라이의 능력이니까. 마찬가지로 3장의 구성을 토대로 유디트를 일롱카와 페터에 대한 변증법적 총합으로 읽어야 할지도 어디까지나 독자의 선택이다. 소설이 반드시 대안을 제시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럼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대안적인(유디트와는 다른 의미로) 인물이 있다. 바로 작품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근대의 마지막 예술가 라자르. 시민성에 대한 분량만큼은 못하지만 '예술가'에 대한 서술 역시 책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마라이가 제시하고자 했던 예술가상 그리고 그것과 주제와의 연관성은 숙제로 남겨둔다.(05-10-6, 필유)

 

덧: 소설의 마지막(3장) 배경은 라자르가 마지막으로 찾은 로마다. 의미심장하게도, 로마는 과거의 빛나던 '문화'가 죽어 흔적만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맹룡과강]에서 이소룡이 말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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