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폐허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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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시오랑(루마니아인이므로 치오란으로 표기해야 하나 시오랑으로 굳어졌다)도 5년 전 알게 된 작가다. 정확히는 이 책 말고 [내 생일날의 고독](에디터, 1994)을 통해서였다. 자세히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로쟈 님의 글에 따르면 그 책은 1981년에도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이 글 참고. http://blog.aladin.co.kr/mramor/6736402

당시 조사한 바로는 작가의 첫 작품인 [절망의 맨끝에서]가 더 복간 가치가 높다고 봤는데, 실제로 1994년과 1997년, 그리고 마침내 2013년에 이렇게 정식 출간되었다([내 생일날의 고독]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에도 나온 적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2009년 헤르타 뮐러가 노벨상을 타며 문필가 및 대중 사이에서 시오랑을 비롯해 루마니아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반짝 높아지기도 했다.

이방인이자 낙오자로서 자살을 삶에 대한 보험으로 삼고 일도 결혼도 안 하고 84세까지 허무주의 잠언만 쓰다 간 작가. 이런 사람이 1934년에 쓴 첫 작품이 거의 80년 만에 나와서 기쁜가 하면, 딱히 그렇지는 않다. 앞의 글에서 로쟈가 지적하듯, 거의 1초 만에 표지와 제목에 불만이 터져 나온다. 수년 전 시대(라고 쓰고 시장이라고 읽는다)를 풍미했던, 위로나 힐링의 심리학을 내세운 얄팍한 책들과 판박이다.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가려는 의도였겠지만, 이건 그냥 역효과다. 표지에 꽃 넣은 소설치고 제대로 된 걸 못 봤다. 동서문화사의 [앨저넌에게 꽃을]과 마찬가지로 이건 폭력이고 만행이다. 텍스트 내용과 무관한 일차원적인 발상 아닌가. [꽃들에게 희망을]조차 표지에서 부각하는 건 꽃이 아니라 나비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표지에 장미가 있다고 상상해보라. WTF!?

외향보다 더 중요한 건, 80년을 기다렸는데도 중역본이라는 점이다. 1997년 판과 같은 프랑스어 번역자가 번역했지만, 이 책은 그가 프랑스로 망명하기 전에 루마니어로 쓴 작품이다. 위키백과, 또는 멀리 갈 것 없이 [독설의 팡세](문학동네, 2004) 책 소개를 봐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가 프랑스어로 쓴 첫 책은 1949년에야 나왔다. 요즘 같은 시대에 운문까지는 아니더라도 아포리즘을 중역으로 읽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긴 시간 끝에 정식으로 출간되는 책이라면 더욱더. 판권 문제가 복잡했으리라 추측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길게 외적인 얘기만 늘어놨다. 텍스트만 놓고 보면 어떨까. 시오랑은 헤르타 뮐러 등 여러 작가와 마찬가지로 차우셰스쿠 정권을 피해 루마니아를 떠났다. 차우셰스쿠는 "민중들의 표현의 자유와 언론을 통제하고 반대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 독재정치를 하였다."(위키백과) 뭔가 데자뷔가 느껴지지만... 시오랑이 택한 니힐리즘 아포리즘이, 오늘날 이곳 헬조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어떤 의미를 전할 수 있을까? 5년이 흐른 지금은 이것조차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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