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의 바깥 창비시선 335
이혜미 지음 / 창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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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는 죽음의 색이다. 죽음이란 말은 너무 낭만적일 수 있다. 보라는 치아노제, 울혈, 시반, 부패의 색이다. 나는 [보라의 바깥]이란 시집에서 죽음이나 부패 같은 것에 대한 적나라한 심상을 기대했다. 그저 주관적인, 아무 근거 없는 예상이었다.

[보라의 바깥]에서 보라가 직접적으로 죽음과 연결되는 장면은 없었다. 보라색이라는 색깔조차 {퍼플 버블}을 제외하면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 허윤진의 해설을 읽기 전까지 내가 이 책에서 주로 본 색은 파란색({피어리 아라베스크} 등 다수), 붉은색({초경}, {각인}), 그리고 초록색({측백 그늘}, {링반데룽})이었다. 허윤진은 시인을 어류와의 사랑을 꿈꾸는 인간(혹은 조류)으로 놓고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내 인상과는 달라 놀랐고, 또 고등학교 시절 문학 선생님이 교과서에 실린 시를 설명할 때처럼 시어와 상징이 딱딱 맞아떨어지게 해설을 썼다는 점에서 또 놀랐다.

표제작인 {보라의 바깥} 역시 ‘색’이 아니라 ‘빛’을 이야기한다. 다만 ‘보라의 바깥’을 ‘자외선(紫外線)’에 빗댄 표현이라고 (일차원적으로) 해석할 만한 힌트는 보인다. “나는 도망친다 / 빛으로부터.”(3연)라든가 “빛의 주검”(6연) 같은 표현. 시인은 시인답게 보라색에 사람들이 씌운 통념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죽음과 부패는 물론이고, 허윤진의 어류 대 조류 구도에서 유도할 수 있는 파란색과 빨간색의 ‘중간’에 있는 색깔로서의 보라의 이중성에 대한 이미지마저도.

전체적으로 이혜미의 이 시집은 내 기대와는 지향점이 달랐지만, 사실 꽤나 읽을 만했다. 책장을 넘기다 시선을 멈추고 감탄 혹은 생각에 잠기게 되는 구절이 곳곳에 있었다. {푸른 꼬리의 소년}에는 한국의 포스트록 밴드(로로스) 노래 제목이 나와 미소를 지었다. “너는 해초마냥 나를 휘감았네 내 머리카락도 천 개의 손이 되어 너와 얽혀들었지”로 시작하는 {측백 그늘}은 첫 연부터 말 그대로 읽는 이를 빨아들이고, 왠지 허수경스러운 마지막 연도 너무나 그럴싸했다. {문득 말하기를 멈추고}에는 이지적이면서도 세련된 문장들이 적절한 자리에 놓여 있었다. {침몰하는 저녁}, {초경}, {어느 새}는 어떤 의미로든 독서를 멈추게 하는 공통된 모티프를 공유한다.

{링반데룽}은 이 시집에서 가장 훌륭한 시는 아닐지 몰라도, 내 뇌리에 가장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현실적인 이미지가 아니다)를 그리게 했다. 마침표 없는 한 문장 한 문장이 한 프레임 한 프레임으로 이어져 동영상이 되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이 동영상에 담긴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명백하게 같아 보이지는 않음에도, 제목을 보면 응당 무한히 반복되어야 할 것만 같았고, 나는 이를 재귀호출로 명징하게 쓰지 않은 데 조금은 불만을 느꼈다. 무척이나 좋아서 느껴지는 아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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