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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일반판) ㅣ 문학동네 시인선 2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지금은 사라진, 어디 사는 몇 살인지도 모를 누군가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들을 읽고 시집을 모으기 시작한 게 2005년이었다. 허수경은 당시 나를 사로잡은 시인 목록 1번에 있었고, 시 1번은 물론 {봄날은 간다}였다. 그럼에도 내 맘대로 만든 이미지가 깨지는 게 두려워 [혼자 가는 먼 집] 외에 다른 시집을 사지는 않았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그랬다.
이 시리즈가 처음 나왔을 때 대대적인 책 광고에 매일 노출되면서도, 살까 말까 못내 고민만 했다. 요즘에도 판형 등 제작 사양으로 장난치는 출판사가 많은데, 특별판과 일반판이라니 뭔가 거부감이 들었던 거다. 그러다 결국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고, 당시는 마침 금감원 등이 압력을 넣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알라딘에서 액티브엑스 없이도 결제가 가능했던 때라서 기쁘게 오페라(크롬으로 바뀌기 전 오페라)에서 결제했던 기억도 난다.
물론 나는 특별판 따위 장난에 속지 않으므로(라고 쓰고 책 사는 데 돈 쓰는 게 아까운 속물이라서,라고 읽는다) 한 치도 주저하지 않고 일반판을 샀다. 사실 일반판조차도 보기 드문 사철 반양장 형태로, 내구성이 좀 걱정되긴 해도 ‘책 펼쳐짐의 질감’ 자체가 다르다. 서체도 어딘가 복고적이다(특히 볼드 서체의 저 과감한 획 굵기란).
분명히 [혼자 가는 먼 집], 정확히는 내 1번 {봄날은 간다}의 간결함에 비하면 문장의 길이는 길어졌다. 이미지가 깨지긴 깨진 셈인데, 뭐랄까 허용 범위 안이다(이제니의 [아마도 아프리카]와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사이에서 내가 느낀 배신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거의 매 페이지마다 경탄스러운 문장이 존재한다. 어떤 건 거의 지구인이 구사하는 언어가 아니다. 허수경은 사실 외계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류! / 사랑해 / 울지 마!”(109쪽) 어휴, 그것도 이렇게 인본주의적인 외계인이라니.
특히 좋았던 건 {난 존재를 안고 있는 허당이었어요}, {입술}, {그림자의 섬}, 위에 인용한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등이다. 시 전체의 심상 혹은 정서를 따라가기는 어려워도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나 그럴싸한 것들도 있었다. {아름다운 나날}, {폭풍여관, 혹은 전투 전야}, 표제작 등.
다른 이야기. 표제작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이거 긴 세기의 이야기지요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이야기지요”(126~127쪽) 여기서 뭔가 떠오르는 게 있지 않나.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정말 유명한 동시에 또 오해받는 말이지만)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이 야만이라고 말했다. 2014년 이후 한국에 살며 어떤 시를 읽든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