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출장다녀온 너구리님을 만났다.
화사한 민소매 차림이었다.

미모가 너무 눈이 부셔 시선이 자연스럽게 어깨 부근으로 갔는데
직선적인 성격 탓인지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팔이 굵으시네요."
내 말에 너구리님은 배시시 웃음으로써 동의를 표했다.
순간 난 팥빙수를 먹던 숟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25년 전, 그 일이 생각나서였다.

난 중 3이었고, 나름대로 청운의 뜻을 품고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지나가는 여학생 떼를 보면 "저들 중에 내 배우자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고
내가 좀 더 자라면 눈이 작은 스타일이 인기를 끌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되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어느 하교길, 말 인형에 시선이 끌려 골동품 가게로 들어갔는데
주인 아저씨가 갑자기 가게 문을 걸어잠군다.
무서워서 도망치려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아저씨는 웃으면서 내게 다가왔다.
"난 나쁜 사람이 아니야. 너에게 해줄 말이 있거든"
"무, 무슨 말을...저 아세요?"
아저씨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팔이 굵은 너구리를 찾으렴. 그 너구리가 바로 네 운명의 여인이야.
네가 그를 지켜줘야 해."
"네? 너구리가 왜 팔이 굵어요?"
아저씨가 다시금 문을 열어 줬을 때, 난 이제 살았다 싶어 집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
세상엔 이상한 사람이 많다 싶었지만
그래도 여운이 남아 다음날 하교길에 그 가게에 들렀을 때,
난 그 가게가 철거되는 광경밖에 볼 수 없었다.

그 뒤 25년간 한 순간도 그 아저씨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괜찮으세요?"
정신을 차려보니 너구리가 내가 떨어뜨린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너구리는 그 숟가락을 내 팥빙수에 꽂았다.
"마저 드세요. 다 녹겠어요."
묵묵히 팥빙수를 먹다가 말했다.
"너구리님, 제가 님을 만난 건 어쩌면 운명일지도 몰라요."
막 팥빙수 한숟갈을 입에 넣던 너구리는 내 말에 놀라 사래가 들렸다.
"흥, 전 운명 같은 건 안믿어요. 제게 운명이라고 말했던 남자들,
죄다 제 미모에 반해 어떻게 해보려고 수작거는 거라고요.
부리님도 다를 바 없어요."
난 쓸쓸한 눈으로 너구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은 믿기 힘드실지 몰라도, 결국엔 믿게 될 겁니다.
기다려 주세요, 너구리님."
내 표정에서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느꼈는지
너구리님은 팥빙수값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