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내가 몸담았던 써클에서는 소식지를 만들 때마다 내게 글을 청탁한다. 내가 글 거절을 안하는 게 가장 큰 이유일텐데, 인터넷에 신변잡기는 쉽게 쓰지만 후배들이 볼 글을 쓰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뭔가 귀감이 되고픈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글의 흐름을 방해하기 때문. 그래도 지금까진 어찌어찌 위기를 넘겨가며 글을 건내줬다.


이번 여름 강원도로 써클 모임을 따라갈 때, 휴게소에서 후배 하나가 내게 다가오더니 글 얘기를 꺼낸다.

“글 정말 잘 읽었어요.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난 그게 의례적 인사라고 생각했기에, “고마워요”라는, 정말 의례적인 답을 했다. 그가 다시금 입을 연다.

“제가 여자랑 헤어진 지 얼마 안되서 형 글을 봤어요. 많이 공감이 가더라고요. 안그래도 그 여자가 저랑 헤어지면서 ‘오빠는 여자 마음을 너무 몰라!’라고 했거든요. 그러고 며칠 동안 계속 형 글이 생각났어요.”

내가 쓴 글이 뭐였는지는 잊어버린 지 오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거기다 글을 썼다는 게 얼마나 보람 있었는지 모른다. 메일로 글을 보낼 때만 해도 “어휴, 이딴 글을 왜 썼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내 글이 누군가의 마음을 각성시킬 수도 있다니 얼마나 신기한가. 한 사람의 관객만 있어도 연극을 공연하겠다는 어느 배우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뭐라도 된 듯한 느낌도 들고. 그것만으로도 써클 모임에 따라간 보람은 충분했다.


둘.

환자 청탁 문제로 대전에서 이비인후과를 하는 친구와 통화를 하게 됐다. 용건이 끝나자 그가 갑자기 묻는다.

“너 엊그제 뉴스 봤니?”

평소 9시 뉴스를 거의 안보지만, 친구가 말한 뉴스는 희한하게도 봤다. 아마 그때쯤 내가 저녁을 먹고 있었기 때문인데, 뉴스에서는 한 꼭지를 ‘선풍기 죽음은 없다’에 할애하고 있었다. 지원자를 모아 실험을 해본 결과 선풍기를 틀고 자도 산소분압이 낮아지지도 않았고-질식설은 배제됨-체온이 낮아지지도 않았다는 것. 법의학교실의 이윤성 교수가 나와 말한다.

“선풍기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원래 죽을 사람이 죽었는데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던 거죠.”


친구가 말한다.

“넌 학생 때부터 선풍기 틀고자면 죽는다는 게 거짓말이라고 했지. 그때 난 네가 워낙 황당하니 그런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어. 너 작년에 신문에 그 주제로 글 쓴 적 있었지? 그 글이 우리 이비인후과 사이트에 퍼올러져 논란을 일으켰어. 대부분의 의사들은 ‘이런 황당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였는데, 네가 옳았어.”

한겨레에 쓴 글 중 유일하게 네이버 메인에 떠서 수백개의 댓글이 달린 그 글을 내가 어찌 잊어버리겠는가. 그 댓글의 대부분이 “알지도 못하는 놈이 무책임한 글을 쓰고 있다”였고, 어느 인터넷 신문에서도 “허황된 얘기를 써서 네티즌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는 기사를 실은 바 있다. 하지만 내가 글에서 썼던대로 선풍기 때문에 죽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오직 한국사람들 뿐이며, 그게 비웃음의 소재가 된 지는 꽤 오래 된 일이었다.


친구의 말은 이어졌다.

“법의학 이윤성 선생님 말이야, 마치 오래 전부터 잘 알았다는 듯이 이야기하시대? 그랬으면 미리 좀 말해주지!”



전화를 끊고 나서 기분이 좋았다. 나를 그저 재밌고 황당한 애로만 보던 친구한테서 “네가 옳았어”라는 말을 들었으니 말이다. 이런 게 글을 쓰는 보람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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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춘 2007-08-07 0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초등학교 2학년때 해봤어요. 죽지도 않는데 잠도 안왔어요.
근데 전 왜 죽으려고 했을까요? (분위기 파악못하는 게 춘의 매력)

해적오리 2007-08-07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거 예전에 수사반장에선가 봐서 제 뇌리에 콱 박혀있었죠. 아직도 그 드라마에서 선풍기 살인이 저질러졌던 방의 모습이 생각나요. (아~ 오싹해라..)
(칫, 뭔 댓글이 이래?)

비로그인 2007-08-07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뿌듯하시겠어요.

다락방 2007-08-07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 정말 멋져요!!

2007-08-07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와 2007-08-07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 만세~!!!!

비로그인 2007-08-07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 죄송해요. 전번에 웃어서..그날 마침 비가 왔죠...하하하;;;;;;

2007-08-07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8-07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심은 통하게 되어있어요.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있어요. :)

네꼬 2007-08-07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부러워라. 멋져요, 부리님!

마법천자문 2007-08-07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어컨 회사에서 퍼뜨린 헛소문 아니었을까요? 선풍기의 이미지를 나쁘게 해서 에어컨을 많이 팔려는..

심술 2007-08-07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풍기 틀고 자면 질식사한다'란 말이 과학적 근거가 있는 거냐고 옛날에 딴지일보에서 '영화 속의 비과학적인 구라'라는 꼭지를 연재하시던 필명 구라돌이님께 이메일로 여쭌 적이 있는데 구라돌이님 답은 '갓난아기일 경우 저체온으로 죽을 수도 있지만 질식사할 염려는 없다' 였지요. 그 멜 보낸 지가 벌써 몇 해 전인지 기억도 안 나네요.

프레이야 2007-08-07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 보람 느끼셨으니 좋은일이에요^^
참, 선풍기 틀고 자면 질식사는 모르겠고 목감기 걸려요..

이매지 2007-08-07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안그래도 그 뉴스보면서 부리님 생각했어요 ㅎㅎㅎ

2007-08-09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7-08-09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인형은 원래 사드리기로 했잖아요. 글구 주소, 찾으려면 찾는데 당장 좀 어려웠어요 회의준비 때문에...
이매지님/오옷 저도 방금 이매지님 생각하고 있었어요!^^
혜경님/흐음 목감기라... 전 지금도 3번으로 얼굴에 향하도록 틀고 잡니다^^
심술님/아 님도 의문을 품었었군요!! 반갑습니다
KJ님/에어콘이 대중화되기 전부터 있는 믿음이었던 것 같은데요^^
네꼬님/네?? 부러울 것 까지야...^^
아프님/안그런 것도 있겠지만 하여간 다행입니다 호호호/
속삭님/그게...집에 있어서 말입니다...
정아무개님/음, 귀염이 제 컨셉이죠 호호호
너구리님/제맘 아시죠?^^
레와님/만세씩이나... 레와님도 만세이!
다락방님/멋질 것까지 있나요... 부끄럽습니다
민서님/뿌듯할 것까지 있나요...부끄럽습니다
해적님/선풍기 죽음도 구라인데 선풍기 살인까지..선풍기로 때려죽인 건가요
산사춘님/어맛 오랜만이어요!! 방가방가.


twinpix 2007-08-11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선풍기! 얼마전에 친구에게 주장했다가 친구가 다시 뉴스를 봤다면서 반박해서 침울해 있었는데, 이 글을 읽으니 다시 기운이 납니다. 친구에게 보여줘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