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해도 망하지 않아 - 프랜차이즈는 따라할 수 없는 동네카페 이야기
강도현 지음 / 북인더갭 / 201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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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프랜차이즈 까페를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겨찾는 편이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까페인만큼 다른 상호를 달고 있어도 프랜차이즈 까페안에 사람은 가득하지만, 그 사람 가득한 공간에서 가장 독립되게 있을 수 있음을 느낀다. 커피를 한 잔 시켜두고 책을 읽는 그 시간은 오롯이 나만의 시간인 것 같아 내게는 소중하다. 그때의 나를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부터인가 내게 프랜차이즈 까페는 내가 독립적일 수 있는 곳 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낯선 동네를 걷다가도 익숙한 상호를 발견하면 안심이 되곤 했다.


그러나 나같은 사람만 가득해서 그런 까페만 수두룩하다면 그 안에서 안심이 아닌 소외를 느끼는 사람들은 갈 곳을 잃을 것이다. 내가 혼자라서 안정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무관심하고 차갑고 외로운 곳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세상엔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가.



이 책은 '카페'라는 공간을 통해서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작은 동네까페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깁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마케팅이 아닌, 존재의 이유이자 근거로서의 이야기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자의적으로 혹은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스토리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관심'의 무게중심을 옮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관심을 두어야 할까요? 무엇이 스토리의 시작인가요? 정답은 '타인'입니다. '나'에게 집중돼 있는 관심을 '타인'으로 옮기기 시작하면 비로소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pp.227-228)



스토리가 있는 까페는 내 개인적으로 원하는 카페는 아니다. 내가 가고 싶은 카페는 스토리가 있는 카페가 아니다. 가족적인 환경의 카페를 내가 가고 싶지는 않다. 생각해보니 내가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혼자이면서도 안정적임을 느꼈던건, 그 카페안의 모두가 다들 지나다가 그곳을 들른 사람들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만약 그곳이 동네 카페라서 늘 친숙하게 오던 사람들만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곳에서 나는 내가 이방인임을 느끼며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이방인이어서 편한건 다른이들도 이방인임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속에서 저자가 찾아갔던 동네 까페들은 하나같이 이 저자가 주장하는 바대로 '스토리'를 가진 까페를 운영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이 까페 운영의 목적이 결코 아니다. 정신병원 의사로 근무하며 카페를 운영하고 그 카페에서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고용한 의사는 이렇게 얘기한다.


장애인이나 마음이 아픈 분들은 어떤 일자리를 원할 것 같아요? 답은 간단해요. 모두가 원하는 일자리, 당신이 일하고 싶은 그곳에서 그들도 일하고 싶어하죠. (p.79)



자폐증을 앓고 있는 청년에게 커피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같이 일하고 있는 [행복한 카페]의 진은영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래도 소통 가능한 직업이 서비스직이잖아요. 커피는, 즉 커피를 파는 것은 단순업무가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매개잖아요. 그래서 세상에 장애인 친구들을 보여줄 수 있고 이 친구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까페를 만들게 됐죠. 저는 커피가 관계라고 생각해요. 카페에 혼자 갈 때조차 제 자신과의 관계를 위해 가거든요. 커피를 통해서 사람들은 더 깊은 관계를 맺게 돼요. 장애인 친구들에게 가장 주고 싶은 선물이 바로 그 관계였거든요. 세상과의 관계요. (p.200)



내가 까페에 가서 커피를 시키고 책을 읽고 앉아 있는 그 시간의 나는, 오로지 나만을 생각했다. 물론 나는 그 시간과 그 공간의 내가 특별히 못됐다거나 이기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골목의 카페들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알지못했음은 분명하다. 물론 우리동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카페들이기는 하지만, 그 카페라는 공간 안에서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섞이고 소통하기 위해서 커피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옳다고 생각하는 바가 같아도 그것에 이르는 과정은 모두 같지 않을 것이다. 카페는 그 과정중에 가장 친근한 과정이 아닐까.



호기롭게 카페를 시작했다가 생각대로 되지 않아 동네 카페를 찾아 돌아다녔던 저자는 이제 자신의 카페에 이야기를 만들기로 하고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카페를 시작한다. 그는 카페의 이야기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SNS 에 풀어놓는다. 저자가 운영하는 카페바인은 삼성카드 가맹을 해지하고 그 사실을 트윗에 알려 다른 카페와 식당들을 동참시킨다. 투표독려 캠페인을 하고 반값등록금 투쟁에 참여하고 온 학생들에게는 커피를 반값에 제공했다.



지금까지 가장 파급효과가 컸던 트윗은 얼음이 얼 정도로 추운 저녁, 경찰이 FTA 반대 시위대에 물대포를 마구 뿌리던 날이었습니다. 물대포 세례에 젖어 추운 시위대에게 혹 홍대까지 오실 수 있다면 따뜻한 커피를 그냥 드리겠다고 썼습니다. 이벤트는 아니었고 저희가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해 죄송한 마음에 쓴 트윗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트윗이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그날 하루에 팔로워가 거의 2천명이 늘었습니다. RT 횟수를 셀 수가 없었죠. 커피란 그런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몸을 녹여주는 따뜻함. 그날 경험을 통해 카페바인이  어떤 커피를 세상에 내놔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pp.239-240)



단순히 공짜 커피를 마실 수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 트윗을 RT 한 건 아니었을거다. 세상 어딘가에서는 너희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게 이런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알리고 싶은 마음이 RT 를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카페에서 커피를 나누어 줌으로써 그리고 그런 사실을 스마트폰 창으로 알리면서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을 지지하고 응원한다.SNS 를 통해서 저자가 운영하는 [카페바인]은 자신의 스토리를 알릴 수 있었고, 그 스토리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책 말미에는 인터뷰한 카페 말고도 다른 카페 몇 군데가 더 등장하는데, 그중에 나는 3층은 법률상담을 할 수 있고 2층은 카페로 꾸며놓고 있는 [동네변호사카페]가 인상적이었다. 동네에 위치한 법률상담소라 사람들은 뭔가 크게 각오하지 않아도 법률 상담을 받을 수 있다. 그게 애초에 이런 카페를 내게 된 변호사의 의도였다. 마지막에 실린 [책 읽는 고양이 카페]는 일회용품을 쓰지 않고 공정무역 커피를 내리고 있으며 길고양이를 포함해 총 열 두마리의 고양이들이 카페 안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찾아가 보고 싶을것 같아 검색했더니 시사인에서 한 번 소개한 기사가 있었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9687




영화 [어바웃 어 보이]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람에게는 여분의 존재가 필요하다. 나에게 그 여분의 존재가 카페에서 필요한 건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카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뜻에 맞게 그리고 타인과 함께 하는것을 고려해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안심이 됐다. 어쩌면 나는 내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대신 맡기고 편하게 살고 있는건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 책에 나는 별 넷을 주지만, Arch님, 마중물님, 레와님이 읽는다면 아마 별 다섯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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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2-12-11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ㅎㅎ
그 어떤 문장보다 마지막 문장에서 확고한(?) 지름신을 영접합니다.

다락방 2012-12-12 08:33   좋아요 0 | URL
응. 레와님은 이 책 좋아할 것 같아요. 동네 카페의 분위기라든가 그들의 의의라든가 하는점에 많이 공감하고 동의할 것 같구요. 뭐, 내 추측이죠. 훗.

웽스북스 2012-12-1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나는요? (이제 별게 다 궁금해 ㅋㅋㅋ)

다락방 2012-12-12 08:32   좋아요 0 | URL
뭔지 모르지만 이상하게 동네카페 좋아하는 웬디양님이지만, 별 넷을 줄 것 같더라구요. ㅎㅎㅎㅎㅎ

Mephistopheles 2012-12-11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층짜리 건물 지어서 4층은 내 작업실 3층은 집 2층은 마님 학원, 1층엔 이런까페와 심야식당같은 밥집.....

다락방 2012-12-12 08:31   좋아요 0 | URL
제 남동생은 4층짜리 건물지어서 각 층에 우리 삼남매와 그에 딸린 식구들(이라고 해봤자 저는 딸린 식구가 없..;;)1층엔 부모님 이렇게 살자고 하더라구요. 제가 남동생에게 이제 그만 좀 붙어살자고 했어요. ㅋㅋㅋㅋㅋ

맥거핀 2012-12-11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아닐 것이라 생각되지만, 저도 사실은 스토리있는 카페는 별로 가고 싶지가 않을 것 같네요. 다락방님이 말한 프랜차이즈 카페..거기는 모두가 이방인이다라는 말씀에 공감하며, 저도 그런 데가 더 편합니다. 더 나아가 그런 프랜차이즈 카페의 개수로 동네의 수준을 판단하는 돼먹지않는 습성이 생겼어요. 오..여기는 할리스도 있고, 스타벅스도 있는 좋은 동네..뭐 그런 식으로요.

다락방 2012-12-12 08:31   좋아요 0 | URL
네, 맥거핀님. 저는 모두와 친근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고 많은 사람들과 아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은 성향을 가졌기 때문인지 카페에서는 이방인들 틈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어요. 사실 이런 성향의 제가 읽는거라 처음부터 좀 고개를 갸웃하긴 했거든요. 이런 카페는 나랑은 어울리지 않아, 하면서요. 그러나 동네 카페는 동네 카페 나름의 의의와 의미가 있다는 걸 알겠더라구요. 뭐, 여전히 저는 스타벅스를 가게 될테지만요.
하하하하, 프랜차이즈 카페의 개수로 동네의 수준을 판단한다뇨, ㅎㅎㅎㅎㅎ 웃었어요. 혼자 막 상상하면서요. 오, 여기는 할리스도 있고 스타벅스도 있군, 이런거. ㅎㅎㅎㅎㅎ

아무개 2012-12-12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는 고양이 카페 가보고 싶어서 검색했는데 역시나 회사에서는 접속이 안되는군요.
고양이 때문에 별 다섯개를 주리라 생각하신걸까요? (참고로 저는 커피전문점 일년에 한번도 잘 안가는데욤 ^^:::)

A가 Z에게도 그렇고 제게 추천해주신 이유가 궁금해요오오오오~~ @..@
아마 답변은 그냥 좋아할꺼 같아서, 뭐 이렇겠지만요 ㅋㅋ

10일부터 새 부서로 출근했어요. 지역도 바뀌고 사무실도 바뀌고 하는 일도 전혀 새로운 일이라
완전 엄청나게 긴장되요.....

다락방 2012-12-12 12:14   좋아요 0 | URL
고양이 카페는 맨 마지막에 추가적으로 짧게 나오는거라 그것 때문만은 아니구요, 그냥 느낌이죠 느낌. 뭐랄까, 이런 생각과 이런 분위기라면 좋아하실것 같다, 이런 느낌. 그런데 [A가 X 에게]는 어떠셨어요? 제 예상과는 달리 별로 재미 없으셨나요? ㅎㅎ (Z 가 아닙니다!!)

오, 새로 바뀐 일은 어떤 일일까 궁금하네요. 조만간 소주 일 잔 들이켜 가면서 새로운 일에 대해 들어봐야겠어요. ㅋㅋㅋㅋㅋ
전 같은일을 몇년째 하는데도 긴장돼요. 이 긴장이 싫어서 때려치고 싶어요. 뭔가 대안만 찾으면 때려쳐주겠어욧! 불끈!

아무개 2012-12-13 09:08   좋아요 0 | URL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아...민망하여라~ A의 편지글 보다 X의 메모에 더 많은 포스트 잇이 붙여져 있어요^^

감자탕에 소주마시러 갑시닷 후르르 짭짭 캬~~~~

네꼬 2012-12-1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 년만에 들어와서 댓글 달려고 로그인하는 내 마음을 알아 주오.

moonnight 2012-12-13 18:16   좋아요 0 | URL
앜! 네꼬님이시다!!!! 반가와요. 네꼬님. 보고 싶었어요. >.<

다락방 2012-12-14 13:29   좋아요 0 | URL
무슨 마음? 안보이는데? 안보이는데요? ㅎㅎㅎㅎㅎ

풀칠아비 2012-12-12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가 이방인어서 편한 것은 다른 사람들도 이방인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프랜차이즈 커피집에 앉아 있지만, 여기 오는 사람들이 아는 척한다면 과연 이 자리를 다시 찾을 것인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말씀처럼 사람은 다 다르니까요.
즐거운 수요일 보내세요.

다락방 2012-12-14 13:29   좋아요 0 | URL
비오는 금요일입니다, 풀칠아비님. 이런때야말로 혼자 카페에 들어가앉아 책을 읽으며 따뜻한 커피를 마셔야죠. 음, 서점에 가도 좋을것 같아요.

금요일도, 주말도 모두 즐겁게 보내세요, 풀칠아비님.
:)

단발머리 2012-12-13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쪼~~ 위에 네꼬님 누구셔요? 완전 웃기시다. ㅋㅎㅎㅎ 다락방님, 나는 로그인 상태로 돌아다니다 다락방님 페이퍼 잘~ 읽고 가요. 재미있어요.ㅎㅎㅎ

다락방 2012-12-14 13:30   좋아요 0 | URL
네꼬님은 제가 알라딘에서 사귄 아주 좋은 친구에요. 희희희희희. 알라딘에서 제게 준 선물중에 으뜸이라고나 할까요. 흣.

단발머리님이 제 글을 재미있게 읽으신다면, 저야말로 고맙지 뭡니까! ㅎㅎ

moonnight 2012-12-13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방인이 될 수 있는 곳이 좋아요. ㅠ_ㅠ 자주 가던 술집도 사장님이 막 아는 척 하시면 발길을 끊게 되더라구요. 특히 카페는 (제 경우에는) 늘 혼자서 가는데 스토리가 있고 거기에 공감도 해야 한다면 부, 부담스러워요. ㅠ_ㅠ

다락방 2012-12-14 13:32   좋아요 0 | URL
저도 저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 있는 곳이 좋아요. 회사의 경우에도 뭔가 가족같은 분위기 이런건 참 곤란해요. 업무시간에 업무하고 퇴근후에는 회사를 잊을 수 있는게 가장 최상의 환경이 아닐까 싶어요.

이방인이 될 수 있는 곳이 저는 가장 안락하게 느껴져요. 가장 편하고요. 그곳에 있을 때는 아무도 제게 아는척을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어요.
 

소설을 읽다가 다른 소설을 알게 되고 만나게 되는 일은 종종 있지만, 나는 내가 이 책을 읽다가 소설가를 그리고 그의 소설을 궁금해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건 예상외의 일인데, 오, 그러고보니 이 책은 예상외의 것들을 내게 참 많이도 가져다 주는구나.













60년 전 존 스타인벡과 그의 친구였던 생물학자 에드 독 리켓은 이 조석 간에 존재하는 생물의 다양성에 매료되었다. 당시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집필을 막 끝내고 휴식이 필요했다. 그는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전쟁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최근 문학적으로 성공한 것이나 실패로 끝난 결혼에 대해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1939년 10월 16일 일기에 스타인벡은 이런 글을 남겼다. "지금 내게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던 《포도》를 탈고했다. 정부와 관련해 해야 하는 간단한 일이 하나 남았을 뿐이다. 그게 끝나면 나는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새로운 곳으로 가서 새로운 뿌리를 찾아야 한다. ‥‥‥그게 무엇이 될지 나도 모른다. 다만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조수웅덩이(해안의 조간대에서 간조시에 해수가 잔류하여 웅덩이에 괴어 있는 곳)와 현미경 슬라이드에서 찾아질 거라는 것만은 안다."

스타인벡은 세상에 변혁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꼈고, 과학이 해답을 줄 거라 믿었다. 그는 생물학자였던 친구 에드 독 리켓에게서 그 가능성을 엿보았다. 리켓은 세계를 조 더 가까이에서 연구하기 위해서라면 시카고에 있는 안정된 자리도 마다하고 미국 최남단으로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독학으로 해양생물학자가 된 사람이기도 했다. 이제는 유명해진 '통조림 공장 골목(스타인벡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에 생물학 용품점을 세우기도 했던 그는 생태적 지위나 서식환경, 먹이사슬, 포식자와 먹이 관계 같은 개념들이 아직 생소했던 그 당시부터 벌써 생명을 생태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중략)


1940년, 몬테레에베이에서 캘리포니아 만을 향해 출발하면서 스타인벡과 리켓은 멕시코의 무척추동물에 관한 역사상 가장 방대하고도 객관적인 연구를 시행하기로 계획한다. (pp.73-74)



나는 존 스타인벡의 소설을 한 권도 읽어보질 못했다. 다만 그가 분노의 포도 작가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사실 그 책에 대해 별 관심도 없었는데, 나는 이 책의 이 부분을 읽고 분노의 포도를 사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독학으로 해양생물학자가 된 사람' 이라니, 그런 사람이 작가라니. 그런 작가는 작품으로 무슨 말을 할까? 생물의 다양성에 매료되는 사람이며, 무척추동물에 관한 연구를 시행하기로 하는, 그런 사람이 작가라니. 나는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더불어, 그가 작품을 빌어 하려는 말이 궁금하다.
















이제 이 책(거인을 바라보다)을 거의 다 읽어가는데, 이 책은 여러가지로 내게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모르는 고래의 삶] 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 나는 고래의 삶에 대해 그 전보다 더 알게 되기는 했지만, 그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소득이라 보기엔 극히 미미하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 나름의 깊은 생각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알게됐고, 그들이 저마다 선택한 방식은 달랐으나 그 방향이 한 곳으로 향한다는 것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고래의 몸에 위성위치추적장치를 다는 사람도, 헬기를 타고 바다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도, 잠수를 해서 고래 곁으로 다가가 관찰하는 사람도 모두, 고래를 위해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비단 고래때문만이 아니라, 해양생태계, 더 나아가서는 이 지구를 위해서도.








아주 젊었을 때 찾아올 수도 있지만 어쩌면 스스로가 더이상 사랑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하며 사랑을 포기했을 때라도, 누구에게나 생에 한 번 잊지 못할 사랑은 찾아온다. 그 사랑은 일주일 낮과밤을 모두 발가벗고 함께 지내는 열정적 행위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가벼운 입맞춤 한 번만이 행위의 전부일 수도 있다. 앞으로 더 얼마를 살게 되든, 그리고 어떤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되든, 그 사랑은 잊지 못하는 법이다. 이 영화속에서 마릴린은 콜린에게 작별을 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날 잊지 말아요.


이 말을 듣는 즉시 나는 콜린의 대답을 정확히 예측했고, 내 예측은 틀림이 없었다. 콜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떻게 잊겠어요.



콜린은 마릴린을 이해하는 남자였고, 짧은 시간 마릴린의 옆에 있어주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마릴린을 향했고, 마릴린은 그런 그에게 아낌없는 신뢰를 주었다. 그들은 한 침대에 눕기도 했고, 발가벗고 물가로 풍덩 들어가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그 몸이 엉키는 것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이 사랑을 떠나보내는 그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몇 인치는 더 자란것 같군." 그래서 『스타킹 훔쳐보기』에서 엘리자베스 게이지도 주인공의 이름을 빌어 이렇게 얘기했는가 보다.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는 것보다 사랑을 잃는 쪽이 훨씬 낫다.


콜린은 한동안 아프겠지만, 그 기억으로 평생을 살 수도 있을것이다. 앞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하든 안하든, 그녀와 보냈던 그 짧은 시간은 내내 가슴 한켠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콜린이 지금의 아픔을 겪을 가치가 있다. 아, 이 영화가 정말 너무 괜찮아서, 만약 내가 올해 『우리도 사랑일까』를 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올해의 영화로 꼽게 됐을 것 같다. 올해 내게는 미쉘 윌리암스가 아주 새롭게 다가오는구나.





그나저나 『거인을 바라보다』를 다 읽으면 무슨책을 읽을까? 오늘 도착한 『목사의 딸들』을 읽을까, 쉽게 책장이 넘어갈 듯한 『착해도 망하지 않아』를 읽을까? 『늦여름』을 시작할까,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을 읽을까? 사두고 안 읽은 숱한 책들중 한 권을 골라 읽을 예정이긴 한데, 아, 어쩐지 아무래도, 오늘 장바구니 한 번 털고 그중에서 읽게 되는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아침부터 틈틈이 장바구니를 일단 다 비웠다가(너무 많이 넣어놔서), 다시 새롭게 구성했다가 다시 몇 개 삭제했다가 다시 또 다른 책 넣었다가 하고 있다. 내년까지 안지를라고 했는데, 하아, 모르겠다. 몸살기운이 있어 타이레놀을 한 알 먹었는데, 괜찮겠지?




토요일엔 드디어 커피소년 콘서트를 갔다왔다. 뜻밖의 위로를 받고왔는데, 그건 노래로 인한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하나도 안 불러줘서 공연 자체로는 그렇게 대만족 이런건 아니었는데, 그가 거기서 자신의 나이를 밝혔다. 자신이 의외로 나이가 많다며, 늦은 나이에 데뷔를 했다고 했다. 그렇게 공개한 그의 나이는 삼십대 초반이었고, 물론 나보다 어렸지만, 나는 그가 '이 나이에 데뷔한 자신이 좋다'고 말하는데에서 위로가 됐다. 그러니까, 나는 물론 그보다 나이가 많다고 해도, 뭔가 시작해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거다. 두려워하지 말고 시작하자고, 괜찮을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이 나이에 시작했음을 좋아하게 될거라고. 진실된 위로는 억지로 위로하는 데서 오는건 아닌것 같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진심을 말하는 순간, 상대에게는 그것이 행복으로 다가가기도 하고 기쁨으로 다가가기도 하는 것처럼, 위로로 다가가기도 하는거다. 나는 그 날, 커피소년의 그 말이 참으로 위로가 됐다. 그러나, 실제 눈 앞에서 본 그는, youtube 영상에서 본 것처럼 훈남은 아니었다.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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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2-10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영화쿠폰 안쓰시는 분은 저 좀 주세요.

2012-12-10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2-12-10 16:55   좋아요 0 | URL
땡큐 땡큐!!

2012-12-10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2-12-11 11:12   좋아요 0 | URL
역시나 땡큐 땡큐!! ㅎㅎ

2012-12-10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1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2-12-10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만큼은 다락방님 페이퍼가 미괄식이었군요. 책은 "미친 항해"를 읽으셔야죠. 그래야 합니다.

다락방 2012-12-11 11:13   좋아요 0 | URL
미친 항해를 읽어야 하는데 ㅎㅎㅎㅎㅎ 책은 내년에 살 거라 ( ")

커피소년이 글쎄, 제 생각만큼 훈남은 아니더라구요. 역시 옆모습과 앞모습은 좀 거리가 있어요. 쿨럭. --;;

dreamout 2012-12-11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에도 춥고 밤에도 추워요. 아우. @@

다락방 2012-12-11 11:14   좋아요 0 | URL
와, 드림아웃님. 저는 몇년만에 몸살에 걸려 앓아 누웠더랬습니다. 열이 펄펄 끓어서 눈 튀어나오는 줄 알았어요. 휴..

moonnight 2012-12-11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반가와요. 분노의 포도는 중학생 때 읽었다가 최근에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요. 내용이 새롭더군요. 쿨럭 ;; 1권 읽다가 접어놓고 레미제라블 읽습니다만은. ;; 독학으로 해양생물학자. 놀랍네요. (세상엔 역시 훌륭한 사람들이 많군요. -_-;;;;;)

브로크백마운틴 봤을 땐 미셸 윌리엄스가 예쁜 줄 몰랐는데 볼수록 매력적인 것 같아요. 저 영화는 못 봤지만 캐스팅만큼은 최고란 평을 읽었어요. 보고 싶네요. ^^ 그나저나, 내가 어떻게 잊겠어요. 라는 대사 맘을 파고들어요. 그 심정이 막 이해가 되네요. ㅠ_ㅠ
어제 라디오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에 대해 나왔어요. 콜드플레이의 음악도 함께. 문득 그 영화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더라구요. 조쉬 하트넷과 함께 시간을 보낼 기회가 있다면 정말, 내가 어떻게 잊겠어요. 라는 대사가 절로 나올 듯 ^^; 디비디나 사 봐야겠어요. (한숨;)

다락방 2012-12-12 08:36   좋아요 0 | URL
오, 문나잇님 역시 독서의 내공이 상당하시네요. 중학생때 분노의 포도라뇨! 저도 조만간 사둬야겠다(읽겠다가 아닌;;)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 역시 브로크백의 미쉘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아요. [블루 발렌타인] 보면서 저 여자를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봤더라 했는데 필모그라피를 보니 브로크백 마운틴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아, 그여자구나 했을 정도에요. 그런데 제가 올해 본 좋은 영화 두 편 모두에 미쉘 윌리암스가 나오네요. 아, 아니구나, 세 편이구나. [블루 발렌타인], [우리도 사랑일까],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 아 이 배우, 영화를 선택하는 눈이 있는걸까요?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는 보면서 참 씁쓸했던 기억이 있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역시 나를 사랑할 확률은 정말이지 높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일을 기적이라 부르는가봐요. 저는 평생 잊지 않게 제이슨 스태덤하고 함께 살고 싶어요. 오래오래 오래오래......( ")
 

내게는 한여름에 처음 만나 한여름에 헤어졌던 남자가 있다. 잠깐, 다른 남자들 중에도 여름에 처음 만났던 남자가 있었나 생각해볼랬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려니 귀찮고. 어쨌든 그 남자는 처음 만났던 그 뜨거운 여름에도 헤어지던 그 뜨거운 여름에도, 여름보다 더 뜨거운 기억을 내게 안겨줬다. 눈이 펑펑 내리고 손이 시려 자꾸 장갑을 찾게 되는 이런 날, 벌써부터 밖이 어둑어둑해지는 이 한겨울에, 나는 그 해 여름의 남자를 자꾸만 떠올린다. 떠올리다보니, 내가 사두고 아직 읽지 않은 이 책이 생각났다.
















2권은 아직 사두지 않았는데, 뜨거운 여름 뜨거운 기억 뜨거운 남자를 떠올리다보니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드는거다. 어서 읽어야지. 그리고 2권도 사야지. 이 책의 책장을 덮을때쯤엔 내 기억이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어갔으면 좋겠다. 겨울이 되면 곤란하다. 그러면 또 12월에 처음 만났던 남자 생각도 해야되고 막 그러니까.



퇴근하고 술마시러 갈거다. 쉴 새없이 떠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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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2-12-07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늦여름>. 다락방님, 혹시 제 생각 안 했어요? --;;
.
.
.
폭설 쏟아진 이 겨울날에 이 책을 꺼내셨네요. 그러고보니 저도 한겨울에 읽었네요. TGIF! 주말 잘 보내요.

다락방 2012-12-10 13:21   좋아요 0 | URL
당연히 생각했죠, 댈러웨이님. [늦여름] 하면 댈러웨이님이 생각나요. 그런데 못읽었네요. 하핫. 주말동안에는 책과 멀어져 있었어요. 읽고싶은 욕망이 언제나 실현되진 않아요. 아니, 대부분 실현이 안되고 ... 하아.

전 순대국 특사이즈를 점심으로 먹고왔어요. 뭔가 살 것같은 기분입니다. 아, 늦여름 읽고싶어요! 언제 읽게 될까요. 흑흑.

차좋아 2012-12-08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밤의 음주와 수다. 그 피로에 조금 더 이불에 들어있을 다락방님. ㅋㅋ 오늘 해가 완전 밝아요. 뭐... 그 싫어하는 눈을 밟고 일어서야 따뜻한 볕을 얼굴 한가득 담을 수 있습니다만 ㅋ

다락방 2012-12-10 13:22   좋아요 0 | URL
주말에 하도 무리를 해서 지금 몸살기가 있네요. 그래서 뜨거운 커피를 들이켜고 있어요.
토요일 저녁엔 몹시 춥더만요. 콘서트 갔다왔는데 추웠어요. 흑흑. 전 주말내내 조카랑 놀았습니다. 조카가 제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으려하지 뭡니까! ㅎㅎ

moonnight 2012-12-08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금요일밤의 술 한 잔. 되셨어요? ^^
요즘 직장에 문제가 있어서 (동료 중 한 명의 문제) 점심 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워요. -_ㅠ 그 한 명이 뭐 씹은 얼굴로 앉아있으니 다른 구성원들도 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_-;;;;; 그 압박감을 이겨내고자 저혼자 막 떠들고 있다는. 방금도 점심 먹고 들어왔는데 또 저 혼자 미친듯이 떠들었어요. 후유증으로 지금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 ㅠ_ㅠ
쉴 새 없이 떠들어야지. 하는 다락방님은 참 즐거워보이는데 말이죠. 문득 부럽단 생각이 들어서 말이 길어졌네요. ^^;

오늘 저녁엔 대학 선후배들과 송년회가 있어요. 술이나 왕창 마셔야겠어요. 히히. 즐거운 주말 보내셔요. ^^

다락방 2012-12-10 13:24   좋아요 0 | URL
시끌벅적하고 안주가 가득한 금요일 밤이었습니다. 물론 한 잔으로 끝나지도 않았구요. 쿨럭.

아, 직장내에서 한 명이 분위기 안좋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치잖아요. 전 그런게 참 싫더라구요. 그렇다고 너 인상 구기고 있으면 우리도 불편하니 그러지 말아라, 고 말하는 것도 폭력적이고. 그나마 저는 제 기분 나쁘다고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말자, 그냥 혼자 가지고 가자, 하는 스타일이긴 한데, 어쩌면 저는 이래저래 무심한것 같기도 해요. 흐음.

토요일엔 술 왕창 드셨어요, 문나잇님? 때로는 술이 있어서 정말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 즐거운 한 주 보내도록 합시다, 문나잇님!
 

이 책은 여러분을 고래들의 낯선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이 책에는 수학적 재능을 활용해 향유골(Physeter macrocephalus)의 문화를 연구하는 댈루지 대학교 생물학과의 할 화이트헤드 교수나, 자신의 1958년산 세스나 경비행기에 멕시코 연구자들을 태우고 멸종위기에 놓인 캘리포니아 만의 흰긴수염고래를 찾는 일을 돕는 환경 비행사 샌디 래넘과 같은, 오늘날 고래 연구 및 해양생태학의 거장 약 25인의 목소리가 빼곡하게 들어 있다. (머리말, p.9)















출근하는 동안의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고작 40여페이지쯤을 읽어서 이 책이 재미있다 흥미롭다 말하긴 이르지만, 확실히 내가 우울해지긴 했다. 그래서 계속 읽을지를 고민하기 위해 책을 덮었다, 라기 보다는 강남역에 도착해서 책을 덮은거고.


이 책의 저자는 해양생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 작가 라고 한다. 저자는 고래를 관찰하기 위해 자신의 두 딸을 데리고 고래 관광선을 탄다. 그리고 고래에 대해 연구하는 수많은 전문가들을 만난다. 그녀가 만난 전문가들은 고래의 생태를 연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들을 멸종의 위기로부터 구해내고자 한다.


그래서 우울해졌다. 고래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 세상의 누군가는 고래를 연구하고 멸종위기로부터 구해내려고 한다니, 나는 여기서 뭐하고 사나 싶었던거다. 물론 내가 반드시 그들처럼 이 지구상의 어떤 생물들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건 아니다. 다만, 누군가는 대단히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뭐하나 싶었던거다. 의미는 꼭 고래를 살리는 것에만 있지는 않다. 누군가는 커피가 필요한 사람에게 커피를 건네면서 보람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환자를 치료하면서 의미를 가질것이고, 누군가는 요리를 하면서 의미를 가질것이다. 누구나 어떤식으로는 다른이의 삶에 혹은 이 사회에 작은 보탬이 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텐데, 나만, 내가 하는 일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거다. 내가 하는 일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일인가. 이 일로 나는 소주를 사 마시고 고기를 사 먹고 책을 사 읽지만, 그런데 내가 이렇게 먹고 사는 일 말고 대체 이 사회에 나는 어떤 쓸모가 있는가. 나는 내가 여기서 일함으로 인해서 이 회사에, 이 지역 사회에, 혹은 타인에게 어떤 긍정적인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니 의미없는 삶을 사는걸로 여겨지는거다.




이건 위의 책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영화 『26년』을 보면서도 든 생각이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아픔을 누군가는 몸소 겪었고 누군가는 그 영향을 받았다. 세상에 알려야 할 일에 대해 누군가는 그걸 만화로 그리고 누군가는 그걸 영화로 만들어냈다. 나는 관람석에 앉아 그 영화를 보고 초반부터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자꾸만 영화속의 등장인물들 앞에 부끄러워졌다. 내가 그들과 같은 일을 결코 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소심하니 앞에 나서서 어떤 일을 진행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작게는 어떻게든 무언가는 했어야 했던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거다. 각자의 자리에서 아프고 힘들고, 그래서 외면하기도 하고 정당화해보기도 했던 사람들을 화면으로 보노라니, 나는 뭐하고 사나, 싶은거다. 내가 반드시 그자리에서 혹은 그 일에 대해서 뭔가 해야한다고 생각한다기 보다는, 내 삶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계속 시간을 살고 있나, 하는 생각.



나는 왜 사는걸까? 무엇 때문에 사는걸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울적하네. 금요일인데. 역시 이 일이 아닌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하는걸까. 그러면 나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강남역에서 내려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왔더니 눈발이 흩날리더라. 아우. 나는 반곱슬이라 젖으면 앞머리 스타일 완전 망가지는데. 가방에 있던 신문을 꺼내어 앞머리를 가려가며 사무실까지 걸어왔다. 그 사이에 눈발은 더 굵어졌다. 하아- 나는 정말이지 눈이 싫어....



그런데 저 책의 저자인 '엘린 켈지'는 전혀 짐작조차 못했겠지. 대한민국의 한 독자가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직업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를 품게 되리라는 것을. 그런 일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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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12-12-07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어제는 이상한 날이었던 모양이어요. 저도..제가 왜 사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더랬어요. 저는 이냥저냥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이건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건, 어떤 사람과의 인터뷰 기사때문이기도 하고, 정혜윤피디가 한겨레훅에 쓴 칼럼때문이기도 하고,날씨 때문이기도 하고, 또...하여튼, 다락방님, 저야말로 변화와 혁신이 필요한 사람이에요.

다락방 2012-12-07 11:58   좋아요 0 | URL
변화와 혁신..이 제게도 필요한걸까요? 전 그냥 때려치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그렇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까 역시 다른 일을 하긴 해야겠고...하아. 저도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데 문득,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더라고요. 이렇게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도 되나,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우울한 순간이 지나가고나면 또 여느때처럼 잘 지내게 되겠죠?

다크아이즈 2012-12-07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쓸데 없는(있는?) 자책하시는군요.
저는 님의 직업을 몰라 그것이 사회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는 생각해본 적 없지만,
알라딘 식구들에게 님이 어떤 의미인지는 확실히 새기고 있거든요. 이보다 더한 다락방의 존재 이유가 있을까요?

문학 관련 어떤 행사에서 고래 유람선을 탄 적 있어요. 첫 출항은 성공이었는데, 저는 두번 째 타임 배를 탔는데,
날씨 때문에 한 시간 이상 배에 갇혀 있다 포기해야만 했어요. 몹시 아쉬웠지요. 운 좋으면 동해에서는 고래떼를 만날 수 있답니다.

26년을 따끈한 만화로도 읽고, 영화로도 봤는데 전 영화가 더 좋았어요.
모든 원작은 각색류를 앞서지만, 제가 만화를 잘 몰라 그런지 영화에 더 몰입이 되더군요.
하지만 님처럼 이런 심오한 생각은 못했지요. 알흠다운 다락방님... 저 첫눈 기다리고 있어요.

다락방 2012-12-07 11:55   좋아요 0 | URL
꼭 사회에 의미를 준다기보다는, 제가 이 일에서 보람을 찾으면 될터인데, 아직까지는 보람이 찾아지질 않네요. 십년차;; 면서도 말이지요. 출근하고 근무하다 퇴근하고..그냥 지긋지긋해요. 뭔가 대단한 변화를 원하는건 아닌데, 그냥 요즘엔 이건 아니지 않나 싶어요. 뾰족한 대안도 없으면서 말이지요.

지난번에 [걸어서 세계속으로] 뉴질랜드 편을 보는데, 거기에서는 고래를 볼 확률이 엄청 높대요. 고래를 못 보게 되면 환불해준다고 할 만큼 말이지요. 고래는 한 시간에 한 번씩은 물 밖으로 나와서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볼 수 있다는거죠. 그때 고래 관람선을 타고 결국 바다 위로 떠오르는 고래를 보는 그들을 보는데, 와, 제 가슴이 다 벅차더라구요. 저런 경험은 생에 몇 번쯤 하게 될까, 하면서 말이지요.

여긴 아침부터 내리던 눈이 이제 그쳐가요, 팜므느와르님. 저는 출퇴근 때문에 눈이 싫어요. 흑흑. ㅠㅠ

야클 2012-12-07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의 저자인 '엘린 켈지'는 전혀 짐작조차 못했겠죠? 대한민국의 한 여성독자가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직업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를 품으며 아침부터 (회사에서 일 안하고) 페이퍼를 쓰고, 어떤 남자는 오후 미팅 준비는 하지도 않고 커피나 마시며 그 페이퍼를 재미있게 읽을거란 것을. 그런 일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겠죠? ^^


다락방 2012-12-07 11:5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빵터졌네. 근데 이 댓글 좋으네요? ㅋㅋㅋㅋㅋㅋ 아, 그런데 울 회사 사람들이 이거 보면 안될텐데. 회사에서 일 안하고 페이퍼나 쓰고 있고 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단 점심시간이니 점심 많이 드시고 야클님, 오후 미팅 준비 하세욧!!!!!

moonnight 2012-12-08 14:06   좋아요 0 | URL
야클님 짱. ^^

테레사 2012-12-07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그러게요...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또 똑같아질까 두려워요. 쿵푸팬더가 그랬다던데...이런 나를 견딜수가 없었어요...라고....제가 딱 그래요..하지만, 지금일을 그만두는 건 신중하여야 하죠. 먹고 사는 건, 정말이지 중요하니까요...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오늘 아침 어떤 선배가 메시지를 보냈어요...아,,,그렇구나..존엄성을 지키기가 힘든 세상이구나..그래 나도 그렇게 목표를 정하자고..헌데 좀전 또 나쁜 버릇을 저지르고 말았어요...ㅠㅠ

다락방 2012-12-07 17:29   좋아요 0 | URL
테레사님, 계속 이럴것 같아요. 뭘하든 한순간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고 또 대부분의 시간에는 잊고 살다가, 그런 생활이 반복되지 않을까요? 저는 제 스스로 먹고 살아갈 능력이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써, 아마 계속 일은 해야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꿋꿋이 버텨나가는 것 밖에 도리가 없는건가 싶어요. 그래도 이렇게 의미가 없지 않나 이 일은, 하는 생각이 찾아올 때마다 다른데를 기웃기웃 거려볼 참이에요. 엊그제는 우체국에 가서 직원이 되려면 어떡해야하냐고 묻기도 했어요. 하핫;;

Mephistopheles 2012-12-07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세퍼드"호에 한국인 최초 승무원이 될지도 몰라요. 다락방님은.

다락방 2012-12-07 17:34   좋아요 0 | URL
씨세퍼드 호가 무언지 몰라 검색해봤어요. 일본 포경선 공격하는 과격 환경단체네요. '과격'에서 저랑 좆ㅁ 잘 맞는것 같아요. ㅋㅋㅋㅋㅋ 일본 포경선에 올라가서 막 공격한다능 ㅋㅋㅋㅋㅋ

초록비 2012-12-07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저도 <26년> 보면서 똑같은 느낌이었어요. 뭐라도 했어야 하지 않나. 다락방님이 이렇게 콕 집어서 써 주시니 정말 마음에 와닿네요 ㅠ.ㅠ

다락방 2012-12-07 17:36   좋아요 0 | URL
초록비님, 처음 시작부터 막 울었어요. 저는 어째 늙으면서 눈물이 더 많아지는건가 싶기도 하고. 에잇. 굉장히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느껴져서 우울했어요.

이진 2012-12-07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의 고래가 정말 매끈한 자태를 뽐내고 있어서 흥미로워 보이는데, 음 그렇군요.
왜 하필 금요일에 그럼 고민을 시작하신 겝니까 ㅠㅠ 금요일은 즐기라고 있는 날이 아닌가요. 흑흑.
저같이 월요일에 시작하여 목요일 저녁에 끝내고 금요일부터는 푹푹 놀아야 할텐데 말이어요... ㅠㅠ

다락방 2012-12-07 17:37   좋아요 0 | URL
끝까지 읽어볼 참입니다. 이건 책의 잘못이 아니라 제 찌질함이 튀어나온 거니까, 뭐. ㅠㅠ

저도 이제 퇴근후에는 폭풍음주 하러갑니다.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려요. ㅋㅋㅋㅋㅋ금요일 아침은 우울하였으나 금요일밤은 즐거우리라~ ㅎㅎㅎㅎㅎ

이진 2012-12-07 17:48   좋아요 0 | URL
와우 폭풍음주!! 부디 몸 챙겨가며 폭풍 노십시오 ㅎㅎㅎ
글은 계속 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moonnight 2012-12-0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그런 고민을 하게 되는데요. 요즘은 조카아이들을 만나고 사랑하는 데서 의미를 찾고 있어요. 우리 다락방님은 또다른 큰 일을 하고 계시잖아요. 알라디너들에게 즐거움을 주시는 글들요. 다른 누군가로 대체불가능하다구욧!!! ^^

다락방 2012-12-10 13:25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문나잇님. 문나잇님은 언제나 제게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저는 무척 힘이 납니다. 문나잇님이 안계셨으면 저는 지금보다 조금 더 외로워졌을 거에요. 그러니 조카아이를 만나고 사랑하는 데서 의미를 찾으시고, 또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친구가 되고 있다는 것에서도 의미를 찾으셔도 될 것 같아요, 문나잇님.
:)

2012-12-10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1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지막 숨결 - 개정판
로맹 가리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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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앞의 단편, 그 단 한 편만 읽었을 뿐인데 하루종일 생각나네. 로맹 가리는 진짜 최고다. 계속 생각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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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2-12-05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난 왜 이 책을 몰랐죠? 읽어봐야지!

다락방 2012-12-05 13:38   좋아요 0 | URL
로맹 가리는 천재에요, 치니님. 흑흑. 단편집인줄 모르고 샀는데 단편 하나읽고 완전 쑝갔다능. ㅠㅠ

차좋아 2012-12-05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저런 절대 사십자평을 남기시면 사는 수 밖에요 ㅎㅎ

다락방 2012-12-05 16:59   좋아요 0 | URL
전 로맹 가리를 사랑합니다, 차좋아님. ㅠㅠ

무해한모리군 2012-12-05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찜.

다락방 2012-12-05 16:59   좋아요 0 | URL
그러나 저 계속 생각나는 것이 '아름답기' 때문은 아니에요. 너무 서늘해서에요, 휘모리님.

깐따삐야 2012-12-05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 종일 생각난다구요? 그래도 절대 사지 않을 거에요.ㅠ.ㅠ

다락방 2012-12-05 17:00   좋아요 0 | URL
가슴에 눈이 와요, 깐따삐야님. 그 단편 소설 말예요, 그걸 읽으면 그래요.

heima 2012-12-05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에 눈이 온다니요 다락방님~!!! 안 읽을 수가 없겠는걸요?

다락방 2012-12-06 08:46   좋아요 0 | URL
두번째 단편도 좋으네요. 어흑.

moonnight 2012-12-06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큰일났다. 보관함으로 클릭. 다락방님은 뽐뿌쟁이 ^^;

다락방 2012-12-06 16:49   좋아요 0 | URL
첫번째 단편을 빨리 문나잇님이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