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면
영화 『더티 댄싱』에서 댄서인 '쟈니'는 부잣집에서 넘치는 교양으로 무장한 '프란시스' 에게 춤을 가르쳐주면서 공간의 중요성을 말한다.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기는 내 공간, 여기는 니 공간. 그때 흐르는 노래는 「Hungry eyes」다. 당시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에는 제목의 한글번역까지 되어 있었는데, hungry eyes 의 제목은 '갈망하는 눈동자'였다. 그 번역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만약 나였다면 결코 갈망하는 눈동자로 번역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의역에 의역을 거듭해도 '굶주린 눈동자'라고 했을 것 같다.
공간을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 는 규칙은 춤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서도 무엇보다 중요하게 지켜져야 한다. 물론 각자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친구' 라거나 '연인'이라거나 하는 관계의 성립에서 적당한 거리를 지키고 공간을 내어주는 것은 무엇보다 신경써야 할 부분이다. 어떤 사람들은 연인 사이에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친한 친구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에는 친구든 연인이든 내가 만들어놓은 공간을 침범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좋다.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은 물론 이해한다. 나 역시 그렇다. 나도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소 멀게 느껴지는 거리를 좁히고 싶은 마음이 크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거리는 좀 멀어, 이 공간은 좀 넓어, 난 이걸 좀 좁히고 싶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조금 더 다가가려고 해보고 조금 더 친근하게 굴려고 해보지만 그럴때마다 자꾸 돌이켜보게 된다. 혹시 상대는 원하지 않았는데 내가 이걸 부수려고 했던건가? 그렇다면 오히려 나를 밀어내고 싶지 않을까?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만큼이 적당한 거리인지 모르겠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만큼이 그가 만들어 둔 그만의 공간인지를 모르겠다. 그 거리를 모르겠는건, 내가 그 사람에게 가고 싶은 욕망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그래서 내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보고 싶지 않은걸지도 모른다. 알고 싶지 않은걸지도 모른다. 나는 내 공간을 지켜주려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들이야말로 나를 진정 아낀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러니 아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렇겠지. 공간을 준다는 것, 그 공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듯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아름다웠다.
그녀가 마침내 말했어요. "나는 내 또래에서 당신처럼 예의 바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나는 그리 기쁘지 않은 어조로 말했어요. "예의 바르다고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어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에요. 지루한 예의 바름 말고요. 정중한 예의 바름 말이죠. 당신은 사람들에게 공간을 줘요. 나는 정말로 그게 좋아요. 흔하지 않은 일이에요." (p.26)
나는 거리를 지키고 싶고 나는 공간을 갖고 싶은데, 무작정 그걸 파고 들어오려는 사람에 대해서 나는 결코 가까운 거리를 허용할 수가 없다. 오히려 멀어진다. 상대로부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신경이 곤두선다. 상대로부터 '예의 바르다'는 말을 듣는것, '공간을 준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 아, 그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름답다. 존중이 느껴진다. 그러니 이 책속의 여자도 그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정말로 그게 좋아요, 라고 말할 정도로. 그래, 상대의 공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 상대에게 공간을 준다는 것, 그건 흔하지 않은 일이다.
이 문장이 너무 좋아서 이 문장을 나처럼 좋아할 것 같은 친구에게 찍어 보냈다. 친구는 예상대로 무척 좋아하면서 이 문장의 원서가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더니 잠시동안의 시간이 흐른후, 능력있는 내 친구는 이런 메세지를 보내왔다. 자, 다같이 새해를 맞이하여 영어 공부 한 번 해보자.
"I don't think," she said finally, "I've ever met someone our age as polite as you." "Polite?" I said, less than radiant with joy. She smiled. "I don't mean it that way," she said. "Not boring polite. Respectful polite. You give people their space. I really like that. It's unusual."
오늘의 문장 혹은 올해의 문장쯤이 되지 않을까.
물론,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의 거리를 좁히고 싶은 마음은 있다. 나는 그에게 공간을 주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으니 그가 이 노력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는 마음도 있다.
그녀는 다 웃고 나더니, 내 손에 자기 손을 얹고 말했어요.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돌아와서 좋아요."
나는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내 손가락을 밀어 넣고 싶었지만 가만히 있었어요.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접촉이 끊겨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p.74)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 손가락 사이로 내 손가락을 밀어 넣고 싶은 마음이 대체 왜 들지 않겠는가. 그런데 가만히 있었다니, 그는 정말이지 정중하게 예의바르다. 그래, 여자는 아직 자신의 공간이 필요하고 아직 잊지 못하는 연인이 있다. 그런 여자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가는 지금 유지되고 있는 관계가 바스라질지도 모른다. 남자는 여자를 좋아한다. 그는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돌아와서 좋아요, 라는 말을 하게 되는 날이 내게 온다면, 그런데 상대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는다면, 그러나 나는, 가만히 있진 않을테다. 그 손가락 사이로 내 손가락을 밀어 넣을거다. 공간을 줄테니 손가락만큼은, 그 순간만큼은, 받아주어도 좋지 않을까.
친구를 만나서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기전에 우리는 따뜻한 정종을 마시러 갈까 와인을 마시러 갈까 어떤걸로 정할까 고민했었는데, 영화에서는 스테이크 먹는 장면이 자꾸 나왔다. 모두가 울었다는 그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데 나는 친구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스테이크를 먹으러 가서 와인을 마시자고. 친구도 그러자고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이 복잡했다. 여자가 아팠다. 부부는 함께 오래 살았다. 거동이 불편한 여자의 간병을 남편이 해준다. 내가 불편할 때 병간호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렇다면 사람은 결국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하는걸까. 그러나 여자는 남편에게 그리고 자식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다. 침대에 소변을 보는 자신이 창피해 숨어버리고만 싶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제 명확한 단어가 되어 나오질 않아 상대가 알아듣지도 못한다. 여자는 물 마시는 것조차 거부하고 죽어버리고만 싶다. 그나마 말을 할 수 있을 때 그녀가 계속 내뱉던 말은 '너무 길어, 너무 길어' 였다. 인생이 너무 길다는 말. 그런 그녀를 보니 그녀의 마음이 짐작이 되었다. 어쩌면 혼자가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 모습, 나였어도 보이기 싫었을테니. 아무리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함께 살았던 사람이지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결코 편하지 않을테니.
아내의 미안함을 아는 남편은 말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고, 당신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았겠냐고. 그러나 아내는 말한다. 물론 많이 생각해봤다.
그러나 생각과 현실은 달라요.
그래, 생각과 현실은 같지 않다. 내가 아팠다면 너도 이렇게 했을거야, 와 정말 아파서 병간호를 받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같을까. 우리가 이해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존재하지 않을까.
침대에 누워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는 엄마를 딸이 찾아온다. 딸은 엄마의 모습을 보고 운다. 나는 그런 딸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엄마 생각이 났다. 그리고 앞으로의 내 생각도 났다. 우리 엄마가 저렇게 아프면 어떡하지, 내가 그걸 어떻게 감당하지.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그러면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살지. 내가 늙으면 어떡하지. 내가 늙어서 저렇게 거동조차 불편해지면, 그러면 그때는 어떡하지. 생각하니 답이 나오질 않고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다보니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고기와 술을 마시고 배가 터질것 같았던 친구와 나는 종로 알라딘 중고샵으로 갔다. 친구는 갈 때마다 눈에 띄는 책을 찾지 못했다고 했는데, 나는 책장앞을 서성이면서 친구에게 이 책 읽으라며 자꾸만 책을 숑숑 빼주었다. 친구의 팔은 점점 책으로 가득찼다. 그리고 나 역시 책을 막 빼들었다. 고르다보니 일곱권이었는데 계산 직전 두 권을 빼놓았다. 이걸 들고 집에 가자니 지독하게 무거울 것 같아서. 결국 나는 다섯권을 손에 들고 중고샵을 나왔다.
마태우스님의 리뷰를 보고 『악의 교전』을 장바구니에 담아두었었는데 똭- 눈에 띄는게 아닌가! 그래서 냉큼 빼들었는데 유감스럽게도 1권은 재고가 없었다. ㅠㅠ 1권 없으니 2권도 사지말까 하다가, 아니야 어차피 살 책이니 2권이라도 일단 사놔, 하고 들고왔다. 『그토록 먼 여행』은 장바구니에 너무 오래 들어있었다. 항상 넣었다가 뺐다가를 했었는데, 책과 나도 만날 때가 있는건가보다. 지금은 그 때가 되었고.
오늘 외출하는 길에는 박정현의 노래를 들었다.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다. 아, 이노래가 이렇게 좋았던가!! 그러고보면 노래와 나도 만날 때가 따로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책을 좀 읽다 자고 싶은데 졸리네. 이를 어쩐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