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ia(심규선) - 꽃그늘 EP - 2곡의 보너스트랙(CD Only) + 스페셜 패키지
심규선 (Lucia) 노래 / 파스텔뮤직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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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의 이번 앨범에는 무려 [서문] 이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나는 당신을 마치

4월의 상아빛 봄처럼 기억하고 있습니다.

 

 

낮술 한 잔 하고 싶어지는 서문이 아닌가.

 

심규선의 앨범이 나오자 그렇게 팔짝 뛰며 좋아했는데 처음 앨범의 노래들을 듣고서는 어어, 예전처럼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잖아?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고 나자 자꾸 심규선의 노래들이 생각나는거다. 그래서 다시 듣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아뿔싸, 심규선 노래의 가사들은 이제 마치 그녀 앨범의 서문처럼, 그렇게, 가슴에 날아들어 콕콕 새겨진다. 햇빛이 유독 좋은 날, 손으로 이마 위에 그늘을 만들어도 눈이 부신것처럼, 외면하려해도,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노래들을 그녀가 불러주고 있어서, 제기랄, 같이 흐느끼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그녀의 노래중에 4번트랙 「5월의 당신은」을 볼까. 거기엔 이런 가사가 있다.

 

 

그대가 웃는 웃음소리

걸음걸이와 너의 모든 것이

나를 가만히 두질 않아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요

 

 

하아- 이런 가사들을 대체 이 뜨거운 봄날에-대체 왜 봄날이 뜨거운걸까?- 어떻게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단 말인가. 자꾸만 기억속으로, 추억속으로 빠져들게 하지 않는가말이다. 나는 감상에 쩌는 리뷰를 쓰고 싶지 않았는데, 감정이 절절절절 묻어나게 글을 쓰고 싶지 않았는데, 심규선을 듣는 요즘의 나는 누가 툭, 치기만 해도 감성을 줄줄 뿜어낼 것만 같다. 그리고, 떠올리고야 말았다.

 

 

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를,음식을 반드시 다 삼키고 말해야 하는 그의 습관을, 불쑥불쑥 내 몸에 닿던 손을, 가끔은 아이같고 가끔은 오빠같았던 말투를,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잠시동안 내 손을 꽉 쥐던 그 순간을, 차마 묻지도 못했던 질문에 먼저 대답해주던 그 순간순간들을, 나를 향해 뛰어오던 그 모습을, 책을 읽다 고개를 들었을 때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그 시선을, 그의 모든 것과 그 모든 순간들이 얼마나 나를 쥐고 흔들었는지를. 당신은 나를 가만히 두질 않았지.

그러나 우리는 왜그렇게 가까워지는게 힘들었을까. 심규선은 5번트랙 「담담하게」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그대 맘에 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대가 말한 온갖 작품을

가슴 속에 새기고 듣고 보고 외워도

우리의 거린 좀처럼 좁혀지질 않네요

 

 

나는 자꾸 우리 사이에 거리를 느꼈고, 같이 걸을 때 역시 선명히 떨어져 있던 두 어깨를 기억한다. 그 때 내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도. 오, 심규선은 나를 정녕 무너뜨리려고 작정했단 말인가. 게다가 이 절절한 가사들을 어찌나 잘 불러내는지. 나는 이 봄, 금세 사라질 봄, 여름같은 봄에 심규선에 푹 빠져서 헤어나올 줄을 모른다.

 

 

반복해 듣다보니 좋아서 별 넷을 줘야겠구나, 했는데, 오, 이 앨범의 모든 곡을 심규선이 작사 작곡했다는 걸 안 순간 나는 그녀에게 거의 존경심이 생기며 별 다섯을 기꺼이 받아 마땅하다 생각하게 되버리고 말았다. 노래도 잘 부르고 작사 작곡까지 하다니, 무엇보다 저런 가사들을 그녀가 써낸거라니!!! 버틸래야 버틸수가 없어, 나는 오늘 그녀의 콘서트를 예매하고 말았다. 규선씨, 내가 갈게. 당신은 예술가야!

 

 

 

 

 

 

 

 

 

 

 

 

 

 

 

 

 

처음 시디를 받았을 때는 당혹스러웠다. 알라딘 노트보다 약간 더 큰 사이즈. 시디장에 어떻게 꽂으라고 저런 케이스야...난 이런거 싫어. 시디 케이스가 그 안에 담겨있다면 가사집인 이 노트를 빼버리고 시디케이스만 진열할텐데, 아뿔싸, 시디는 저렇게 뒷 표지에 꽂혀있다. 힁. 어떻게 보관하라고. 그러나 이 불만도 잠시, 시디케이스(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겸 노트를 한 장씩 펼쳐보노라니, 오, 이건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기 위해 탄생한 앨범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목차가 나오고,

 

 

 

 

 

 

 

 

 

 

 

 

 

 

 

 

 

 

이렇게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 꽃 그림이 나오기도 하고

 

 

 

 

 

 

 

 

 

 

 

 

 

 

 

한 귀퉁이에 가사가 적혀있기도 하고, 나나나나~ 하는 게 흩어져 있기도 해서

 

 

 

 

 

 

 

 

 

 

 

 

 

 

 

 

 

어디를 봐도 빈 공간이 많아서 내가 무언가를 적을 수도 있겠는거다. 심규선 노래의 가사들을 다시 한 번 써봐도 좋을테고, 전혀 다른 글들을 내 마음대로 적어도 좋을테고. 물론, 아무것도 적지 않아도 한 권의 시집 같기도 할테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말이다.

 

 

 

툭, 개화開花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노래의 가사와 제목은 이렇게.

 

 

 

 

 

 

 

 

 

 

 

 

 

 

 

 

 

 

 

앨범의 노래들이 노래 자체만으로도 만족스럽지만, 이 앨범은 만족할만한 선물이 될 수도 있을것 같다. 이 앨범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도 좋을것이고-그대가 웃는 웃음소리 걸음걸이와 너의 모든 것이 나를 가만히 두질 않아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요(5월의 당신은 中)-, 이별 선물(그런게 있다면!)-수 많은 약속들이 하나 둘씩 햇빛에 산산이 부서져 벚꽃잎처럼 허공에 멍들고 시선 가 닿는 곳마다 터뜨려지는 저 눈부신 봄망울 입술 깨물고 길 걷게 만드는 형벌 같은 이 봄(그런 계절中)- 로도 적절할 것이다. 이별 선물이라니, 써놓고 나니 꽤 근사하네.

 

 

봄은 항상 노랑빛이거나 파랑빛, 연두빛이거나 분홍빛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봄은, 붉은빛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붉은빛일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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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5-13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여태껏 심규선을 남자로 생각했을까요? @@

다락방 2013-05-14 08:50   좋아요 0 | URL
음, 아마도 이름때문에? ㅎㅎ
드림아웃님 아직도 심규선을 안들어보신겁니까, 네?!

주말에는 어디에서 무슨책을 읽으셨어요?

dreamout 2013-05-15 22:29   좋아요 0 | URL
특성 없는 남자를 간간이 읽고 있어요.
주말 없이 회사를 나가고 있어요. 모레가 연휴 시작인데 또 회사 나갈 생각하니 화창한 날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ㅎㅎ

다락방 2013-05-16 08:11   좋아요 0 | URL
앗 저도 특성 없는 남자 읽다가 멈춘 상태에요. 아주 조금요. 하핫;;

그런데 주말마다 회사 나가시면서 대체 어떻게 지내고 계신거에요? ㅠㅠ

2013-05-14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14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거인을 바라보다 - 우리가 모르는 고래의 삶
엘린 켈지 지음, 황근하 옮김 / 양철북 / 2011년 4월
절판


그렇다면 북방 혹고래의 고환은 무게가 얼마나 나갈까? 자,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 북방 혹고래의 양쪽 고환의 총 무게는‥‥‥1톤이다. 그렇다, 자그마치 1톤! 유머 칼럼니스트 데이브 베리가 말했듯, 이건 우리 책임이 아니다. -257쪽

북방 혹고래는 몸 크기에 비해 뇌 크기가 고래 종들 가운데 가장 작으며, 고환의 크기는 동물의 왕국을 통틀어 가장 크다. 뉴펀들랜드 메모리얼 대학교의 해양포유류 학자 존 리언의 유명한 말도 있듯, "만일 북방 혹고래가 뭔가를 생각한다면, 그게 무슨 생각인지는 자명하다."-258-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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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2013-05-09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 고래는요...?

다락방 2013-05-09 09:24   좋아요 0 | URL
북방 혹고래..의 알맞는 짝이겠죠? ( ")

단발머리 2013-05-09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ㅋㅎㅎㅎ.... 북방 혹고래는 뭘 생각했을까, 막 궁금하네요. ㅋㅎ

다락방 2013-05-09 11:03   좋아요 0 | URL
아마도, 음, 그러니까, 지금 제가 생각하는....그거, 아닐까요?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페피타 히메네스 대산세계문학총서 60
후안 발레라 지음, 박종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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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로서는 훌륭한 작품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내가 읽기에 이 책은 지.나.치.게. 착하다. `너무` 해피엔딩이라 초반의 흥미-성직자가 사랑에 빠진다구!!-를 뚝, 반감시켜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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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3-04-25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직자가 사랑에 빠져서 어떻게 됐는데요?

2013-04-25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작나무 2013-04-25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직자는 종종 사랑에 빠집니다. 사람이기 때문이죠.

다락방 2013-04-25 19:28   좋아요 0 | URL
성직자 뿐만 아니라 누구도 사랑에 빠지죠.

Mephistopheles 2013-04-2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시나무 새 처럼 그 사랑이 평생 가는 건 아닌가 보네요.

다락방 2013-04-25 19:28   좋아요 0 | URL
아뇨, 그 사랑은 평생 가는데, 그냥 다들 너무 행복하고 잘 되서 말이지요. 킁킁.

자작나무 2013-04-26 08:55   좋아요 0 | URL
평생 가는 사랑과 다들 너무 행복하고 잘 되는 것은 누구나의 소망인데. 킁킁.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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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평야


군장(軍裝)을 메고 금학산을 넘다보면 평야를 걷고 싶고

평야를 걷다보면 잠시 앉아 쉬고 싶고 앉아 쉬다보면 드러

눕고 싶었다 철모를 베고 풀밭에 누우면 밤하늘이 반겼다

그제야 우리 어머니 잘하는 짠지 무 같은 별들이, 울먹울먹

오열종대로 콱 쏟아져내렸다



오열종대로 쏟아지는 별들을 보는 사람이, 별들을 짠지 무같다고 느끼는 사람이 군대 생활을 하는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더 힘들진 않을까. 속안에 자라나는 그 많은 감정들을 어떻게 눌러가며 조직생활에 충실할 수 있을까. 매순간 가슴속의 무언가가 끓어오르진 않을까. 그렇다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을, 그렇다는 이유로 특별하게 취급할 순 없겠지만, 군장을 메고 드러누워 별을 바라보는 젊은 군인이라니, 그것을 콱- 쏟아져 내린다고 표현하는 사람이라니. 나에게 힘이 있다면 거기 그저 네 마음대로 한껏 드러누워있다 내려오라 하고 싶어졌다. 만약 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옆에 드러누워 쏟아지는 별들을 같이 바라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열종대로 콱 쏟아져내리지? 응, 정말 그래. 하는 대화 뒤에 우리는 얼마간 침묵을 지키겠지.



시집의 제일 앞에는 이런 말이 써있다.



나는 연화라는 이름을 잘도 마음에 들어한다.



이 한 줄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연화는 그에게 어떤 존재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여름 이란 단어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연화라는 이름이 단어 자체로 마음에 든다는건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고 어디서든 그 이름을 찾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연화란 사람이 좋아서 그 이름을 마음에 들어하게 된 건지, 이 아름다운 문장에 또한 시적인 문장에 깊이 스며든 뜻은 무엇일까. 나는 친구로부터 이 시집이 좋다는 추천을 받고서도 선뜻 사기가 망설여저 일단 미리보기로 한 장씩 넘겨본다. 그러다 나는 연화라는 이름을 잘도 마음에 들어한다, 때문에 더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문장은 다음 시의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와 닮아 있다.





꾀병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

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

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

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

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

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

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언젠가 한 친구가 이 시집을 읽으며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이란 문장 때문에 시를 사진 찍어 보내준 일이 있다. 그리고 나는 시집을 넘기다가 그 시를 찾아낸다. 아니, 거기 있었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렷던

당신의 스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시를 시로 만들어주는 것은 어쩌면 단 하나의 문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스럽지 않게 가만 읽다가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에서 이 글은 한 편의 시가 되고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에서 역시나 시로 완성된다. 


시인은 어떤 사람일까? 마르고 허약한 사람,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 있는 사람, 외출하는 여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무엇보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 그가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하다 못해 아프다. 




미인의 발



반디미용실에서 처음 낙타를 보았습니다 미용실 누나는

쌍봉낙타 봉 같은 가슴 사이에 제 머리를 묻고 비뚤어짐을

가늠했고 저는 실눈만 떴다 감았다 했습니다 왼쪽과 오른

쪽을 맞춰 다듬다 머리는 새싹처럼 짧아지고 쥬시후레시를

건초처럼 씹는 미용실 주인의 잔소리에 미숙한 누나는 푹푹

발이 빠졋습니다 누나는 동네 아저씨들 술자리의 기본 안주

가 되기도 하고 아주머니들의 커피 잔에서 설탕과 함께 휘

저어졌습니다 엄마보다 동네 형들이 반디미용실에 더 많이

들락거렸고요 낙타가 떠난 날은 감나무집 형이 소주를 댓병

으로 마신 날이었습니다 형 가슴보다 까맣게 그을린 반디미

용실 건물, 석유 말 통과 담뱃불이 반딧불이처럼 날아들어

왔다는 미용실 주인은 양귀비 염색약처럼 까맣게 울었습니

다 낙타는 불이 다 꺼진 뒤에야 미용실에서 나와 삼거리 지

나 일방통행로로 천천히 걸어나갔습니다 낙타가 사하라로

갓는지 고비로 혹은 시리아 사막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

만요 마음을 걷던 발자국은 아직도 남아 저는 요즘도 간혹

그 발자국에 새로 만나는 미인들의 흰 발을 대어보기도 하

는 것이었습니다




아직은 춥지만 엄연한 봄밤이 아닌가. 봄밤에는 잠들기 전에 왈랑왈랑 거리는 시를 한 편씩 읽어줘야 하는건 아닌가. 꽃이 피는걸 보고 돌아오고 꽃이 지는걸 보고 돌아오고, 발을 깨끗이 닦고 자리에 눕기 전, 시집을 펼쳐들고 천천히 그리고 가만가만 시를 한 편 읽고 자야 봄밤은 봄밤으로 완성되는 건 아닌가.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시를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기엔 이 시가 가장 적절할 것 같다.



당신이라는 세상



술잔에 입도 한번 못 대고 당신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 많

은 술을 왜 혼자 마셔야 하는지 몰라 한다 이렇게 많은 술

을 마실 때면 나는 자식을 잃은 내 부모를 버리고 형제가

없는 목사의 딸을 버리고 삼치같은 생선을 잘 발라먹지 

못하는 친구를 버린다 버리고 나서 생각한다



나를 빈방으로 글고 들어가는 여백이 고맙다고, 청파에는

골목이 많고 골목이 많아 가로등도 많고 가로등이 많아 밤

도 많다고, 조선낫 조선무 조선간장 조선대파처럼 조선이 

들어가는 이름치고 만만한 것은 하나 없다고, 북방의 굿

에는 옷(衣)이 들고 남쪽의 굿에는 노래가 든다고



생각한다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버리는 것이 잘못된 일

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버릴 생각만 하는 것도 능사가 아

니라는 생각도 한다



술이 깬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버리지 못한다 술이 깨고

나서 처음 바라본 당신의 얼굴이 온통 내 세상 같다





조금 더 날이 좋아지면, 이제 바람은 자신의 숨결을 좀 죽일 때면 당신의 손을 잡고 소풍을 가고 싶다. 우리의 손에는 이 시집이 들려있을 것이고 얼마만큼의 술이 들려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달이 뜨기 전,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시를 한 편 씩 골라 읽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더이상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해지면 땅바닥에 등을 대고 드러누워 쏟아지는 별들을 볼 수 있겠지. 오열종대로 콱,         쏟아져내리는 별들을. 그 밤을 그렇게 별들을 바라보다 지내도 좋을 것이고 근처의 여관방으로 들어가도 좋을 것이다. 다음날 햇빛이 들면 당신 얼굴의 볕을 만질 수 있도록, 그렇게. 시를 읽고 별을 보고 당신 얼굴의 볕을 만지고나면, 아마도 세상은 온통 내 것 같을 것이다. 당신의 얼굴이 온통 내 세상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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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5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5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5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3-04-15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준'이란 시인을 오늘 처음 알았네요. 참, 여러모로 무식한*^^*

시집 권해주는 친구 너무 멋있어요. 나도 친구들에게 그런 친구가 되고 싶어요. 친구들이 읽을랑가?!? 모르겠지만요.

좋은 시가 너무 많아요. 빨리 읽기 아까워서 천천히 읽어보고 가요.

다락방 2013-04-15 15:32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 알게된 시인이에요. 시를 잘 읽을줄 모르는데, 이 시집의 몇몇 시들은 참 좋아요. 말 그대로 시적이라고 해야할까요. 봄밤이잖아요, 단발머리님. 우리 잠들기 전에 시 한 편씩 읽고 자요. 헤헷 :)

테레사 2013-04-15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상의 느낌을 받았더랬습니다..나는 연화라는 이름을 잘도 마음에 들어한다...에서...

다락방 2013-04-15 15:33   좋아요 0 | URL
오, 테레사님 저도요! 저랑 똑같아요. 저는 그 문장에서 이상을 느낀건 아니고, [꾀병]이란 시에서 '이상'의 [날개]가 겹쳤어요. 완전 겹치더라고요. 테레사님도 그랬군요!!

(바뀐 프로필 근사해요!)

테레사 2013-04-15 16:55   좋아요 0 | URL
으히히, 다락방님이 바꾼 걸 보고, 또 오늘 기분도 그렇기도 하고, 또또 봄은 영영 이렇게 시시하게, 골난 처녀처럼, 뭐 하여간 너무하다 싶어, 술이나 한잔....순전히 다락방님에게 영감을 얻었다는...
 
가을방학 - 정규 2집 선명 [디지팩]
가을방학 노래 / 윈드밀 이엔티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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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을방학의 앨범을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목소리부터 가사와 음악까지 모두 색다르고 참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때의 내 상황과 맞물려서인지, 가사도 내 마음 같았고 그렇게 가을방학의 음악은 내가 즐겨 듣는 음악이 되었다. 콘서트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잠깐 갈등하며 가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었고. 그래서 그들의 2집 소식을 듣자마자 앨범을 구입했다. 그런데 웬걸, 처음 그들의 노래를 들었을 때의 상황과 지금의 내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인걸까. 이제 더이상 그들의 음악이 새롭게 느껴지질 않는다. 여전히 가을방학다운 노래들이지만, 반갑거나 독특하다는 느낌보다는 지난 노래들의 그 싱그러움에서 가사만 바뀐것 같다. 더이상 참신하지도 독특하지도 않고, 이제는 그렇게까지 좋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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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2013-04-14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외부의 자극은 내부 상태에 좌우되어 수용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모든 것에 무덤덤해진 생활 속에서 마음을 잡아끄는 것을 만났을때, 지난 시절이 생각나 더욱 푹 빠지게 될지도 몰라요.

다락방 2013-04-15 08:49   좋아요 0 | URL
네 제 상황이나 감정이 바뀌어서 음악을 듣는것도 달라진걸지 몰라요. 며칠전 만난 친구는 제게 음악을 듣는 취향이 달라진 것 같다고 하던데, 어쩌면 저는 취향이 달라진걸지도 모르겠어요.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까요.

자작나무 2013-04-15 10:01   좋아요 0 | URL
모든 것이 변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인정할 수만 있다면....

다락방 2013-04-15 11:05   좋아요 0 | URL
인정하는게 그리 어려운 건 아닌데, 인정한다고 해서 씁쓸하지 않은건 아닌것 같아요.

치니 2013-04-15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말할 수 있다, ㅎㅎ 전 처음부터 가을방학이 그냥 그랬어요.

다락방 2013-04-15 11:05   좋아요 0 | URL
이번에는 듣는데 보컬 목소리도 좀 듣기가 싫더라고요;; 제가 변한것 같아요. 하핫

애쉬 2013-04-1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어요? ^^
그러다 또 어느날 꽉.하고 어느 대목이 마음을 쥐어 짤지도 몰라요.
그 정도의 준비는 늘 하고 있자, 그게 저한테 갖는 가을방학의 의미지요~
다락방님께도 어느 날 꽉.

다락방 2013-04-15 15:33   좋아요 0 | URL
네, 음악이란 게 그런것 같아요. 이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어느 노래가 듣고 싶어 꽉,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토요일 밤에는, 편애하는 대상에게 이메일을 쓰면서 편애를 들었어요. 그 순간엔 적절한 선곡이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