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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ㅣ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별의 평야
군장(軍裝)을 메고 금학산을 넘다보면 평야를 걷고 싶고
평야를 걷다보면 잠시 앉아 쉬고 싶고 앉아 쉬다보면 드러
눕고 싶었다 철모를 베고 풀밭에 누우면 밤하늘이 반겼다
그제야 우리 어머니 잘하는 짠지 무 같은 별들이, 울먹울먹
오열종대로 콱 쏟아져내렸다
오열종대로 쏟아지는 별들을 보는 사람이, 별들을 짠지 무같다고 느끼는 사람이 군대 생활을 하는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더 힘들진 않을까. 속안에 자라나는 그 많은 감정들을 어떻게 눌러가며 조직생활에 충실할 수 있을까. 매순간 가슴속의 무언가가 끓어오르진 않을까. 그렇다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을, 그렇다는 이유로 특별하게 취급할 순 없겠지만, 군장을 메고 드러누워 별을 바라보는 젊은 군인이라니, 그것을 콱- 쏟아져 내린다고 표현하는 사람이라니. 나에게 힘이 있다면 거기 그저 네 마음대로 한껏 드러누워있다 내려오라 하고 싶어졌다. 만약 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옆에 드러누워 쏟아지는 별들을 같이 바라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열종대로 콱 쏟아져내리지? 응, 정말 그래. 하는 대화 뒤에 우리는 얼마간 침묵을 지키겠지.
시집의 제일 앞에는 이런 말이 써있다.
나는 연화라는 이름을 잘도 마음에 들어한다.
이 한 줄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연화는 그에게 어떤 존재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여름 이란 단어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연화라는 이름이 단어 자체로 마음에 든다는건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고 어디서든 그 이름을 찾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연화란 사람이 좋아서 그 이름을 마음에 들어하게 된 건지, 이 아름다운 문장에 또한 시적인 문장에 깊이 스며든 뜻은 무엇일까. 나는 친구로부터 이 시집이 좋다는 추천을 받고서도 선뜻 사기가 망설여저 일단 미리보기로 한 장씩 넘겨본다. 그러다 나는 연화라는 이름을 잘도 마음에 들어한다, 때문에 더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문장은 다음 시의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와 닮아 있다.
꾀병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
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
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
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
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
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
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언젠가 한 친구가 이 시집을 읽으며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이란 문장 때문에 시를 사진 찍어 보내준 일이 있다. 그리고 나는 시집을 넘기다가 그 시를 찾아낸다. 아니, 거기 있었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렷던
당신의 스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시를 시로 만들어주는 것은 어쩌면 단 하나의 문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스럽지 않게 가만 읽다가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에서 이 글은 한 편의 시가 되고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에서 역시나 시로 완성된다.
시인은 어떤 사람일까? 마르고 허약한 사람,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 있는 사람, 외출하는 여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무엇보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 그가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하다 못해 아프다.
미인의 발
반디미용실에서 처음 낙타를 보았습니다 미용실 누나는
쌍봉낙타 봉 같은 가슴 사이에 제 머리를 묻고 비뚤어짐을
가늠했고 저는 실눈만 떴다 감았다 했습니다 왼쪽과 오른
쪽을 맞춰 다듬다 머리는 새싹처럼 짧아지고 쥬시후레시를
건초처럼 씹는 미용실 주인의 잔소리에 미숙한 누나는 푹푹
발이 빠졋습니다 누나는 동네 아저씨들 술자리의 기본 안주
가 되기도 하고 아주머니들의 커피 잔에서 설탕과 함께 휘
저어졌습니다 엄마보다 동네 형들이 반디미용실에 더 많이
들락거렸고요 낙타가 떠난 날은 감나무집 형이 소주를 댓병
으로 마신 날이었습니다 형 가슴보다 까맣게 그을린 반디미
용실 건물, 석유 말 통과 담뱃불이 반딧불이처럼 날아들어
왔다는 미용실 주인은 양귀비 염색약처럼 까맣게 울었습니
다 낙타는 불이 다 꺼진 뒤에야 미용실에서 나와 삼거리 지
나 일방통행로로 천천히 걸어나갔습니다 낙타가 사하라로
갓는지 고비로 혹은 시리아 사막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
만요 마음을 걷던 발자국은 아직도 남아 저는 요즘도 간혹
그 발자국에 새로 만나는 미인들의 흰 발을 대어보기도 하
는 것이었습니다
아직은 춥지만 엄연한 봄밤이 아닌가. 봄밤에는 잠들기 전에 왈랑왈랑 거리는 시를 한 편씩 읽어줘야 하는건 아닌가. 꽃이 피는걸 보고 돌아오고 꽃이 지는걸 보고 돌아오고, 발을 깨끗이 닦고 자리에 눕기 전, 시집을 펼쳐들고 천천히 그리고 가만가만 시를 한 편 읽고 자야 봄밤은 봄밤으로 완성되는 건 아닌가.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시를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기엔 이 시가 가장 적절할 것 같다.
당신이라는 세상
술잔에 입도 한번 못 대고 당신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 많
은 술을 왜 혼자 마셔야 하는지 몰라 한다 이렇게 많은 술
을 마실 때면 나는 자식을 잃은 내 부모를 버리고 형제가
없는 목사의 딸을 버리고 삼치같은 생선을 잘 발라먹지
못하는 친구를 버린다 버리고 나서 생각한다
나를 빈방으로 글고 들어가는 여백이 고맙다고, 청파에는
골목이 많고 골목이 많아 가로등도 많고 가로등이 많아 밤
도 많다고, 조선낫 조선무 조선간장 조선대파처럼 조선이
들어가는 이름치고 만만한 것은 하나 없다고, 북방의 굿
에는 옷(衣)이 들고 남쪽의 굿에는 노래가 든다고
생각한다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버리는 것이 잘못된 일
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버릴 생각만 하는 것도 능사가 아
니라는 생각도 한다
술이 깬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버리지 못한다 술이 깨고
나서 처음 바라본 당신의 얼굴이 온통 내 세상 같다
조금 더 날이 좋아지면, 이제 바람은 자신의 숨결을 좀 죽일 때면 당신의 손을 잡고 소풍을 가고 싶다. 우리의 손에는 이 시집이 들려있을 것이고 얼마만큼의 술이 들려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달이 뜨기 전,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시를 한 편 씩 골라 읽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더이상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해지면 땅바닥에 등을 대고 드러누워 쏟아지는 별들을 볼 수 있겠지. 오열종대로 콱, 쏟아져내리는 별들을. 그 밤을 그렇게 별들을 바라보다 지내도 좋을 것이고 근처의 여관방으로 들어가도 좋을 것이다. 다음날 햇빛이 들면 당신 얼굴의 볕을 만질 수 있도록, 그렇게. 시를 읽고 별을 보고 당신 얼굴의 볕을 만지고나면, 아마도 세상은 온통 내 것 같을 것이다. 당신의 얼굴이 온통 내 세상 같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