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국가에서든 강간당한 여성은 강간과 관련된 모든 법은 여성에게 불리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강간으로 비난받는 것은 피해자 여성이다. 피해자 여성이 남성을 고발할 경우 법정에서 두 번째 '강간'이 일어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변호사는 피해자의 성생활에 대하 질문할 모든 자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해자 남성의 행위는 호탕한 무사 기질 정도로 가볍게 처리된다. -p.86~87
어제 링크했던 BBC 의 버닝썬 다큐를 보고 강간과 피해자 그리고 가해자에 대해 생각이 많았는데 마침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위와 같은 구절을 읽게 됐다. 다큐에서는 익명으로 강간 피해자가 나와 자신이 버닝썬에서 술을 마시다 정신을 잃었던 일, 눈 떠보니 침대 였고 자신에게 술을 주었던 남자와 함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비명을 질렀더니 가해자가 입을 막고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타 자신이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그렇게 강간을 당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다고 했다. 집에 보내달라고, 엄마가 보고싶다고, 제발 집에 보내달라고. 그러자 가해자는 자신과 사진을 찍어야만 보내주겠다고 했단다. 피해자는 무력하게 그의 강압에 못이겨 억지로 브이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경찰에 강간을 신고했지만 가해자는 함께 찍은 사진을 내밀며 합의하에 한 관계라 말했고, 그의 강간 범죄는 인정되지 않았다 했다.
다큐에서는 생전 구하라의 영상도 보여주었다. 다큐를 보면 알겠지만, 구하라는 버닝썬 사건의 가해자들을 잡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 역시 리벤지 포르노 피해자였고 그래서 돕고 싶다고 취재중인 기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구하라의 전남자친구 최종범은 구하라의 섹스 영상을 찍었다. 그 영상을 빌미로 구하라를 협박했다. 나는 네 연예인 생활 끝나게 해줄 수 있다고. 그간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바쳐 이룩했던 삶을 끝나게 한다는 소위 남자친구라는 사람의 협박에 구하라는 무릎 꿇고 그에게 빌었다. 제발 그 영상을 공개하지 말라고. 그러나 최종범의 영상 촬영은 무죄로 판결났다. 오덕식 판사는 그가 영상을 찍은 것은 범죄의 의도가 없다고 보았고, 굳이 그걸 자기가 보고 판단하겠다고 해서, 구하라와 구하라 측 변호인이 그러지 말아달라고 하는데도 그 영상을 시청했다. 명백한 2차 가해였다. 그러고 판결한 게 최종범의 불법촬영혐의 무죄였다.
"동의를 받지 않았으나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촬영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라는 것이 이유였다.
동의를 받지 않았으나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것은 아니다??? 우리, 어디서 많이 본 논리 아닌가. 술은 마셨지만 음주 운전은 아닌 것처럼?
https://www.insight.co.kr/news/257073
마리아 미즈가 책에서 언급한대로 법정에서 두번째 강간이 일어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판사가 굳이 그 영상을 확인하려 들고, 웃으며 브이한 사진을 보며 합의했네, 라고 말하는 경찰을 앞에 두고 돌아서야 하는 피해자라니. 왜 피해자가 매달리고 피해자가 애원하고 피해자가 무릎 꿇어야 하는가.
여성은 모든 민주주의 헌법이 선언하고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 중 일부, 특히 신체가 해를 입지 않을 불가침의 권리가 여성에게는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모든 여성은 이런 남성 폭력의 잠재적 피해자라고 하는 암울한 사실과 힘과 교양을 갖춘 근대 민주주의 국가가 여성의 이런 기본권들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막막한 현실을 접하면서 많은 페미니스트는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국가가 동맹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품게 된다.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경험한 여성은 근대 민주주의의 '문명화된' 사회에서 노골적인 폭력이 사라졌다고 하는 모든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사회에서 자주 찬미되는 '평화'가 사실은 여성에 대한 일상적이고 직간접적인 공격에 기초한 것임을 점점 더 많은 여성이 깨닫기 시작했다. 독일 평화운동에서 페미니스트는 이런 슬로건을 만들었다. '가부장제의 평화가 여성에게는 전쟁이다.' -p.87
버닝썬 사건에서도 경찰과의 유착관계가 드러났으나 정작 경찰총장보다 더 힘이 세다는 윤규근 총경은 벌금 2천만원이 이 조직범죄의 처벌 전부였다. 벌금형이라 공무원직을 잃지 않았다. 며칠전 뉴스에 나온 서울대 n번방 사건에서도 경찰들은 '텔레그램이라 수사가 어렵다', '피의자를 특정할 수 없다' 며 피해자들을 돌려보냈다. 피해자들은 추적단불꽃을 찾아갔다. 추적단불꽃의 원은지 님은 텔레그램에 잠입해 결국 범인들을 잡는데 성공했다. 피해자가 무릎 꿇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가해자를 잡는 일까지도 해내야 했다. 왜? 경찰이 그리고 나라가 도와주지 않으니까. 마리아 미즈가 언급한대로 '신체가 해를 입지 않을 불가침의 권리가 여성에게는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2024년에도 여전히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우리는 곧잘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부르짖곤 하는데,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국가가 동맹자가 될 수 있을까? 아니, 여성해방의 동맹자라니. 오히려 국가는 여성을 죽이는 일에 동맹자가 되고 있지 않은가. 가해자의 편에 서있지 않은가.
마리아 미즈의 이 책,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1986년에 쓰여졌다. 그러나 2024년에도 여전히 변한 게 없다. 국가는 여성의 해방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국가는 여성을 죽이는 일에 동참한다.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기본권은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