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갈 때 계획을 짜는 편은 아니지만 굵직한 목표 같은 것은 몇 개 정해두고 가는 편이다.
이를테면 포르투갈에는 프란세진야를 먹으러 간다든지(사실 프란세진야를 먹으러 포르투갈에 간거지만), 뉴욕에는 센트럴 파크를 목표로 간다든지 하는 그런 식이랄까. 말레이시아에는 카야토스트를 먹으러 다녀왔고, 그렇다면 이번 대만은?
대만은 음식이 맛있다는 얘기를 익히 들어왔음에도 이번에 대만 가는 최대 목표는 달리기였다.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 첫 여행이었으니 좋았어, 낯선 도시에서 달리기, (아마도) 모든 러너들의 로망! 그걸 해주겠어!! 달리기 위해 대만을 가는 건 아니었지만 대만에 가면 달리겠다! 라는 목표 한가지만이 나에게 있었다.
딱히 뭘 준비하는 편이 아니긴 하지만 아니 그래도 그렇지, 뭘 먹을지도 모르는채로 이렇게 그냥 훅 떠나도 되나, 뭐라도 하나 이걸 반드시 먹어보자 하는건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은 여행 출발 바로 하루 전날 들었다. 신계숙의 이번 <맛터사이클 다이어리>가 대만편인건 알고 있었는데, 본방송은 내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하고 다시보기는 되지 않더라.(내가 못찾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보지 못해 대만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어, 흐음, 같이 가는 친구가 대만에 한 번 다녀왔다니 무조건 그 친구만 따를까, 하다가 그래도 나 역시 하나의 정보라도 있어야 되지 않나 싶어지는거다. 대만 맛집으로 검색해볼까? 하다가 퍼뜩,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대만 여자사람이 생각났다. 우린 말레이시아에서 만나 합석한 뒤 서로의 '라인'에 친구추가를 해둔 터다. 그 당시 식당에서 헤어지고 난 뒤에 잠깐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 뒤로 지금까지 우리가 서로에게 말을 건 적은 없었는데, 갑자기, 불쑥, 내가 말 걸어도 될까?
(여기서 잠깐.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대만 여자사람 이야기는 여기 -> https://blog.aladin.co.kr/fallen77/15295296 )
나는 라인앱으로 들어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잘 지내니, 우리 말레이시아에서 만났는데 혹시 기억하니? 라고 시작하면서 '내가 내일 대만에 가는데 혹시 추천해줄 음식이 있니?' 하고 물었다. 그녀의 답변이 도착하기 전, 좀 걱정이 됐다. 그러니까 오랜만의 갑작스런 연락인데 괜찮을지, 혹여 그녀는 여행이 끝난 후 나를 라인에서 삭제한 건 아닐지, 삭제는 안했어도 이런 갑작스런 메세지는 당황스럽지 않을지, 뭐야 이 사람 왜 연락해 라는 생각을 하진 않을지. 나는 내 라인에 그녀가 있는게 좋았지만 그녀 역시 그럴지는 내가 알 수 없으니 나는 어쩌면 원하지 않는 그녀에게 실례를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메세지를 보내놓고 그녀로부터 답이 없거나 혹여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당황하거나 싫은 기색이 느껴진다면, 쏘리라고 말하고 바로 물러나자, 결심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반갑게 인사를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바로, 식당도 한 곳 추천해주었다. 서툰 영어로 나누는 대화였지만 그녀로부터 어떤 싫은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심지어 그녀는 며칠간의 일정이냐 물은뒤 내 일정중에 하루, 잠깐 볼 수 있냐고 묻는게 아닌가. 잠깐이면 된다고, 뭔가 좀 주고 싶다는 거다!! 아니, 뭐라고???????????? 내가 혹여 귀찮게 하는건 아닐지 걱정했는데 오히려 나를 만나고 싶어하네? 좋았어! 나는 그녀에게 호텔 정보를 주고 호텔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러고나자 마음이 바빠졌다. 그녀는 나에게 뭔가 something 준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 역시 선물을 들고가야하지 않나. 그녀는 대만에서 살 수 있는 걸 내게 줄텐데, 나 역시 한국에서 살 수 있는 한국 것을 주는게 좋겠는데, 뭘 해야 하지? 갑자기 하루전에 준비할 수 있는게 뭘까? 지금 당장 살 수 있는 건, 뭐지? 면세점에서 구매는 가능하지만 그건 너무 흔하지 않나? 그렇게 고민하다가, 오호라! 전주초코파이를 생각해냈다! 전주초코파이라면 마켓 컬리로 주문해서 새벽에 받을 수 있다. 나이쓰! 나는 전주 초코파이 두 박스를 주문했다. 하나는 내 꺼 하나는 대만 여자사람에게 선물 ㅋㅋ 그렇게 다음날 새벽에 도착한 전주초코파이 한 박스를 캐리어에 넣고 나는 대만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기로 한 토요일.
나는 아침에 공원을 달렸고 씻고 밥을 먹고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호텔 앞으로 갔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그녀가 나를 알아봐주겠지, 하고 나선 참이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서로 긴가민가 하다 알아보았다. 그녀는 반갑다며 선물을 내밀었는데, 아니, 세상에, 펑리수와 누가 크래커를 잔뜩 안겨준겁니다. 눈물이 났죠..
펑리수와 누가크래커는 유명하지만 여기 것이 제일 유명하다면서 주었다. 고맙다고 인사한 뒤 나도 내가 준비한 전주초코파이를 건넸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혹시 잠깐 시간 괜찮으면 커피 한 잔 할래? 했더니 그녀가 좋다고 했다. 마침 호텔 1층에는 까페가 있던 터라 우리는 들어가서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그녀는 차가운 말차라떼를 시켰다. 대화를 나눠보니 그녀가 나보다 영어를 훨씬 잘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그녀를 만나서 '어제 내가 추천한 레스토랑 갔다왔어' 하고 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줬다. 맛있었어. 고마워, 하고. 친구는 내게 그 식당을 추천해주면서 미슐랭인데 not expensive 라고 했던 터다. 정말 그녀의 말대로 저렴한 가격대에 맛있는 걸 먹고왔다.
사실 우리가 말레이시아에서 잠깐 만나 합석한터라 서로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르는 상황. 나는 그녀에게 '너는 학생이니?' 물었다. 그녀는 아니라고, 회사에 다닌다며 자신이 태어난 년도를 얘기해주고 나이도 얘기해주었다. 서른살이라고 했다. 오! 너 되게 어려보인다, 스물셋이나 넷인줄 알았어! 라고 말했더니 그녀는 빵터져서 웃었다. 그녀가 나이를 말했으니 나도 말해주는 것이 이 세계의 도리. 나는 내 나이를 공개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쩐지 그녀에게 미안했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너 되게 어려보인다, 난 너 내또래인줄 알았어!' 하는게 아닌가. 아니, 네? 서른..살이면서 무슨 말씀 이세요? 나는 그녀에게 No kidding! 이라고 한 뒤, 너는 베리베리베리베리 카인드하구나!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녀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그녀가 다니는 회사는 쉬는 날을 연달아 이틀까지만 허락하기 때문에 유럽을 갈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9월에 홍콩에 갈거라고. 최근에는 넷플릭스를 통해 <더 글로리> 와 <눈물의 여왕>을 보고 있다고 했다. 나는 듀오링고 얘기를 꺼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 친구 오 그런거 있는줄 몰랐다면서 핸드폰 꺼내서 내 앞에서 듀오링고 깔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듀오링고 이쯤되면 나한테 수고비좀 줘야 되는거 아니냐? 광고료라도 주거나? 이젠 하다하다 대만에서도 듀오링고 새로 설치하게 만든다니까, 내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음에 한국에 또 오게 되면 메세지 보내라고, 그때 만나자고 이야기를 하며 헤어지려는데, 아니 이 친구가 까페의 케익 코너로 나를 데려가서는 케익을 고르라는 거다. 친구랑 둘이 먹으라고. 그래서 내가 됐다고 아니라고 하는데도 자꾸만 고르래, 그래서 하나 골랐는데 하나 더 고르라는 거에요. 아니야, 하나면 돼, 하나만 할게, 해도 자꾸 두 개 고르라고 해서 케익 두 개를 골랐다. 세상에, 내가 연락해도 괜찮을까, 했는데 이 친구는 나를 만나러 와주고 내게 선물을 주고 커피도 사주고 케익도 사줬다. 힝 ㅠㅠ 결국 나는 객실로 이 많은 걸 가지고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로부터 메세지가 도착했다.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봐서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그녀는 한국말로 내게 메세지를 보낸 거다.
아니, 여러분 너무 예쁘지 않습니까? 너무 사랑스럽지 않나요? 인류애가 솟아난다.... 팡팡!!!!!
친구랑 다시 외출하고 돌아온 늦은 밤, 우리는 대만 친구가 준 케익을 꺼내두고 와인을 마셨다. 나는 사진을 찍어 대만 친구에게 보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번 대만 여행은 짧았는데 얼마나 알찼는지 모른다. 대만에서 있는 시간 내내, 나는 너무나 즐거웠다. 여행지라는 장소로만 놓고 본다면, 내가 즐겨찾을 장소가 될 것 같진 않은데(베트남이 더 좋다), 그런데 대만에 머무는 동안 '와 인생 너무 즐거워' 하는 생각을 수차례 했던 거다. 내 인생 진짜 뭐냐, 어디로 가냐, 삶은 진짜 개꿀 즐겁다, 하고 자꾸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거다. 사실 대만으로 떠나기 전 다른 일 때문에 몹시 심란했고, 이걸 어쩌나 하면서 고민했었는데, 대만에 도착해서 그 뜨거운 태양 아래 걷고 또 뛰고 외국인 친구를 만나노라니 내 인생이 너무나 뿌듯한거다. 이렇게 즐거운 인생이 나이들수록 펼쳐진다는 게 너무 짜릿하고 그런데 이만큼이나 나이를 먹었다는 깨달음에 살짝 우울해지기도 했다. 앞으로 더 즐거울 것 같은데 인생이 유한하다니, 너무 싫잖아!!!!! 오래 살고 싶어, 안죽고 싶어, 나는 이 즐거운 인생을 계속 누리고 싶다!!!!!!
전날도 빨빨거리긴 했지만, 이 날은 아침에 일어나서 공복달리기-호텔 근처 산책-샤워-대만 삼각김밥과 한국 컵라면으로 식사-대만 친구 만나기-내 친구랑 시내 돌아다니기-우육면 먹기-계속 돌아다니기-저녁 두 번 먹기-숙소 들어와 씻기-와인에 케익 먹으며 수다를 두시까지 떨기-다음날 아침 호텔 조식먹기
까지 했더니 얼라리여, 돌아오는 날 침 삼킬 때 목구멍이 아프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라 챙겨간 비타민과 타이레놀을 먹으면서 안돼, 아프지마, 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목이 더 아파오더니, 비행기 에서는 기절해 버렸고, 밤 11시 집에 도착했을 때는 온 몸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아 체온을 재보니 38.5 도였다. 아...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걱정스런 마음에 타이레놀과 집에 있는 약 대충 챙겨 먹고 잤는데, 열은 내렸지만 목구멍이 넘나 아픈거에요. 그래, 내가 너무 무리하긴 했지. 즐겁다고 오버했어 ㅠㅠ
그래서 어제는 병원 가서 엉덩이 주사 맞고 약도 처방 받았다. 닥터가 내 목구멍 들여다보면서 '으이크, 많이 부었네..' 하더라. 하아- 제가 여행다닌다고 아프고 그런 사람 아닌데요, 이번엔 진짜 넘나 오버했음을 인정합니다. ㅠㅠ
그렇지만 인생은 개꿀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