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와인을 좋아한다. 와인의 맛을 알지 못하고 마시기 시작한지 오래되지도 않아, 한 입 입에 물고 호로록 굴리면서, 으음, 뜨거운 태양의 냄새와 껍질의 맛..음, 바닐라가 섞여있고 코르크 향이 나는군...같은 건 할 수도 없을 뿐더러 맛을 구별하지도 못하지만, 그간 마신 경험만으로 '까베르네쇼비뇽'과 '말벡'이 내 입맛에 좋다, 정도까지의 취향이 생겼다. 이렇게 뭐 자세히 맛을 구별하지도 못하고 그저 와인을 마시면서 온 몸에 도는 열기와 취기를 좋아하는터라, 굳이 비싼 와인을 마실 필요는 없다. 사실 비싼 와인 마실 돈도 없고. 와인은 가뜩이나 소주나 맥주보다 비싼데, 어떻게 비싼 걸 마셔... 여튼 그래서 내가 애용하는 와인은 마트에 갔을 때 '이만원에 세 병'하는 와인이다. 이만원에 세 병하는 와인을 사서 마시고 가끔 만원 안팎의 와인을 사마시기도 하는데, 사치한답시고 월급날 2만원이나 3만원짜리 와인을 사 마신 적도 있다. 그런 비싼 와인을 마신 건 다섯손가락 안에 꼽지만... 뭐, 그렇다는 거다.
어제 영화 [데미지]를 봤다. 1991년에 개봉한 영화던데, 지금에야 봤다. 엄청나게 재미있고 야한 영화를 보고 싶어 추천을 바란다고 트윗을 작성했는데 그 때 추천받은 영화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 영화인데 내가 일본 영화는 좀 별로이고 다른 하나는 벨기에 영화인데 굿 다운로더가 없다. 그런데 이 [데미지]는 <무삭제완역판>으로 굿 다운로더 단돈 1,000원!!!
내용은 대충 알고 있었다. 여자가 자신의 시아버지 될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파격적인 스토리. 줄리엣 비노쉬가 야하면 얼마나 야할까 약간 의심했는데, 이 영화는 내가 원하는만큼 야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나이 많은 남자, 즉 시아버지가 될 사람인 '제레미 아이언스' 가 겁나 멋진 거다. 이 남자는 영화속에서 인정받는 정치인이며 앞으로 더 커나갈 가능성도 품고 있는 남자다. 지위와 명성을 가지고 있고 인기도 있는 사람. 이미 가진게 많은 사람인 그가, 아들의 여자친구를 보고 폭풍같은 열정에 휩싸인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라 그로서도 당황스럽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다. 오죽하면 이 나이든 남자는, '그녀를 너무 갖고 싶어' 침대에 누워 울기까지 한다. 만나서도 어쩌지를 못하고 어디를 만져야할지, 어디에 입을 맞춰야할지 안절부절 전전긍긍, 만나지 않을 때는 보고싶어서 돌아버릴라고 하고. 그런 그가 유럽 정상들이 모이는 회의에 참가하고자 브뤼셀로 날아간다. 긴 회의후 주어진 열두시간의 휴식시간, 그는 그녀가 있는 프랑스 파리로 열차를 타고 간다. 그리고 아침 일찍 그녀를 잠깐 만나고는 호텔에 체크인을 한다. 크로아상과 베이컨이었나, 암튼 이것저것 프런트에서 아침 메뉴를 주문한 뒤에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아, 그리고 좋은 레드와인 한 병도요.
아.............저건 뭐지...묻지도 않고 '좋은 레드와인'을 주문할 수 있는 저 여유........부럽다. 엄청나게 부럽다. 내게도 저런 날이 올까? 근사한 호텔에 들어가 룸서비스를 시키면서 얼마인지 가격표를 보지도 않고 그저 '좋은 레드와인 한 병요' 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내게도 올까? 지금의 나는 간혹 친구들과 레스토랑에 가 와인을 주문할 때, 가장 저렴한 걸로 시킨다. 맨 위, 가장 저렴한 와인을 손으로 콕 짚어서는 '이거 주세요' 하는 것이다. 너무 비싼 레스토랑에 가면 차마 와인을 병으로 시키지도 못하고 글라스로 주문하면서 '많이 주세요' 같은 찌질한 멘트만 날리는데.... 씨양. 좋은 레드와인 한병, 이라니. 가격표를 보지도 않고 주문할 수 있는 그 여유는 어디서 오는거냐. 네 돈에서 오는 거냐. 지위, 명예? 레드와인에 쓰는 돈 쯤은 사실 별 거 아닌, 뭐 그런 거? 하아- 배아퍼 배아퍼 부러워 부러워 나도 저거 해보고 싶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하아- 저렇게 주문할 수 있는 사람들은 체크아웃 했을 때 혹은 레스토랑에서 계산하고나서 계산서 확인 안하겠지? 고깃집에서 계산하고 영수증 주세요, 한 다음에 고기 3인분에 36,000원 소주 세 병에 12,000원 공기밥 1,000원 맥주 두 병 10,000원 그러니까 59,000원 맞나, 하고 들여다보며 계산하는 거...안하겠지? 그러다 계산서보고 나갔다 다시 들어와 '저희 소주 두 병이었는데 왜 세 병 계산하셨어요?' 이런거 따지고 그러지 않겠지?
아, 좋은 와인 사가지고 이런거 해보고 싶다.
두번째 사진처럼 피크닉 가서 하면 분위기도 좋고 신날 것 같은데 화장실...은 어쩌지? 풀밭에서 해결해야 하나? 암튼 이 두 사진은 내가 진짜 좋아하는 스틸컷인데, 지금 올리면서 이렇게 넷이 가면 참 좋겠다, 생각하다가 나랑 내 애인이랑 한 커플 그러면 또 한 커플은 누구와 함께해야 하지? 생각하다가 갑자기 미숙이 생각이 났다. 내 친구 미숙이. 미숙이랑 미숙이 애인이랑 이렇게 넷이 가서 와인 취할때까지 먹으면 좋겠다. 아니면 나랑 내 썸남, 미숙이랑 미숙이 썸남..뭐 이렇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뭔가 꼭 사진처럼 두 커플이어야만 할 것 같아... 상상의 나래.... 안주는 육덕육덕하고...신선한 것도 물론! 치즈도 있어야 돼. 아 이따 집에 갈때 치즈 사가서 먹어야징. 아 집에 가고 싶다 ㅠㅠ 와인 마시러 가고 싶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뭔가 드러누워 뒹굴면서 칭얼대고 싶다. 피크닉 가자가자 아 몰라 가자가자 와인 먹자먹자 아 몰라 먹어먹어 그러면서 사지를 흔들며 칭얼대고 싶어...
(첫번째 사진이 제일 좋다, 나는)
아, 암튼간에, 수트 입은 제레미 아이언스는 진짜 근사했다. 어쩜 저렇게 멋질까 싶을 정도로..그런데 스틸컷 찾으려니 괜찮은 게 없더라. 그러니까 패쓰. 줄리엣 비노쉬도 예뻤는데, 크- 이 숏컷 보면서 또 누가 좋아하겠군, 하는 생각도 했다. 의외의 장면에서 내가 좀 꽂혔는데, 이건 비밀이고. 여튼 내게도 이 영화를 보고 작은 목표가 생겨났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자신의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올리브는 침대에 누우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여러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 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 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p.124)
기쁨과 마찬가지로 목표 역시 그렇지 않을까 싶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걷기 위해서는 큰 목표와 작은 목표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삶은 그렇게 구성되는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보면 '언젠가 타임지에 실릴만한 대단한 작가가 되겠다' 같은 건 큰 목표에 해당하는 것일테고, 아이패드를 사겠다 같은 건 작은 목표가 되겠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보다가 불쑥, 내게 작은 목표 하나가 추가되었다. 이것은 은밀하고 내밀하며 갑작스럽게 찾아왔으므로 빔!일! 작은 목표가 하나 생겼네, 라고 생각하다가 아..졸 큰 목푠가...싶기도 한 것이.... 여튼, 목표가 생겼다! 목표가 생기고 그걸 이루기 위해 뭔가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간다면, 삶이 또 내가 그린대로 형태를 갖추는 게 아닐까.
어제 출근길, 평소 나오던 출구로 나와 회사를 향해 열심히 걷고 있다가 문득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똭- 임원을 마주쳤다. 나는 마치 못봤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열심히 앞을 향해 걸었다. 난 못봤어, 난 못본거야...그런데 뒤에서 내게 말을 걸더라. 하아- 제기랄. 나는 돌아서서 햇빛을 가리기 위해 썼던 선글라스를 빼며 '어머, 안녕하세요, 왜 거기서 오세요?' 라며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했는데, 아마도 그 임원은 나의 가식..을 다 눈치챘을 것이다. 지하철이 편해서 차 안끌고 지하철 타고 다니고 계신다더라. 양재역에서 항상 걸어오신다고...하아- 그렇다면 늘 이 길로 다니는 것인가, 그러면 나는 또 마주칠 수 있는건가, 나는 출근길에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퇴근길에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특히나 임원이라면 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 만나고 싶지 않아,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버스를 타고 가나, 아니야 나는 다이어트 중이니까(응?) 걸어가는 게 맞아, 그렇다면 다른 출구를 이용해야 하나, 아아, 나는 또 어디로 가야하는지 누구도 내게 일러주질 않았네......라며 오늘 평소처럼 그 길로 왔는데 오늘은 만나지 않았다. 이것은 삶의 작은 기쁨에 해당한다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