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나는 포르노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섹스를 나누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쓴 적이 있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친구를 사귀든 연인을 사귀든, 나는 내가 관계를 맺는 그 어떤 누구와도 이야기가 있기를 원한다. 나와 당신의 이야기, 우리들의 이야기. 내가 소설이나 영화에서 바라는 것도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그 이야기가 웅장하거나 장엄하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닐지라도,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내게 울림을 준다면, 나는 그런 이야기가 좋다. 특별히 어떤 이야기냐, 라고 하면 한 사람이 성장해가는 이야기에 끌리기도 하고(차일드 44 의 레오처럼), 내적 갈등으로 본인의 삶이 휘청거리는 이야기에 끌리기도 한다(지옥 천국처럼). 그리고 또, 나로 하여금 도무지 버릴 수 없게끔, 무시할 수 없게끔 만드는 이야기가 있다.
최근에는 책을 읽을 때 인상적인 구절이 나오면 포스트잇을 붙여두었지 다짜고짜 밑줄을 긋진 않았다. 예전엔 무조건 밑줄 먼저 그었는데, 요즘엔 책을 읽으면서 '다 읽고 중고샵에 팔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으로 읽다가 확- 좋아지면 그때는 내가 포스트잇 붙였던 부분들을 다 한번씩 펼쳐서 밑줄을 긋는다. 이 책은 내 거다, 하고. 물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처음부터 이 책은 내 거다, 의 마음으로 밑줄을 긋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팔아야지' 했다가 결국은 밑줄을 그었던 책 중에는, 최근에 '파트릭 모디아노'의 《지평》이 있었다. 그리고 이 책,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도 그런 책이 되었다. 결국은 줄을 그어버리고 만 책. 왜? 위에서 얘기했던, 나로 하여금 도무지 그냥 넘길 수 없게 만드는,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지는, 그런 이야기가 이 안에 있어서. 자, 이 문장에서 나는 이 책을 내 것으로 하기로 했던 거다.
이제까지 내내 나는 심장 주위에 일종의 댐을 치고 사랑의 감정을 막고 있었다. 이제 벽이 무너져 내리고 심장에 담겨 있던 사랑이 흘러넘치면서, 그 안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았다 ‥‥‥. 그러나 몸이 다시 회복되면서 사랑의 물살도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잔잔해지고, 침착해졌다. 마침내는 내 평생 이렇게 침착했던 적이 다시는 없었던 것만 같았다. 「난 모드를 잃었어.」 나는 데인티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몇 번이라도 반복해 말하곤 했다. 그러나 차분하게 말하곤 했다. 처음엔 속삭이며 말했다. 그러다가 날이 지나가며 힘을 되찾게 되자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는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난 모드를 잃었어.」그렇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찾아낼 거야. 한평생이 걸리더라도 상관없어. 찾아내고 말 거야. 그리고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말해 줄 거야. 멀리 떠났을지도 몰라. 지구 반대편에 있을지도 몰라. 결혼했을지도 모르지! 상관없어. 찾아낼 거야. 그리고 모든 걸 말해 줄 테야‥‥‥.」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p.696)
아!
나는 이런 이야기에 몹시도 끌린다. 결국은 내가 원하는 상대를 찾아가는 이야기. 찾겠다고 다짐하는 이야기. 결국은 어떻게든,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려서든 당신에게 닿겠다고 말하는 이야기. 그래서 나는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를, 지평을, 핑거스미스를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에피톤 프로젝트의 회전목마를-다시 바람은 불고 우린 함께있으니- 사랑한다. 이것들은 마치 내게 주술같은 거다. 이 이야기들을 만나는 것, 읽고 보고 듣는 것, 이런 것이 내게는 아주 커다란 힘을 주는 거다. 나는 이 이야기들을 빨아들이고 싶다. 당신에게 언제든 어떻게든 닿겠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돌아오겠다고 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돌아올 거야?」데인티가 말했다.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p.697)
데인티와 수는 친구 사이이지만, 돌아올거냐 묻는 건, 아주 은밀하고 간절한 욕망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돌아올거냐, 라고 묻는 건 아주 많은 두려움을 내포한다. '아니'라는 답을 듣기 싫어 나는 차마 묻지 못하는 것을, 데인티가 수에게 물을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아주 용감하게 보인다. 모르겠다고 답하는 걸 들을 때, 어떤 기분일까. 친구든 연인이든, 그 관계가 어떻게 정립되든, 누군가가 돌아오길 바란다는 거, 그건 한없는 기다림을 담보한다. 탕웨이가 만추에서 문이 열릴 때마다 돌아보던 것처럼, 정우성이 호우시절에서 여자가 문밖으로 나오길 기다리던 것처럼. 결국 기다리던 상대가 돌아와준다면, 그렇다면 더할나위없이 좋겠지만,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기다림 자체로 이미 사랑이 아닌가.
아, 나는 정말이지 이런 이야기를 사랑한다. 특정한 화법을 사랑하듯이, 특정한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 특정한 이야기는 그래, 바로 이런 이야기인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닿겠다는 것, 닿기 위해서 내가 움직이겠다는 것. 나는 이런 이야기에 특별히 더 마음이 간다. 특별하게. 아주 특별하게.
모드와 수가 사랑하는 것이 책을 읽는 동안 좀 찜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모드와 수는 둘다 고아였다. 수는 엄마처럼 수를 키워준 사람과 함께였지만, 모드 곁에는 모드를 딸처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십대무렵 모드를 키워준 외삼촌은 성적으로 모드를 무시하고 학대했다. 그런 모드가 악몽을 꾼 밤, 수처럼 모드를 쓰다듬어주고, 수처럼 모드 옆에 누워주고, 수처럼 모드를 안아준 사람이 없었고...그러니까, 읽다가 어느 순간, 이것은 그러니까 어릴 때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에게 처음 찾아온 따뜻한 애정을 동성애로 발현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성애가, 무엇이 잘못되서 하는 게 아닌데, 이건 마치 어릴 때 환경이 좋지 못해서 이렇게 되었다, 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했던 거다. 이게 내내 찜찜했다. 그렇다면 모드는, 만약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받았다면, 그렇다면 수에게 사랑을 느끼지 않았을 거란 말인가? 하면서 뭔가 명쾌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던 거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됐달까. 그 약간의 찜찜함은 책을 다 읽으면서, 그렇게 수가 모드에게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고백하는 걸 보면서 좀 잊혀지긴 했지만, 여튼 그런 약간의 찜찜함을 나는 좀 느꼈던 거다. 이건 내가 과민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건그렇고,
일전에 김민,이민우,추상미,이영애,김상경,이재룡이 나왔던 드라마 [초대]에 그런 장면이 있었다. 이게 모드가 수로 하여금 감동을 받았던 그 장면에서 떠올랐는데, 극중에 추상미가 혼자 사는데 이민우가 룸메로 들어온거다. 정확하게 기억이 안나는데, 이민우가 아빠친구 아들이었던가 뭐 그런거였던 듯. 여튼 그래서 같이 지내게 되었는데 이민우는 추상미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연하남이었던 것. 추상미는 이민우에게 그러지말라고 하며 콧방귀도 안끼는듯 하는데, 어느날밤 천둥번개가 친거다. 추상미는 너무 무서워서 자기 방에 있다가 거실로 나오는데, 거실로 나오니 이민우가 있고, 나와서 이민우를 보고 덜 무섭다고 생각하며 안도하는 거다. 나는 그 드라마를 자주 보지 않았고, 기억나는 부분도 거의 없는데, 이 장면이 참 오래 남아있다. 천둥번개 무서운 밤, 누군가를 보며 안도하는 장면이.
여자가 낯선 목소리로 말한다. 「수예요, 아가씨. 저 수예요. 알아보시겠어요? 꿈꾸신 거예요.」
「꿈?」
수가 내 뺨을 만진다. 내 머리를 어루만진다. 아그네스는 이렇게 해준 적이 없다. 내게 이렇게 해준 사람은‥‥‥아무도 없었다. 수가 다시 말한다. 「저 수예요. 아그네스는 성홍열에 걸려서 집으로 갔잖아요. 이제 누워 계세요. 안 그러면 한기 들어 병날 거예요. 아프시면 안 돼요.」
나는 잠시 동안 다시 캄캄한 혼란 속을 둥둥 떠다닌다. 그리고 꿈이 갑자기 내게서 미끄러져 나가고 나는 수를, 그리고 나 자신을 자각한다. 내 과거, 현재,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를 자각한다. 수는 내게 낯선 사람이지만 내 모든 시간의 일부이기도 하다.
「날 두고 가지 마, 수!」 내가 말한다.
수가 망설이는 것이 느껴진다. 수가 손을 빼내자 나는 더 세게 수를 잡는다. 하지만 수가 움직인 것은 그저 나를 타 넘어 가기 위함이었고, 수는 이불 밑으로 들어와 자기 팔을 내게 두르고 내 머리에 입을 대고 눕는다.
수의 몸이 차서 내 몸까지도 차가워진다. 나는 몸을 떨지만 곧 조용해진다. 「그래요.」 수가 말한다. 수가 말을 웅얼거린다. 수의 숨결이, 그리고 내 뺨 뼈 속 깊이까지 부드럽게 울리는 수의 낮은 목소리가 느껴진다. 「그래요. 이제 주무세요. 아시겠죠? 착하기도 해라.」 (p.326)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건, 바로 이 순간들을 위해서가 아닌가 싶어지는 때가 바로 이런 때다. 천둥번개가 칠 때, 그리고 악몽을 꿀 때. 무서울 때, 무서워서 고통스러울 때 누군가 '내가 옆에 있다'고 말해주고 쓰다듬어 준다면,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한결 쉬워질테니까. 아마도 이런 순간들에 옆에 있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 아닐까. 천둥번개가 치는데 누군가를 보고 안도하며, 악몽을 꾸다가 일어났는데 나를 쓰다듬어주는 누군가 때문에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도 꽤 근사한 일일 것 같다.
천둥번개도 매일 치는 게 아니고, 악몽도 매일 꾸는 게 아니지만...
핑거스미스에서 가장 처음 마음에 들었던 문장은 이 문장이었다.
겨울밤 부엌을 떠나는 건 늘 천국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p.64)
이 한 문장이 부엌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한달까. 약간 노란빛의 조명, 음식 냄새, 모여 앉은 사람들, 같은, 그런 분위기. 이 문장 때문에 참 좋다, 했더랬다.
오후에는 업무차 남자 직원의 도움이 필요했고, 나는 같은층의 다른 부서 사무실로 가 노크했다. 그 사무실에는 젊은 남자 직원 셋만 있었는데, 둘은 아직 입사한 지 일주일도 안된 신입들이다.
한명만 좀 도와줄래요?
라고 묻자 두 명의 신입직원이 벌떡 일어나 '제가 하겠습니다' 한다. ㅋㅋㅋㅋㅋ 그러더니 둘이서 실랑이를 벌인다. 제가 할게요 제가 할게요 제가 할게요 제가 할게요. 누가누가 먼저 몸을 들이미나 내기라도 하는 것 같다. ㅋㅋㅋㅋㅋㅋㅋ이런거 너무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퇴근할 때는 내 자리에 와서 나한테 인사하고 간다. 들어가보겠습니다, 하고. 캬- 이거슨 내가 가진 권력의 힘인가. 역시 여자는 파워야....뭔가 남자들한테 일을 지시하는 입장이라는 게, 완전 너무 좋아. 크-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내 권력을 즐기고 있어, 나도 모르는 사이...하아- 뭔가 회사내의 나의 이미지는 예쁘고 카리스마 넘치는데 조또 매력적인 과장님, 정도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좀전에는 동료 직원이 준 에비씨 초콜릿을 두 개 먹었다. 아, 이러면 안되는건데, 하면서 초콜릿을 입에 물었는데, 진짜, 욕나오게 맛있는 거다. 난 사탕도 안먹고 껌도 싫고 캬라멜도 싫어하는데, 아, 초콜릿은 진짜, 어휴, 이건 뭐 그냥, 진짜...좋다. 정말 좋다. 초콜릿은 정말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