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임태경을 좋아했을 때 그가 내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은 그의 전공이었다. 그렇게나 노래를 잘하는 그가, 사실은 공학도 출신이라는 것. 인터넷에 그의 프로필을 검색해보면 그는 '우스터폴리테크닉대학 생산공학 석사'라는 학력을 갖고 있는데, 예체능 계열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것 같은 분야를 전공으로 했다니, 이게 너무나 근사한거다. 그건 아마도 내가 수학이나 과학쪽에 발휘되는 뇌가 없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수학을 잘하던 시기는 딱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였다. 그것도 물론 '잘한다'는 게 아니라, 그나마 평균 이상의 점수를 받는 정도를 의미한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때부터 수학은 이제 내게 별 관심없는 학문이 되어 있었다. 과학은 말할 것도 없고. 수학과 과학에 있어서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재능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나는 거기엔 젬병, 이러고 뒤돌아서버린 것. 물론 수학과 과학보다 더 싫은게 국사 세계사 한국지리 세계지리 정치경제...였지만. ( ") 이렇게 쓰니 좋아하는 게 별로 없었구나..그나마 점수가 상위권으로 나오는 건 국어,영어, 한문, 일본어.. 뿐이었어.. -_-
놀랍게도 내게 첫 직업은 '학습지 교사'였다. ㅎㅎㅎㅎㅎ 다만 이것이 내 경력에 적힐 수 없는 이유는 고작 2주일을 몸담았기 때문인데, 와- 해보니까 엄청 적성에 안맞는거다. 그 2주간 매일매일 토할뻔했어. 결국 2주를 보내고 3주차 월요일에 집에서는 출근한다고 나가서는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저 그만두겠다, 못다니겠다, 고. 아직 본격적으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교육을 받는 중이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그만 둘 수 있었다. 그길로 친구네 집근처로 갔다. 오전이었고, 백수인 친구는 나와주었으며, 곱창을 사주었다. 나는 그 아침에, 곱창에 소주를 마시며, 나는 도망쳤어, 라고 말했다. 아, 근데 이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라, 그때 교육을 받을 때 교육해주는 강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나는 수학을 못해' 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정말 수학을 못하지만,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 나는 영어를 못해 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영어를 평균 이상은 하고 있다고. 다만 수학보다 못할 뿐이라고. 크- 이 얘기는 진리로 여겨졌는데, 그러고보면 학창 시절에 '영어점수는 늘 안좋아' 라고 말했던 수학 잘하는 애들은 늘 성적이 상위권이었고 영어 점수도 높았다. 반면 '수학을 못해'라고 말하던 나는 모의고사에서 40점 만점에 7점을 받은 적도 있다. (읭?) 그때 영어 담당이던 담탱이가 나를 불러서는...나는 너가 영어선생님이 되기를 바라긴 하지만, 그래도 수학 이건 너무하지 않냐...라고 말씀하셨다. 발로 찍어도 이것보단 잘나오겠다고... 나는 그럼 선생님이 발로 찍어보세요, 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착한 학생답게 꾹 참았다. 나름 기술적으로 찍었는데... -0-
나의 여동생은 생물을 전공했고 수학을 부전공했다. 여동생이 대학생이던 시절, 연습장을 펴놓고 수학 문제 푸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당최 뭔 글자인지도 모르겠고, 숫자이지만 숫자 아닌 숫자 같은 너...로 보였던 터, 어떻게 우리집에 저런 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풀다가 어려우면 친구랑 전화해서 열띤 토론을 했는데 그건 내게 외계어나 다름없었다. 그때 나의 뇌는 지상에 없었다.
아, 그래서 내가 하려고 한 말은, 에이씨,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네, 수학과 과학을 잘 하는 사람들에 대한 로망이 있다는 거였는데. 특히나 과학도인데 음악을 잘하는 사람에 대해서 미친 로망이 있다고...중학교때 우리 과학 선생님은 심지어 음악 교사이기도 했다. 그런게 어떻게 가능한지 나로서는 진짜 모르겠는거다. 여튼 그렇게 로망이 있었고, 그래서 《수학자들》이란 책이 나왔을 때, 오, 이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글을 쓸까? 하는 호기심이 만땅되어 이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읽기를 시도했으나, 크- 끝까지 읽기가 역시나, 어렵더라. 그러나 알아들을 수 없는 수학용어들이 있음에도 글 자체는 아름다운 글들이 많았다. 절반쯤 읽었는데, 나머지 부분을 한 번에 읽다가는 토할 것 같아서, 한 꼭지씩 시간을 내어 찬찬히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전에 쓴 인용문은 어렵다고 올려둔 거고, 오늘은 굉장히 좋았던 에세이를 인용하겠다. 이건, '프리모 레비' 의 《주기율표》에서 '티타늄' 편을 읽었던 그 기분을 떠올리게 했다.
인용하기 전에 반드시 덧붙이고 싶은데, 이제는 임태경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콘서트와 뮤지컬을 몇 번 갔었고, 그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콘서트였는데, 그에게 정나미 떨어지게 된 계기도 콘서트가 되었다. 이걸 밝히고 넘어가야지.
인용하는 글은 '옥스퍼드 대학'과 '서울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김민형'의 글인데, '피에르 들리뉴' 교수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다.
2009년 여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개최된 정수론학회 마감 만찬 도중 피에르 들리뉴 교수가 그의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학이 인생의 전부인 그에게 장성한 두 딸이 있는데 둘 다 수학과는 전혀 무관한 일을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종종 수학 공부를 도와주고는 했지만 어느 문제고 적어도 세 가지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꽤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저 정답을 말해주길 원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들리뉴 교수는 일생 동안 수학의 여러 분야에 중요한 기여를 한 수학자다. 그는 1978년 수학자들이 최고의 영예로 생각하는 필즈 상을 수상했고, 2005년에는 자신의 출신지인 벨기에에서 후작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는 프랑스 고등화학 연구소에서 1970년부터 1984년까지 일하다가 미국 프린스턴에 있는 고등연구소로 자리를 옮겨서 은퇴할 때까지 일했다.
따라서 딸들은 완전히 미국 문화 속에서 자랐고 지금도 미국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 다 상당한 벨기에 애국자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벨기에 방문을 좋아했고 지금도 틈만 나면 벨기에에서 휴가를 지낸다. 들리뉴 교수는 "내가 벨기에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다르게 설명을 안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라고 말했다. (김민형, p.79-80)
아, 다시 읽어도 웃음이 난다. 아버지로부터 수학 공부를 배운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내게는 있어본 적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세 가지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는' 수학을, 과연 나로서도 좋아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만약 수학을 좋아했다면 그 점까지도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좋았던 부분은, 당연히 마지막 부분. 딸들이 벨기에를 사랑하는 이유가 '벨기에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다르게 설명을 안 했기 때문' 이라는 말이다. 아, 좋아. 엄청 똑똑한 사람이 적절하게 따뜻한 유머까지 구사한다면, 크- 한없이 매력적일 것 같다. 나는 확실히, 여전히, 이과생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시작하는 것 같다. 유머도, 책을 읽는 것도, 대화도, 눈높이도, 여하튼 그게 뭐든, 이과생에 점수를 더 주고 시작하는 듯. 아...그만하자. 뭔가 막 ... 아...그만하자...
토요일에는 친구들 여러명을 만났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도 있었고 자주 보았던 친구들도 있었는데, 요즘 서로 제정신이 아닌 친구와 나는 그들보다 조금 더 일찍 만나기로 했다. 네시 이십분부터 만나 수다를 떨고 다섯시를 조금 넘겨 거의 모두가 다 모였는데, 와- 이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좋은 거다. 자꾸 피식피식 웃음이 날 것 같고 좋은데, 그와중에 한명이 '여러분들하고 술마시니까 좋다' 라고 입밖에 내어 얘기하고, 그걸 들으니 또 막 더 좋은거다. 이렇게 좋은게 나 뿐만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한층 더 좋아졌달까. 앞으로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예순이 되고 일흔이 되어도, 여든이 되고 어쨌든 백살 넘어서도 우리가 이렇게 가끔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건강을 유지해서 지금처럼 골뱅이도 먹고 황태도 먹고 쥐포도 먹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내 곁에 더 좋은 사람들을 두게 되는 것 같다. 이런 내가 기특해서 미치겠다. 그 자리에서 케익에 초를 꽂고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게, 친구에게 혹여 당혹스럽진 않을까 고민했는데, 고맙다고 말해주어 다행이었고. 나, 고민 많이 했다우, 그래도 되는지. 게다가 스페인에 다녀온 친구가 세상에, 하몽을 가져왔다. 꺅 >.< 내가 스페인을 간다면 그건 하몽 때문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하몽을 먹게 되어, 나는 이제 스페인을 가고 싶은 나라에서 제껴도 되겠다고 했다. 우히히히히. 또한 와인과 책도 선물 받았는데, 아웅, 저 와인은, 엄마한테도 말 안하고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저 와인을 나의 61년산 슈발블랑으로 만들어야지. 혹여라도 나중에 벼랑끝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면, 그때 혼자서 따라 마셔야지. 《사이드웨이》에서 마일스가 그랬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몹시도 힘겨웠다. 와인 두 병과 선물받은 책에 내가 읽으려고 가져온 책까지.. 가방이 지나치게 무거웠는데 거기에 힐까지 신고 있어서 ... 나는 다음날 아침, 종로3가역까지 같이 걷는 친구에게 말했다.
좋은데 힘들어..
내 말에 친구는 웃었다.
사랑에 빠지는 것도 무릇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데 힘든 거.
요즘 내가 내가 아니고 정신이 나가있던 터라, 이 정신을 어떻게 수습할까 하다가 백팔배를 했다. 고소영은 백팔배를 하면 차분해진다고 했는데, 나는 차분해지질 않고 다음날 허벅지 근육만 땡기더라. 역시 나에겐 걷는 게 그나마 차분해지는 지름길이다 싶어 어제는 전날의 과음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굳이 일자산을 찾았다. 올라오고 내려가는 길,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 차분해질거라 믿었건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걸 어떡하지, 이걸 어떡하지, 이걸 어떻게든 터뜨리고 싶은데... 하다가, 오늘 아침 일찍부터 친구를 문자메세지로 불렀다. 내가 이러이러해서 고통스럽고, 그러므로 가슴이 터질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친구의 답에서 나는 위로를 받았다.
- 가슴이 터질것 같아 ㅠㅠ
- 안터져.
아, 안터지는구나. 안터지는 거야.
친구는 내게 말했다. '그동안 피해다닌 결과' 이며 '네 업보' 라고. 나는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이렇게 터지는구나. 잠깐 핑- 눈물이 돌았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나를 '냅둬'라는 친구의 말대로, 그냥 두기로 했다.
이 두 책은, 요즘 읽고 있는데, 표지 분위기가 묘하게 비슷하다. 어쩜 이럴까. 색깔이... 히히.
언제였지. 남동생 차를 타고 남동생이 틀어준 음악을 들으며 집에 가는 길, '야, 친구에서 연인이 되기까지 있냐?' 라고 물었더니 없다며 유튜브에서 찾아 틀어줬었다. 갑자기 그 기억이 새록-
그러고보니 금요일밤, 제부가 보내준 닭강정에 와인을 마시고 그도 모자라 맥주까지 마셔서 취했는데 남동생이 돌아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취한채로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는데, 남동생도 씻고 내 옆에 앉았다. 술을 마실까, 하는 동생에게 아니 그만 먹자 내일 결혼식 가야잖아, 라고 답하고는 그저 조용히 텔레비젼을 보았는데, 남동생에게 그냥 푹- 기대버렸다. 남동생은 내가 기댔는데 저리 꺼지라고 하지 않고(응?) 내가 그런채로 주정하는 걸 들어주었다. 난 역시 얘가 제일 좋아, 라고 생각했던 밤이었다.
나에겐 존재해줘서 고마운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다. 행복하다.
자수를 배워볼까....차분해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