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제목이 소설책의 제목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껏 기대하며 책장을 넘기고자 했을텐데. 그러나 이 책은 '사회학자'의 책이고, 그러므로 이 책의 제목은 어렵다는 느낌, 바로 그것 밖에 더는 주지 않는다. 나와는 거리가 먼, 아주 먼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며칠전 지인들과 만난 술자리에서 이 책을 추천받았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 끝에 나온 추천이었다.
중국 소설을 읽는데 사람들 성격이 너무 까칠하고 뭔가 신경질적이다. 이것은 높은 인구 밀도 탓에서 온 게 아닌가 싶다. 스웨덴 소설을 읽으면서 놀랐던 건, 그들의 인구밀도는 현저히 낮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비리와 잔혹한 범죄와 연쇄 살인과 성폭행들이 우리나라와 똑같이 일어난다는 거다. 인구밀도가 높기 때문에 삶이 빡빡하고, 그래서 범죄 환경이 더 잘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게 아닌가보다.
위와 같이 내가 말하자 지인이 이 책을 추천했던 것.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면 니가 의문을 갖는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거라고 하면서. 그래서 나는 제목도 무시무시한 무려, '무질서의 효용'을 읽으려고 시도한 것이다. 오, 맙소사. 내가, 무질서의, 효용을. 무질서도 효용도, 그 단어 하나씩을 따로 떨어뜨려 놓아도 벅차기만 한데, 심지어 두 단어가 같이 있는 이 책을. 그래서 토요일 대전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 나는 이 책을 펼쳤다.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서문만 읽고 나는 말그대로 뻗어버렸다. 대전까지 가는 내내 잤다. 주말동안 독서와는 먼 시간을 보내고 오늘 출근길 지하철안에서 서문 다음부터를 또 읽어보자 하고 꺼냈다가 또 뻗어버렸다.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아- 내가 궁금해하는 걸 얻어내기 전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아 근데 궁금해 ㅠㅠ 이 책을 읽을 수 있을만큼의 독서력이 내게는 없고, 그렇지만 궁금하고...궁금한데 못읽겠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 신이시여. 나는 이제 어째야 하는겁니까!!!!!!!!!!!!!!!!!!!!!!!!
그러니까, 이런 부분에서 나는 훅- 호기심이 생겼던 거다.
이 책에서 나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하는 어떤 것을 독자들에게 설득하고자 한다. 도시라는 정글, 도시의 광막함과 고독에 긍정적인 인간적 가치가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사실 나는 도시 생활에서 일정한 종류의 무질서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인간이 완전한 성인기로 올라서고, 이 책에서 보여줄 것처럼, 현재와 같은 악의가 없는 폭력이라는 취미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p.22)
그러므로 어떠한 이야기를 펼쳐갈지 궁금한데, 그런데 '악의가 없는 폭력'이란 무얼까? 폭력에 악의가 없을 수 있을까? 습관같은, 반사작용 같은 그런 폭력을 일컫는걸까?
『무질서의 효용』은 내가 스물다섯 살에 쓴 첫 책이다. 이 책은 어떤 시기와 환경, 즉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1960년대 신좌파 New Left (내가 많이 좋아하는 턴레프트님이 생각났습니다. 뿅-)를 배경으로 탄생했지만, 책에 담긴 기본적인 사고는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 책에서 추적한 주체성과 물질적 현실, 개인의 정체성과 도시 환경의 연관성은 오늘날 한층 더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전 세계 사람 대부분이 도시에 살기 때문이다. (서문,p.9)
어젯밤. 갑자기 이것저것 좀 알아보느라 내가 생각한것보다 늦게 잤고 그래서 아침에 일어날 때 무척 힘들었다.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다가-아니, 사실 읽는다고 할 순 없고 그저 '본다'고 할 수 있겠다- 지하철에서 눈을 감았다. 양재역에서 내려 아 안되겠다, 시원한 커피를 한 잔 마시자 싶어서 출근길에 스벅을 들렀다. 어휴, 무질서의 효용이고 뭐고 정신 바짝 차리고 회사 가야지 싶었던거다.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서 기다리는데 마침 이미 와서 주문을 마치고 구석에 앉아있던 J 과장을 만났다. J 과장은 시나몬 롤을 시켰는데 같이 먹자며 앉아도 되겠느냐 물었고, 나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음료를 앞에 두고 시나몬 롤을 함께 먹으며 이야기했다. 시나몬 롤 하니 그 영화가 생각나는데 봤냐, 아 근데 제목이 기억안난다, 시나몬 롤 나오는 영화인데, 라고 내가 말하자 J 과장은 '카모메 식당이요!!' 하는거다. 맞아요, 그거, 하면서 이야기는 무질서의 효용으로까지 이어졌다. 나는 책을 꺼내 보여주며 이런걸 내가 읽으려고 하다니 돌아버릴 것 같다면서. 그리고 말했다. 글쎄 이 책을 저자가 스물다섯 살에 지었대요. 참나원. J 과장은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진다며 놀라고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난 스물다섯에 힙합바지 입고 첫직장 다니고 있었어요.
J 과장과 나는 동시에 빵터졌다. 그렇다. 나는 스물다섯, 직장에서 막내였고, 하하하하, 힙합바지며 박스티를 입고 직장을 다녔던 것이다. 오 마 이 갓. 상상할 수도 없다며 우리는 같이 웃었고 그러다가 시나몬롤 맛있다고 또 꺅꺅거리고. 하핫. 아니 어떻게 스물다섯에 무질서의 효용 같은 책을 썼을까. 스물다섯에 나는 무질서와 효용에 대해서 어떤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데. 스물다섯의 나는 매일 일하고 퇴근하면 술마시고..의 반복이었는데. 그당시 입사동기 남직원과 영어를 같이 공부해보자며 둘이 영어학원을 같이 등록하고서는 하루 같이 나가고 그 뒤로 학원까지 함께가서 늘 동동주를 먹으러 갔는데. 학원비 날렸어..난 그때 알았다. 학원 다니며 공부할 사람이 아니란 것을. 하필 다녀도 그런 사람하고 다녀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커다란 유혹이 되었을까. 학원가자, 그래. 학원에 도착해서는 술마시러 갈까? 그래. 이게 뭐야... 역시 난 안돼. 여튼 내가 그때 학원비며 술값을 마구 써댔던 스물다섯에, 리처드 세넷은 무질서의 효용을 썼다.
나는 천재에게 감탄하는 편이다. 사실 천재에게 쑝쑝 반하고는 한다. 그건 아마도 내가 천재와 거리가 먼, 보통 사람들보다 약간 더 머리가 나쁜 편에 속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천재를 향한 동경에 휩싸여있는...공부를 잘했다거나, 지금도 뭔가 지식을 자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거나, 대화를 나누다가 뭔가 많이 아는 것 같으면, 나는 정말이지 쑝- 가버린다. 멋져...학창시절에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학창시절 공부를 잘한 사람에 대해서도 너무 멋지게 생각된다. 어떻게 그렇게 잘했을까..하고. 내가 그런 사람들을 동경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끌리는 건 내 주변 사람들이 내게 일깨워준거다. 지난주 대전에서 만난 친구도 '너는 지적인 남자한테 끌리잖아' 라고 말했는데, 며칠전 통화한 친구도 내게 '너는 인텔리 남자한테 끌리더라' 하는거다. 오. 나는 친구에게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재이슨 스태덤을 좋아하는데 그건 어떻게 설명할거야! 그러자 그 친구는 말했다.
재이슨 스태덤은 근육 인텔리지.
아!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근육 인텔리. 여튼, 리처드 세넷은 스물 다섯에 무질서의 효용을 써서 나를 지금 현재 이토록 놀래키고 있는데, 아이구야, 멋지다 멋져 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뭐랄까, 나랑 친구하긴 힘들 것 같다. 스물다섯에 무질서의 효용 같은 책을 쓰는 사람도, 아침에 시나몬 롤 먹으며 맛있다고 꺅꺅 거릴 수 있을까? 스물다섯에 무질서의 효용 같은 책을 쓰는 사람도 맥주 마시면 화장실을 너무 자주 가서 불편하다고 생각할까? 스물다섯에 무질서의 효용 같은 책을 쓰는 사람도 복숭아는 과즙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먹어야 된다고 생각할까? 스물다섯에 무질서의 효용 같은 책을 쓰는 사람도 백화점 와인 코너에 가서 할인 크게 하는 와인이 어떤거냐고 물어볼까? 스물다섯에 무질서의 효용 같은 책을 쓰는 사람도 번역안된 외국어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쉬바 빨리 번역본 좀 나오지, 라고 생각할까? 스물다섯에 무질서의 효용 같은 책을 쓰는 사람도 책 오만원어치 채워서 보틀을 받으려고 할까? 스물다섯에 무질서의 효용 같은 책을 쓰는 사람도 체크카드를 쓰는 삶을 살고 싶지만 통장에 언제나 잔고가 없어서 결국 신용카드를 긁는 삶을 살까?
J 과장과 나는 오늘 아침 따뜻한 시나몬 롤에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한참을 수다 떨다가, 아니 그런데 우리 이렇게 웃고 떠들어도 되나요? 하며 시간을 보았다. 아이쿠야. 출근 시간이 오 분 밖에 남지 않았고 우리는 헐레벌떡 자리를 정리했다.
출근시간인데 마치 퇴근한 것처럼 수다떨었네요.
라고 말하고 또다시 깔깔대고 웃고, J 과장은 까페를 나서면서 너무 좋았다고 했다. 이 시간들이 감사하다고. 나도 그렇다고 했다. 만약 J 과장이 싫었다면 커피만 주문하고 얼른 출근했을 거라고, 같이 앉아 시나몬롤을 먹으며 수다를 떨진 않았을 거라고.
내게 오늘 아침은 무질서의 효용과는 거리가 먼, 커피와 시나몬 롤의 효용이었다. 그보다는 수다의 효용일 수도 있었을테고.
그나저나 이 책을 어쩌냐...혹시 포기할까봐 가방에 소설도 한 권 넣어왔더니 에코백인데도 더럽게 무거워...에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