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 둘째조카가 태어났다. 토요일에 조카를 보러가서는 자고 있는 작고 작은 조카를 보았다. 진작에 여동생 집에 가서 첫째 조카를 봐주고 계신 엄마는 갓 태어난 둘째 조카를 보고 아주 잘생겼다고 말씀하셨는데, 눈을 감고 있는 아가를 보고 어떻게 잘생겼다는 걸 알수 있을까? 하하.
점심을 먹으러 남동생과 엄마와 병원 앞 콩나물국밥집에 들렀다. 콩나물국밥 하나와 콩나물오징어찜을 시켜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한 무리의 남자사람손님들이 들어왔다. 여덟명쯤 되어 보였는데, 먼저 들어와있던 사람이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도 했고 종업원에게 여긴 뭘 잘하느냐며 큰 소리로 물어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40대 후반쯤으로 보였던 그들은 아마도 동창회모임 같은걸 하는 중인것 같았다. 모두 자리에 앉고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려 옆으로 갔는데 그들중 한명이 "아가씨" 라고 불렀고, 다른 한 명은 "야, 아가씨가 아닌데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도 실례야" 라면서 자기들끼리 소란스레 웃었다. 아, 싫겠다, 싶어 나도 좀 짜증이 났다. 밥을 다 먹고 나오면서 남동생이 그랬다. 콩나물국밥 집에 와서 여종업원 희롱하다니 참 한심하다, 라고. 나는 남동생에게 그러게, 너는 절대 저렇게 늙지마, 라고 말해주었다.
여종업원은 나랑 비슷하거나 약간 더 나이가 많은듯 보였다. 그들은 아무리 여덟명이었어도 옆 자리에 앉아있던 내게 희롱할 수는 없었을거다. 감히 상상도 못하겠지. 그러나 그녀에겐 그랬다. 나와 그녀 모두 여자사람이었는데, 그녀가 나와 다른 게 있다면 그녀가 그 식당의 '종업원' 이었다는 거다. 지난번에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을 읽고 씁쓸해했던 기억이 났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종업원 이나 점원인 상대를 무시한다고. 자신이 '손님' 이기 때문에 '종업원' 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다고. 그 당연함이 무시를 부른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당연함이 더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도 깨달았다. '당연히' 좋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야말로 독단'일 수 있다는 것을.
거기 보니까 애들 데리고 온 학부형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학부형들한테 애들 오는 데 쫓아오지 말라고, 당신들 때문에 아이들이 이렇다고 그랬어요. 대체 뭘 보려고, 무슨 지적 허영을 부리려고 여기 왔냐고, 오버들 하는 거 아니냐고. 아이한테 인문학 강의를 듣게 해주는 그런 엄마랍시고 다들 뿌듯한 얼굴이더라고요. 오늘도 강의 가서 많이 느꼈는데, 이런 엄마들 위험해요. 학원으로 뺑뺑이 돌리는 엄마보다 이 사람들이 더 무섭다고요. 자기들의 가치관을 주입하는 거예요.
80년대 학번 아줌마들이 대안 교육을 한다는데, 이게 문제예요. 사회는 대안이 없는데, 사회를 바꿔놓고 대안 교육을 시켜야 하는 거잖아요. 대안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사회에 나오면 힘들어해요. 자기가 대안 학교에서 배웠던 걸로는 사회에서 못 살아요. 그래서 그 아이들이 상상마당 강의에 다 들어와요. 제가 대안적인가 봐요.(웃음) 대안 교육이란 게 아이를 가지고 또 하나의 실험을 하는 거예요. 그 아이들 인터뷰하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대안 교육 싫다고 하는 애가 반이에요. 좋아할 것 같지만 싫어해요. 좋아한다는 얘기만 들은 사람들은 침묵하는 애들을 안 봐서 그래요. 저라도 그럴 것 같아요. 어머니의 숭고한 이념을 못 따라가는 것도 있을 테고, 애들이랑 게임하고 놀고 싶은데 산에 들어가서 자연하고만 놀고. 너무 고상한 것만 하잖아요. TV도 보고 싶을 텐데. 대안 교육이 실패한 이유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 이념을 사랑했다는 데 있어요. 형식과 절차, 이념이 다 정해진 엄마들이 무슨 교육을 시켜요? (pp.317-318)
대안교육을 하는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대안교육을 시킨다는 것 만으로도 스스로 뿌듯해하는 걸 간혹 목격하곤 했었다. 세상의 찌든 교육으로부터 벗어나있다는 것, 올바른 교육을 아이들을 위해 시키고 있다는 자신감. 그러나 나는 강신주의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결코 옳은게 아니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맞다. 그건 아이들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기 이념을 사랑하는 거였다. 내 아이에게 이런 교육이 아니라 저런 교육을 시키겠다, 하는것 역시 자기 나름대로의 이념이 정해져있는 게 아닌가. 저것은 무조건 틀렸고 이것이 옳다, 하는.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가치관을 주입하는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아이들은 부모가 만들어준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파트에 사느냐 단독주택에 사느냐, 도시에 사느냐 시골에 사느냐 등을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가 없다. 부모가 여기에서 살면 아이 역시 여기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 환경이 아이를 위해서라는 생각은 오로지 부모의 생각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선택으로 살아가게 된다. 아이가 원하는 게 입시경쟁에 시달리며 친구들과 짬을 내어 편의점에 가서 라면을 사 먹는 거라면, 부모들이 아이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대안학교에 넣고 자연을 벗삼아 친구하게 만드는 것도 강요와 압박이 아닌가.
아, 정말 부모 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어려운 거구나. 생각할 게 많고도 많구나. 무엇이 아이에게 더 좋은지 머리 터지게 고민하는 것보다는 수시로 아이와 대화를 해봐야 하는거겠구나. 엄마는 이렇게 하는게 나을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하는 게 너에게 더 좋다고 생각하니? 하고.
오늘, 일요일 오후엔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밥통엔 오래된 밥이 있어, 나는 야채를 썰고 햄을 썰어넣고 볶음밥을 만들었다. 밀린 빨래를 넣고 세탁기를 돌렸다. 설거지도 해두었고 밥도 새로 해두었다. 이 모든 과정을 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잽싸게 해두고 책을 읽으려던 나의 계획은 지켜지지 못했다. 무슨 볶음밥 하고 밥 하고 빨래하고 하는데 몇 시간씩이 걸리는지. 다 하고나니 배고파서 저녁을 먹을 때가 되었고, 저녁 먹고 멍 때리며 티븨 보니 벌써 지금 시간이 되어버렸다. 아..허무해..허무하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들에 음악이 있었다. 오랜만에 혼자서 감자를 썰면서, 설거지를 하면서, 쌀을 씻으면서, 빨래를 널면서 음악을 들으니 이 모든 과정들이 그럭저럭 괜찮게 느껴졌다. 랜덤으로 나오는 노래들을 듣는데, 그 중 대부분을 따라불렀다. 마침 외출했던 남동생이 돌아왔다 그런 나를 보더니 '누나 즐기고 있네' 라고 말했다. 하하. 그 노래들은 이것이었다.
오늘 오후에 여동생은 아직 부어있는 자신의 손과 갓 태어난 작은 아가의 발 사진을 함께 찍어 내게 보내줬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말랑말랑 하기도 하고.
아, 벌써 열한시가 다 되었다. 어떡하냐. 일요일이 가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