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도 사랑일까 』때문에 이 영화에 통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여기저기서 좋다는 말이 들려와도 나는 이게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을 영화한 것이라고 혼자 제 멋대로 생각해버리고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응?) 그런데 며칠전에 프레이야님께서 이 영화가 알랭 드 보통의 소설과는 상관없음을 우연히 댓글로 적어주셨고 오, 나는 그제서야, 아, 그게 아니었던거였어? 하며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또, 응?) 이 영화가 좋았던만큼 마음의 문을 열게 도와준 프레이야님께 꾸벅 감사드린다.
왜 제목이 '우리도 사랑일까'가 된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영화는 좋다. 초반부터 나는 이 영화가 너무 좋아서 마음이 따뜻해졌는데, 주인공인 '마고'가 유부녀였기 때문일까, 남편과 사이가 다정하면서도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기 때문일까, 나는 이 영화에서 전반적으로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가 생각났고, 특히 이 장면에서는 더했다.
여자는 처음 남자를 만나던 순간, 그리고 그와 자신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걸 알기 시작하면서 남자에게 '나는 결혼했어요' 라고 밝힌다. 남자는 이에 That's too bad 라고 답한다. 여자는 여전히 남편과 잘 지내고 있었고, 그런데 제기랄, 앞집에 사는 이 남자는 자꾸만 자꾸만 보고싶다. 그리고 술을 한 잔 하고 싶다는 그녀와 그는 마티니를 앞에 두고 마주보고 앉는다. 바로 여기서 남자는 여자에게 속삭여준다. 나는 지금 당신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어요. 당신의 눈꺼풀에 살짝 입을 맞췄어요. 당신의 눈꺼풀은 내 입술 밑에서 파르르 떨렸어요. 내 입술로 당신의 입술을 쓰다듬어요. 당신은 결혼한 여자니까 당신에게 키스를 할 수는 없어요. 대신 나는 입술로 당신의 목선을 따라가요....
남자는 말로서 그녀를 갖는다. 남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행동을 그대로 읊으면서 그녀와 관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절정의 순간에 그녀에게 사랑한다 속삭이고, 이 모든 과정은 마티니를 단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일어난다. 끝까지 가고 싶은 마음, 아니, 끝까지 듣고 싶은 마음과 이제 더이상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한다. 나는 그 순간 영화속의 여자가 되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건, 죄책감이 느껴지니까. 그러나 다시 꼼짝않고 앉아있고 싶다. 이건 지독하게 달콤하니까. 나 역시 이 남자를 원하니까.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그러나 상상속에서는 그와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싶으니까. 아, 대체 이 여자는 어떻게 끝까지 듣고 있을 수 있었을까. 아니 대체 어떻게 끝까지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이, 손을 대지 않고 그러나 온전히 서로를 소유하는 이 장면이, 자꾸만 새벽 세시의 레오와 에미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레오가 에미의 실체를 느낄 수 없다고 말했던 바로 그 장면과 함께.
하지만 당신과 미아의 차이가 무엇인지 금세 파악 되더군요. 당신은 감히 자기 피아노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묘사하지 않아요. 피아노가 내 세계와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미아는 저랑 50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 작은 탁자 위로 몸을 숙이고 숟가락에 스파게티를 돌돌 말고 있어요. 미아가 고개를 옆으로 휙 돌리면 공기의 움직임이 느껴지죠. 저는 미아를 보고, 듣고, 만지고, 그녀의 체취를 맡는 것, 이 모든 것을 동시에 할 수 있어요. 미아는 실체예요. 에미는 환상이고요. (PP.218-219)
이 책속의 에미가 이메일로 존재하기 때문에 환상이었다면, 영화속의 마고는 그의 앞에 앉아 있어도 가질 수 없는 환상이다. 그는 상상속에서 그녀와 무슨짓이든 가능했지만, 그녀에게 사랑한다 속삭이는게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남편과 그녀 사이에 끼인 관계다. 그리고 그는, 그걸 견딜 수 없다. 그 상황이 공포스럽다.
여자도 남자를 사랑한다. 그런데 남편에게 도저히 상처를 입힐 수 없다. 그건 못할짓이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에 몸을 움직이려다가 대신 눈물을 흘린다. 그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어요. 그리고 그녀는 나는 지금처럼 남편에게 충실할테니, 우리 30년 뒤에 만나자고 한다. 30년 뒤, 오늘 이 시간 만나서 그때는 키스를 하자고.
그는 그녀를 떠나기로 한다. 그에게는 30년 뒤의 약속이 남아있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집 우편함에 엽서를 넣어두고 떠난다.
2040년 08월 25일 PM02:00
아, 정말이지 이 장면으로 끝났다면 이 영화는 새벽 세시로 끝났을거다. 그러나 복선은 이미 수영장 샤워실에서 깔려있었다. 새것을 갖고 싶다는 한 여자에게 샤워실에서 샤워하던 다른 여자가 '새 것도 헌 것이 된다'고 얘기한다. 새 것을 갖고 싶다던 여자도 이에 응답한다. 네, 헌 것도 예전엔 새 것이었죠. 그래서 이 영화는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라는 완벽한 결말을 뒤로 한 채, 이제 그 소설의 속편인 『일곱 번째 파도』까지 진행된다.
가장 완벽한 결말이 새벽 세시의 결말이라면, 가장 완벽한 사랑은 역시 갖기 전의 사랑이 아닐까. 가장 아름다운 사랑 역시 이루어지기 직전이 아닐까. 그러나 아름다운 결말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30년을 기다려서 그를 만나 키스를 한다면 그 30년 동안의 나의 행복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라앉길 기다리면서 지내다보면 역시나 그 사랑이 사라질까? 30년후의 아름다운 재회를 위해 지금의 남편에게 묵묵히 충실한다면, 그 삶의 틈틈이 30년후에 만나게 될 남자가 끼어들지 않을까. 그가 끼어들때마다 괴로워하고 아파하면서 사는게 나은걸까. 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괴롭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아니, 행복할 것이다, 라고 써야하는 걸까.
영화가 무척 좋았다. 기대 이상이었다. 그가 그녀의 집 우편함에 엽서를 집어넣고 떠나는 장면이 가슴속에 오래 남는다. 그 엽서를 뒤집어 보았을 때 거기에 쓰여져있던 날짜가 마음에 남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말로서 온전히 그녀를 가졌던 남자가 내내 생각난다. 우는 그녀에게 집에 가라고 말했던 남자가 생각난다. 미셸 윌리암스의 가꾸지 않는듯한 머리 모양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나는 보는 내내 내 머리도 저렇게 해야지, 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고나서 친구와 극장을 나서면서, 그러나 내 얼굴이 미셸 윌리암스가 아니라는 걸 인식했다. 미셸 윌리암스가 영화속에서 입었던 옷들도 죄다 마음에 들어서 다 입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입을 만한 사이즈로는 나오지를 않겠지. 게다가 이 영화속에서 가장 특이했던 장면은 미셸 윌리암스가 들고 다니는 가방이다. 맙소사, 그녀는 무려 에코백을 들고 다닌다!! 가죽 가방이 아니다. 명품 브랜드가 아니다. 아, 너무 좋아. 이 여자 짱 멋져!! 친구도 이 영화를 보고 새벽 세시가 생각난다고 했는데, 친구는 미셸 윌리암스의 그 통통한 볼과 소녀다운 싱그러움이 무척 좋다고 했다.
직업이 주는 느낌이란 게 있다. 배관공이 주는 느낌, 정원사가 주는 느낌, 그리고 벌목꾼이 주는 느낌. 나는 그 느낌을 무척 좋아한다. 그 특유의 에로틱함을. 그런데 오늘 이 영화를 보고 하나 더 추가한다. 그래, 이 영화속에서 그녀가 이미 결혼한 여자임에도 사랑에 빠지는 그 남자의 직업은 무려 '인력거꾼' 이었다. 후아- 덥다. 매우 더운 날씨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 그러나 대단히 뜨거운 날이다.
나는 내 인생의 영화 베스트 10 뭐 이런걸 딱히 정해놓은건 아니었지만, 오늘 이 영화가 다른 영화들을 주르르르르르르르륵 제치고 아주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영화 음악도 무척 좋았다. DVD 가 나온다면 사두고서 마티니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취한듯 말했던 남자의 눈동자를 아주 오래오래 들여다보고 싶다.
조조로 이 영화를 보고 친구와 낮술을 하고(쿨럭;;)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렀는데, 아니나다를까, 또 책을 샀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모두 다 내 보관함에 있던 책들. 그중에 '아니 에르노'의 『탐닉』이 있었는데, 오! 이 책이 품절이라 사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오!! 무려 1,000원 이었다!!
좋구나~ 얼쑤~
내가 읽으려고 가져갔던 책 한 권, 씨네큐브에서 조조 영화보고 받은 책 한 권, 중고샵에서 산 책 두 권, 합 네 권을 들고 이번엔 교보문고로 갔는데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금세 나왔다. 이제는 좀 고민할 시간이다. 미셸 윌리암스 같은 헤어스타일을 해 볼것인가, 말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