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때 우리집에 찾아온 외숙모는 내 여동생에게 아이가 영특해보이니 다섯 살이 되면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여동생은 본인도 영어유치원과 영어유치원이 아닌 유치원을 놓고 고민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 틈에 불쑥 끼어들어 영어유치원따위 보내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부모이고 나는 부모가 아니다. 막상 내가 부모가 된다면 나 역시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부모들의 입장에서 보기에 내가 하는 말들은 철 모르는 우스개 소리로 들리지 않을까 싶어 그저 꾹 참았다.
잘 읽는 사람이 잘 쓸 수 있고 잘 듣는 사람이 잘 말할 수 있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거기에 또 하나를 추가하자면, 모국어를 제대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외국어도 제대로 배울 수 있다. 이 생각을 하고 있는중에 내가 읽은 하루키의 에세이는 내게 힘을 준다. 하루키의 생각이 나와 같다. 나는 이래서 정말이지 하루키를 버릴 수가 없다.
분쿄 구 센고쿠에 사는 평범한 주부인 내 처제(서른다섯 살)가 갑자기 영어 회화 학원에 다닌다는 건, 솔직히 말해 그럴 필요성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길거리에서 외국 사람이 뭘 물어보면 어떡해요"라는 게 그녀가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이유인데, 그런 경우를 과연 '필요'라고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정말 분간하기 어렵다. 일본도 세계화되고 있으니 그 정도는 필요하다는 것도 옳은 말이라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쩌다 외국 사람이 길을 물으면 그냥 "I'm sorry. I can't speak English" 하면 되는 일 아닌가 싶다.
그리고 외국 사람이 길을 묻는 일은 삼 년에 한 번꼴도 없지 않나요?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지난 십 년 동안 외국 사람이 내게 길은 물은 적은 고작 한 번이다.)그 때문에 일부러 영어 학원을 다닌다는 것은 시간을 심히 비경제적으로 쓰는 말이 아닐까? 그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인생에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자기 마음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또 지금 유행하는 유아 영어 교실이라는 것도 잘 모르겠더군요. 우리 조카도 그런 데 다니고 "Thank you very much" "You are welcome" 하는 말을 조잘거리는데, 이게 필요한 것일까요? 어렸을 때의 어학 학습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면 또 할 말이 없지만, 평범한 여섯 살 아이가 왜 2개 국어를 해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모국어도 잘 못하는 어린아이가 표층적으로 2개 국어를 좀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몇 번이나 말하지만 재능이 있거나 혹은 필요가 생기면, 굳이 어린이 영어 교실에 다니지 않더라도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영어 회화쯤이야 반드시 할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것은 먼저 나라는 인간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모국어를 통한 진정한 회화가 거기서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어 회화 역시 거기서 시작 된다. (pp.150-151)
물론 2개국어를 할 수 있다는 건 근사한 일이다. 다른 언어를 말할 수 있고 쓸 수 있고 또 읽을 수 있다면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넓고도 다양해진다.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환상적인가. 그러나 그 모든것들이 어릴때부터의 강제적인 교육으로 행해진다는 건 부조리하지 않은가. 내가 원서를 읽고 싶어서, 내가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 내가 외국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배우는 외국어와 어릴때부터 학습되어지는 외국어와는 재미와 효율성면에서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고 싶다면, 원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배우게 될텐데.
일전에 굿모닝팝스의 진행자인 오성식의 인터뷰를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초등생 자녀 둘을 데리고 온 식구가 미국에 어학연수차 갔다고 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영어를 빨리 습득했고 아내는 좀처럼 언어를 습득하지 못했단다. 그러던 어느날 큰 아이와 아내가 싸우는데 어느 시점에서 아이가 영어로만 싸우더라는거다. 그래서 오성식이 아이에게 한국어로 말해, 왜 영어로 말하는거야! 라고 했더니 아이가 '한국어로는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라고 소리를 치더란다. 그래서 오성식은 그길로 내가 뭐하는건가 싶어서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외국어는 내가 하는 공부에 '더하여지는' 공부일 수는 있지만 내가 살면서 반드시 어릴때부터 습득해야할 것은 아니다. 어릴때부터 외국어를 말할 수 있다는건 물론 반짝거리는 재능일 수 있겠지만, 그건 뭔가 정상적인것 같지는 않다. 어긋난 시스템이 가져온 게 아닐까. 어긋난 시스템, 어긋난 환경, 어긋난 욕망.
여기, 어긋난 욕망이 하나 더 있다. 아, 젠장, 어제 밤에 읽는 하루키, 그가 스테이크 얘기를 하다니! 하루키는 깔끔한 식사(?)를 하는 사람이다. 나처럼 고기 매니아라기 보다는 채소와 생선을 즐기는 사람. 그런 그가 스테이크에 대한 욕망에 어쩌다가 시달리곤 한다는거다.
미국의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먹었던 스테이크도 잘 기억하고 있다. 그 스테이크도 값이 무척 쌌다. 저녁나절 길을 걷다가 문득 맥주가 마시고 싶어져 주변에 있는 아담한 바에 들어갔다가 내친김에 식사도 주문했다. 메뉴를 보니 'SURF AND TURF' 라는 게 있었다. 말 그대로 해석하면 '파도와 잔디'가 된다. 뭔 소린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켜보자 싶어 주문했더니, 버터에 구운 큼지막한 새우와 두께가 5센티미터는 됨직한 스테이크에 필래프가 듬뿍, 거기에다 샐러드까지 수북하게 따라 나왔다. 아하, 그래서 '파도와 잔디'로군 했는데, 그 양이 또 엄청났다. 보여드릴 수 없어 안타까운데 도저히 보통사람이 먹어치울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그게 전부 해서 천5백 엔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맛도 내가 좋아하는 심플한 맛, 고기도 부드럽고 신선했다. 딱히 이렇다 할 것 없는 평범한 도시의 바에서 이렇게 흠잡을 데 없는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다니, 미국의 저력이군, 하고 감탄하게 되었다. (pp.158-159)
아, 하루키님. 이런건 사진을 올려주고 위치 정보도 좀 주시죠. 흑흑.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가서 무작정 아담한 바를 찾아다닐 수 없잖습니까. 저렴하고 질 좋은 그 스테이크를 나도 먹고싶단 말입니다. 안되겠다. 스테이크 적금 같은것을 부어서 언젠가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스테이크 기행을 가야겠다. 삼시 세끼를 아담한 바를 찾아 돌아다녀야겠다. 그래서 파도와 잔디를 반드시 맛보고 말리라. 나는 맥주 대신 와인을 시키리라. 맥주는 배불러서 스테이크 먹는데 지장이 좀 있으니까. 안그래도 조지아 주 애틀랜타는 언젠가 한 번 가봐야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곳인데 가야할 이유가 생겼다. 내게 스테이크는 훌륭한 명분.
미국 소설에는 스테이크를 먹는 장면이 흔히 등장하는데, 내가 읽은 장면 중 가장 맛있게 느껴졌던 것은 해들리 체이스의 『미스 블랜디시』서두 부분이다. 소설 자체도 재미있지만, 그와 별개로 이 서두를 읽을 때마다 나는 무조건 확고하게, 반사적으로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진다. 지금 옆에 책이 없어 아쉽게도 인용할 수는 없으나, 이 소설은 아마 한 남자가 어느 시골 마을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가에 있는 허름한 레스토랑에 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될 것이다. 몹시 배가 고픈 남자는 웨이트리스에게 스테이크를 주문한다. 그리고 고기의 굽는 정도와 곁들여 나오는 양파의 상태에 대해서 꼼꼼하게 주문을 덧붙인다. 요리사가 철판에다 스테이크를 굽고, 양파를 볶는다. 양파를 볶는 톡쏘는 냄새가 남자의 식욕을 격하게 자극한다. 남자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음식이 나오기를 꼼짝 않고 기다린다. (p.159)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책을 덮고 급하게 책을 검색한다. 해들리 체이스? 미스 블랜디시? 격하게 읽고 싶다. 번역된 책일까?
우아앗! 있었다. 있다. 나는 이제 한 남자의 식욕을 격하게 자극하는 그런 장면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미리보기로 좀 보고 인용하려고 했더니 처음과 끝을 정하지를 못하겠네. 너무 길다. 하하하핫. 다음번 구매에 이 책을 꼭 넣어야지. 희희.
위는 내 핸드폰에 저장된 스테이크 사진. 하하하하. 언젠가 내앞에 놓여있던 것들. 아, 이제 막 아침 아홉 시를 조금 넘겼을 뿐인데 급격하게 배가 고파진다.
어제는 여동생네 식구와 남동생과 함께 올림픽공원에 갔다. 날이 무척이나 화창해서인지 올림픽공원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조카는 아, 이 사랑스러운 어린아기는, 소리를 지르며 마구 뛰었다. 나와 남동생은 조카의 양옆에서 같이 뛰었다. 잔디를 밟고 소리지르며 뛰는 조카의 모습이 계속 아른거린다. 아른아른.
뭐, 여튼, 나는 지금 회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