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 손에는 아이스커피가 들어있는 텀블러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한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졌다. 동료와 나는 뛰지 않아도 회사 건물과 가까운 곳에 있던터라 어어, 세게 내리겠는데, 하고 빨리 걸었는데, 사람들은 굵은 빗방울에 뛰기 시작했다. 내 뒤에서도 그리고 내 앞에서도 뛰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중 갑작스레 굵은 빗방울을 만났고, 그들의 직장은 지금 있는 곳에서는 아마도 조금 더 가야했던가보다. 갑자기 내리는 빗방울에 뛰는 사람들을 보는데 좀, 신났다. 그 광경이 나는 몹시 유쾌했다. 으앗, 하고 깜짝 놀라며 뛰는 사람들이 모두 황당하다는 듯 웃고 있어서였을까. 나는 그들을 보면서 웃었다.
금요일에는 퇴근하고 여동생 집엘 갔다. 케익에는 초를 꽂고 노래를 부르고 또 훅- 불어 촛불을 꺼야한다는 걸 알고있고 또 꽤 좋아하는 조카를 위해 케익도 사가지고 갔다. 케익을 앞에 두고 기대하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 너무나 밝게 웃는 조카의 모습 때문에 행복해져서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카메라를 준비하는 사이 그 표정이 사라질까 두려워 차마 찍지 못하고 나는 그 짧은 시간동안 조카의 표정을 눈에 담았다. 이 아이가 이렇게 촛불 끄는 걸 좋아한다면, 이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거라면, 나는 평생 이 아이에게 케익을 사주겠다고 불끈 다짐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조카와 아이챌린지라는 학습프로그램을 보았다. 이건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프로그램인 모양인데, 나는 당연히 처음 알고 처음 본 것. 우리가 어릴적에 봤던 뽀뽀뽀 같은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가장 잘 설명이 될 듯 한데, 호랑이 인형을 뒤집어 쓴 사람이 나오고, 학습하는 아이들이 나오고, 젊은 여자 선생님 두 명과 젊은 남자 선생님-그렇다, 남자 선생님이닷!!- 한 명이 나와서 같이 학습하며 율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젊은 남자 선생님을 보는 순간 당황했다. 저 사람...뭐지? 좋아서..하는건가? 유치원 선생님은 여자만 하라는 법은 없는데도 나는 깜짝 놀랐다. 목욕하기를 학습하는데 그 남자 선생님은 남자 아이의 머리를 감겨주었고, 오, 젊었고(다시 강조), 훈남이었으며, 웃고 있었고, 건장한 신체를 가져서, 나는, 반해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나는 그를 검색했고 나이 차이가 나와 얼마 나지 않는다는 아주 기쁜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그게 왜?), 내 삶이 갑자기 희망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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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튼튼아저씨'로 불리고 있었고, 여러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었다고 한다. 오! 나는 새로운 멋진 남자를 (나 혼자)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을 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토요일을 보내고 있었다. 만약 내가, 토요일 오후에 [배트맨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보지 않았다면, 아마 튼튼아저씨 이석우는 아직 내 마음을 잡고 흔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의 흐름은 참으로 오묘하기도 하지. 나는 이제 내가 누구와 결혼하고 싶은지 알게됐다. 재이슨 스태덤, 우리는 그냥 소울메이트로 지내요, 나는 조셉 고든 래빗하고 결혼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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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조셉의 어린 시절을 분명히 기억한다. 그는 영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에서 좋아하는 여자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한채 끙끙대면서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불어를 배워야하는 여자에게 불어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개인 레슨을 해주겠다고 제안하고, 여자는 그와 함께 지내다가 결국은 답답해져서 '대체 언제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할거야!'라고 불어로 소리를 지르고, 그는 이 말을 알아듣지도 못한다. 나는 비앙카(여자)가 결국은 아주 괜찮은 남자를 선택했다는 사실 때문에 무척 흡족했었는데, 그때도 그냥 조셉 고든 래빗은 그저 착하고 순수하게 생긴 소년, 쯤이었는데, 오, 그가, 이렇게 멋진 남자가 되었다니!
『500일의 썸머』보다도, 『50/50』보다도 이 영화에서 나는 그에게 홀딱 반했다.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생겼다. 물론 그는 나의 존재도 모르지만...어쩌면 그가 경찰복을 입고 있어서 그랬을까? 내가...제복을 입은 그에게 반한걸까? 나는 『배트맨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보면서 몇 번이나 흐느낄뻔하고 그래서 아주아주 좋았지만, 조셉 고든 래빗이 거기에 그런 모습으로 있어주어서 더 좋았다. 나는 배트맨을 사랑하지만, 어릴적부터 그를 사랑해왔지만, 나는 배트맨의 여자가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배트맨을 '믿는' 남자의 여자가 될 수는 있지.......................않을까? 아, 나는 이 남자가 너무 좋아서, 이 남자의 눈빛이 좋고 태도가 좋아서, 이 남자라면 두려워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거의 미친게 다름없는 망상에 시달리게 됐다. 그는 아주아주아주아주 좋은 아빠가 되어줄 것 같다. 문제는,
조셉 고든 래빗은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것. 후아-
그래도 삶이 반짝거린다. 지구의 이쪽 저쪽에 괜찮은 남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도저히 삶을 포기할 수가 없고 희망을 저버릴 수가 없다. 내가 싱글인게 무척 만족스럽다. 나는 계속해서 이 남자를 또 저 남자를 좋아해도 되고, 지금 당장 직장을 때려치고 그들중 하나를 만나러 가방을 싸고 떠나도 된다. 남자는 여자의 희망, 이라는 전제는 결코 성립하지 않지만, 어떤 남자는 때때로 어떤 여자의 삶에 희망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앗싸.
『안철수의 생각』을, 『케빈에 대하여』를, 『보이지 않는 사인』을 얘기하려고 했는데, 내가 이 두 남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다. 더워서가 아니라, 남자들 때문에. 유후-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남자가 책보다 좋을때가 분명 있다. '아주 가끔' 이라는게 좀 문제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