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그 노래가 명쾌하고 순수한 만큼이나 철학도 심오하고 믿을 만하다고 알려진 시인이 '자연의 성스러운 계획'을 읊었을 때 어디에 근거를 두고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어떤 사람들은 그 시인에게 물어보고 싶을 것이다. (p.42)
겨우 42페이지에서 이런 문장을 만나면 이 책읽기를 멈춰야 할것인지 계속해야 할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쓰여진 건 한글이로되 그 뜻은 짐작할 수 없음이로다. 인용문의 볼드체 부분은 내가 몇번을 읽어봐도 짜증만 난다. 어지럽다. 그러니까 뜻을 짐작해보자면 그 시인은 노래도 명쾌하고 순수하게 하며 철학도 심오하고 믿을만하게 하고, 그 사실은 알려져 있다, 뭐 그런것 같은데, 하아. 이 책은 민음사 버젼이다. 그러니까 이러면 안되는거다.
새 문학전집을 펴내면서
그러나 새로 작성할 것은 비단 역사만이 아니다. 번역 문학도 마찬가지다.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두시언해」는 조선조 번역 문학의 빛나는 성과이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시대의 두시 번역이 필요하다.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트예프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 (민음사, 새 문학전집을 펴내면서 中)
나는 이 말만 믿고 고전을 대체적으로 민음사판으로 구매하고 있었다. 책장의 세 칸을 내어줬단 말이다. 그런데 저렇게 몇 번을 읽어야만 겨우 알아낼 수 있는 문장이라니, 너무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 문장도 괴상하다.
알코올 냄새가 가득한 그곳은 어머니의 눈에도 테스의 어린 모습과는 슬프게 어울리지 않았다. (p.50)
고전에 있어서만큼 민음사를 편애했기 때문일까. 나는 이런 오타에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름다운 여성은 대개 한여름 새벽에 잠을 전다. (p.235)
잠을 왜 절어...'전다'에는 내가 모르는 다른 뜻이 있는건가? 아니면 한여름 새벽에 잠을 절뚝거리면서 잔다는 의미로 쓴것일까? 42페이지와 50페이지의 문장들을 보고 나는 문학동네판 테스로 갈아탈까 하고 책을 덮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학동네는 테스를 사투리로 번역해놨다고 해서...그건 도무지 내가 용납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읽고 있다. 나는 까다로운 독자가 아니야, 나는 까다로운 독자가 아니야, 자꾸만 되뇌이면서...
이 책은 사실 멈추기에는 아까운 책이다. 굉장히 재미있다. 온 식구의 생계가 테스의 어깨에 달려있는 걸 읽으면서 화딱지가 나고, 고정관념과 잘못된 관습 때문에 어린 아기가 죽어가는 걸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것도 분노하게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 당시의 시대배경을 가지고-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이야기를 진행함에도 불구하고 엄청 빨려들게 만든다. 게다가 오, 지금 읽는 부분은 특히나 더 흥미롭다. 테스가 시련을 겪고 다시 삶을 살고 있는 지금, 그러니까 사랑에 빠져버리고 만 지금, 오, 황홀해서 읽기를 멈추기가 힘이들어.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시대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달라도 똑같은 특징들을 갖게 하는 것 같다. 몇 년 전, 전직장에서 여자동료가 남자동료를 짝사랑해서 그 남자동료에게 커피를 타주기 위해 그 남자 주변 사람들에게도 모두 커피를 타줘야 했었는데, 테스를 사랑하는 이 책 속의 남자는 무려, 테스를 안아서 웅덩이를 건너게 해주기 위해 다른 세명의 여자를 안아서 웅덩이를 건너게 해주는 일을 먼저 해내야 했다. 무려 안아서(!) 건너게 해주는 힘 쓰는 일이라니.
그때 그 여직원도 남직원에게 고백할때 '내가 오빠에게 커피를 타주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커피를 타줘야 했던것을 알고 있나요?' 라고 물었더랬는데, 이 남자도 테스에게 그렇게 묻는다.
"오늘 이 노역의 4분의 3을 치른 것은 전적으로 나머지 4분의 1 때문인 것을 알고 있어요?" (p.260)
아우...........여자 넷을 운반(?) 하다니, 이 남자...힘이 좋구나. 스물 여섯이라 그런가. 한창때인가..여자 넷을 옮기고 심지어 네번째 여자를 옮기면서는 뜨거운 열정을 감추지 못하다니....불끈불끈 하는가보다.
테스와 같이 일하는 세 명의 여자도 모두 이 남자를 좋아한다(아..짜증나..). 그러나 남자는 테스를 사랑한다. 다른 여자들에겐 관심이 전혀 없다. 그 여자들 중에서도 그의 눈은 테스를 좇고 테스와 눈을 마주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미 그가 누구를 가장 좋아하는지 눈치 채고 있다. 어휴...
여러사람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나 역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 앉은 적이 있었다. 이런 일은 언제고 일어날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우리는 다른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으며 그 구성원들의 절반은 남자이고 절반은 여자이니까.. ( ")
이십대 어느날에는 그 사람이 마주 앉아 있는 그 자리가 너무 불편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가 벌떡 일어나서 뛰쳐 나가버렸다. 도무지 심장이 뛰는 소리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다같이 밥을 먹는 자리였는데 그런 마음으로 밥을 먹을 수가 없는거다. 얄궂은 운명은 왜 그 십수명의 사람들 중 우리 둘을 마주 앉게 하는가! 나는 뛰쳐나가서 근처 빌딩의 지하상가로 들어가 혼자 밥을 먹기 위해 앉았는데 이내 다른 동료가 뒤따라왔더랬다. 너 왜이래, 하고.
삼십대 어느날에는 마주 앉은 그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아니다, 이건 너무 소중해서 꼭 끌어안고 있을거다. 그 날, 그 순간 이후로 나는 평생 이 사람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우리중 어느 한 쪽이 손을 놓는다고 해도 다른 한 쪽은 꼭 잡고 있을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자라났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자세를 바꾸어서 그런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꿈꾸는 듯한, 호기심에 찬 시선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다면 얼굴이 짙은 장밋빛으로 변했다가 곧 사라지면서 나중에는 홍조를 띤 흔적만 남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전류처럼 클레어에게 밀려든 흥분은 금세 사라지지 않았다. 결심과 과묵과 신중함과 두려움이 패배한 군대처럼 무너졌다. 그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젖소가 발길질을 하면 쏟아질 수도 있는 곳에 우유 통을 아무렇게나 내려 둔 채 그의 시선을 자극하고 있는 사람에게로 재빨리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끌어 안았다. (p.270)
아..나는 '결심과 과묵과 신중함과 두려움이 패배한 군대처럼 무너졌다.'라는 부분이 정말이지 엄청나게 좋다. 패배한 군대처럼 무너졌대. 아아. 진짜 짱이다. 이건 언제고 기필코 써먹어야지. 패배한 군대처럼, 이라니. 아...
처음 시작이 좀 신경질나긴 했지만 테스는 뒤로 갈수록 아주 재미있다. 1권을 어서 읽고 2권을 읽었으면 좋겠다. 이 고전을 얼른 읽고 싶다. 때로 고전을 읽고 싶어질 때가 있고, 나에겐 지금이 바로 그런 때여서 이 책을 골라 집었다. 내 선택은 오, 틀림이 없어. 잘했다.
그나저나, 기다리던 연휴가 끝나버렸다. 이젠 대체 뭘 기다리면서 살아야 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