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원제는 『Suburban Girl』이다. 대체 낯부끄럽게 왜 『내 남자는 바람둥이』 따위의 제목이 된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재미있다! 게다가 무척 사랑스럽다.
'출판계를 평정하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편집일을 시작한 여자주인공, 편집으로 이미 명성이 자자한 남자주인공. 으윽, 그들의 직업자체가 너무나 흥미로운 소재. 영화의 처음도 연필을 들고 교정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그 장면들부터 이미 이 영화는 나의 마음에 쏙 들었다. 게다가 익숙한 단어들이 툭툭 튀어나와서 즐겁다.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무려 '아치 녹스'(물론 영화속 '아치'의 스펠링은 arch 와 다르지만.). 여자주인공은 식사 자리에서 '이름을 브론테로 바꿀걸 그랬나요?' 라며 브론테님을 언급(응?)한다. 밀란 쿤데라, 단테, 바이런이 그들의 입에서 툭툭 튀어나오고 남자주인공의 친구는 퓰리쳐상을 받기까지 한다. 맙소사. 브라보!
책 속에서 남자는 이미 자신의 이름으로 오래전에 책을 한 번 출판한적이 있다. 여자를 처음 만나 그녀의 호감을 얻고 싶지만, 자신의 책은 흉물스런 책이어서 이미 출판계에서 매장당했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 다음번 만남에서 그녀에게 오래전 자신이 썼던 책을 선물한다. 그리고 그녀는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리고 길을 걸으면서도 그의 책을 읽는다.
내가 쓴 책을 선물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나는 생각해봤다. 물론 상대가 재미있게 읽어주기를 바라겠지만,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또한 그 사람이 책을 아주 잘 읽는 사람이고 자신의 취향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되지 않을까. 그에게 재미있게 읽혀졌으면, 그리고 이 책이 정말 그에게 '좋았으면' 하는 마음.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 내가 써 낸 문장들을 누군가로부터 평가받고 싶은 그 마음, 그건 정말이지 꽤 근사할 것 같다. 설레이면서 초조할 것이고 살짝 두렵기까지 하지 않을까. 어쩌면 나한테 실망할지도 모르니까.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고 남자도 여자를 사랑한다. 남자의 나이가 많아 간혹 사람들에게 아버지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그는 나의 아버지가 아니고 나는 그와 섹스를 하는 사이다, 라고 말한다. 경제력과 능력 그리고 명예까지 모두 갖춘 남자지만, 그러나 그는 알콜중독에 당뇨를 앓고 있다. 그에게는 그녀가 필요하고 그녀에게도 그가 필요하다. 서로는 한 번의 헤어짐 끝에 다시 만나 예전으로 돌아가 잘 지내는 듯 보이지만, 이제 여자는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 스승과 같았음을, 자신은 그에게 제자였음을. 그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녀는 의존적인 성격을 버리지 못할것임을.
나이 들었다고 반드시 성숙한 인격이나 넉넉한 마음을 갖추게 되는것도 아니고, 아직 어리다고 해서 능력이 없고 부족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영화속의 남자처럼 나이들었다면(비록 알콜중독에 당뇨가 있지만), 어떻게 그런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수가 있을까. 과중한 업무로 잠들지 못하는 여자에게 내가 좀 도와줄까, 라고 말하는 남자를(물론 나는 일적으로 그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지만), 여자가 일을 하는 동안 요리를 해주는 남자를, 유머감각이 있는 남자를, 게다가 섹시하기까지 한 남자를, 나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글을 쓴 남자를. 그런 남자로부터 등을 돌려야 내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씁쓸할까. 그를 포기하는 게 가능할까, 그를 포기할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처음, '멜리사 뱅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기에 그 책을 찾아보았다.
맙소사. orz
제목은 왜 저렇고 표지는 또 왜저래. 진짜 읽기 싫게 생겼다. 하이틴을 공략한 소설인가...쓰읍-
[알라딘 책소개]
일과 사랑, 자아 사이에서 방황하는 도시여성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한 소설. 소설은 도시 외곽의 한적한 별장, 시골마을에 어느 날 여덟 살 연상 연인과 찾아온 오빠 헨리의 연애를 지켜보는 열네 살 제인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뉴욕에서 삼십 대가 되기까지, 제인의 심리적 성장을 그녀의 연애사를 통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뉴욕의 잘 나가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 제인 로즈널. 그러나 도무지 시크하고 세련된 뉴요커와는 거리가 멀다, 특히나 연애에 있어서는.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농담("유머는 섹시와는 거리가 멀어") 그리고 조금만 빠져들면 대책 없이 터져버리는 "사랑해요"란 고백, 그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입에 걸리는 미소.
밀고 당기기에 능한 여자들의 사랑방식이 어색하고 서툴기만 한 그녀, 제인의 인생에 세 명의 남자가 다가온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이상형의 남자와 결혼하는 법>이란 책은 그녀에게 이제까지의 연애방식을 완전히 버리고 섹시하고 도도한 여성을 연기하라고 가르치는데…. 2007년에 사라 미셀 겔러, 알렉 볼드윈 주연의 영화 [내 남자는 바람둥이]로 각색되었다.
잠깐 갈등했지만, 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다음번 결제때 구입하기 위해 장바구니에 넣어뒀다. 편집과 작가들에 대해 말을 하고 또 모든게 완벽해 보이는 나이 든 남자가 사실은 부족한 면도 있다는 것도 퍽 마음에 들어서 당장 이 한 권만 사서 읽을까 했지만, 나는 2012년 들어서 한 달에 한 번만 책을 구입하는 걸 꾸준히 유지해 오고 있으므로, 조금만 참았다가 5월달 지름데이에 질러주리라. 너무너무 궁금하다. 그리고 제발 바라건데, 정말 좋은 글이었으면 좋겠다. 멍청하고 유치하지는 말아줘, 제발.
주말에는 여수에 다녀왔다. 집에서 역까지 한 시간, 역에서 여수까지 다섯 시간. 아...진짜 피곤한 길이었어. 친구와 나는 갔다오니 스트레스를 더 받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피곤에 찌들었다. 아니, 나는 늘 그러지 말자고 다짐에 또 다짐을 하면서, 그래도 이번에는 다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책 두 권을 또 가방에 넣은거다. 아..병신 ㅠㅠ 물론 한 권도 다 읽지 못했으며 심지어 다섯 장도 못 읽고 내처 잤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내 코고는 소리에 내가 깼다. 아놔...손에 책 들고 코 고는 여자라니. 예쁘고 지적인 여자가 코를 골다니. 하아- 몹시 부끄러웠지만 괜찮다. 완벽한 여자는 매력이 없으니까. 무릇 매력적인 여자라면 빈틈이 있어야 하는 법. 나의 빈틈은 코고는 것이다. 이를 갈고 잠꼬대를 하지만, 그건 빈틈의 덤 같은 것.
여수의 밤바다를 사진 찍고 싶었지만 너무나 어두워서 사진이 잘 안나오더라. 대신, 여수의 저녁 바다.
여수의 저녁 하늘
그리고 싱싱한 생마늘과 함께한 여수의 소주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자면,
'글을 잘 써서' , '책을 많이 읽어서' 상대를 사랑하게 되지는 않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잘 쓴 글을 읽는것을 좋아하고 즐겨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속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밀란 쿤데라와 함께 찍은 사진이라고 으스댈 수 있었던 것은, 밀란 쿤데라가 어떤 사람인지 여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밀란 쿤데라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백 번 말한들 무슨 소용일까. 이게 얼마나 으쓱한 일인지 도무지 알아줄 수 없는데.
나는 슬픈일이 있을 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보다는, 좋은 일이나 기쁜 일이 있을 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그럴때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더 많이 떠오른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함께 기뻐해주고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주고 또 나로 인해서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내가 밀란 쿤데라랑 사진을 찍는다면 그걸 얼마나 말하고 싶을까. 그 말을 들으며 같이 좋아해주려면 밀란 쿤데라가 작가라는 사실을 아는 남자여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술을 마시고 영화를 볼 수도 있겠지만, 침대에서 홀딱 벗고 뒹굴수도 있겠지만, 그 사이사이 우리가 마이클 샌델의 새로운 책을 살 것인지 말 것인지를 이야기했으면 좋겠고, 줌파 라히리의 새로 번역될 소설을 기다리는 나를 알아줬으면 좋겠고, 내가 모르는 작가의 책을 내게 들이밀며 이 책은 마음의 안정을 찾는걸 도와줄거라고 해줬으면 좋겠다.
만약 영화속의 여자가 나처럼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거라면, 그녀는 그야말로 이상형을 만났던 게 아닐까.
물론 이상형을 만나고 사랑하고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것은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전개되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상형이 반드시 이상적인 상대라는 건 아니니까.
여수에서 돌아오는 기차는 급하게 KTX 로 재예약을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역방행으로 앉아야 했다. 자다 깨고 자다 깨고를 반복하다보니 내 맞은편에 키가 크고 젊은 남자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아이폰의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 언제 탔지? 어디서 탄거지? 나는 잠을 그만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틈틈이 눈을 들어 그를 봤는데, 오,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의 다이어리를 꺼내서 펜을 들고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스케쥴인지 무언지 모를 것을. 나는 내가 현재 누구를 만나든 또 누구를 사랑하든, 그것과는 전혀 별개로 그런 광경앞에서는 정말이지 정신을 놓아버린다. 그냥 반해버린다. 그런 장면들은 정말 근사하니까.
뭐, 반했다해도 나는 잠시 후 다시 자버리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