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나쁘지 않았었다. 남녀관계가 연인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결혼해서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 그 처음에는 그 둘이 만나고 설레이고 알고 싶은 마음들이 분명 존재했다. 그런데 어느틈에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서로에 대한 뜨거움이 사라진걸까. 그리고 왜 그 뜨거운 열정은 다른 상대에게 다시 솟아날까. 억지로 꽉 누르려고 해도 눌러지지도 않고.. 뭐, 이렇게 잠깐 생각하긴 했어도 이 영화는 특별할것도 없고 재미있지도 않다. 의미를 찾을수가 없어..
어쩌면 이렇게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유치할까. 물에 빠진 여자를 구하는 장면을 볼 때는 어처구니가 없어서...하아-
게다가 예쁘고 잘생긴 남자들이 이렇게 우르르 나왔는데 그 중 단 한명도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없다니. 아니, 여자야 그렇다치고 남자는...대체 왜? 돈 많고 싸가지없는 놈도, 돈 없지만 우라지게 밝고 다정한 놈도, 이 영화속에서는 매력이 없다.
오전에 잠깐 사무실 바깥으로 나갈 일이 있었다. 아주 금세 들어올 거여서 핸드폰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었는데, 아아, 어쩌면 좋아, 사무실 앞에 꽃이 활짝 핀거다. 여긴 이렇게 봄만 되면 나를 들뜨게 해. 나는 다시 사무실로 올라가서 핸드폰을 가지고 우당탕탕 뛰어 내려왔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도무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이 꽃을 보는 순간 기분이 막 좋아졌다. 날씨도 좋고 꽃도 예쁘고. 기분이 팔랑팔랑 좋아져서, 문자메세지와 핸드폰 메신저로 친구들에게 이 꽃사진을 보냈다. 그 친구들 중에 한 명과 잠깐 대화를 했는데, 자신이 책을 여러권 샀는데 그 중에 한 권이 좀 불안하다면서 다락방님을 먼저 읽혀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하는거다. 아 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완전 빵터져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책을 검색했는데 오, 괜찮을 것 같은거다. 친구는 내게 그 책을 쏴줘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오케이라고 했다. 먼저 읽어보겠다고. ㅎㅎㅎㅎ 먼저 읽혀볼까 하는 생각이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난 진짜 이 남자사람 완전 짱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친구가 산 그 책이 좀 불안했기 때문에, 나는 갑자기 책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하핫.
어제는 시집을 두 권 선물받았다. 프레이야님 서재에서 보고 완전 훅 간 시, 그 시가 들어있는 시집. 시집을 선물 받는 건 정말 근사하다. 굉장히 멋진 여자가 된 기분이랄까. 낭만을 아는 여자가 된 기분.
내가 훅 간 시는 바로 이 시.
반가사유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겁으로 원피스 차려입은 여자와
현실도 미래도 종말도 아무런 희망 아닌 여자와
외항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와
가끔은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영화 보러 가는 여자와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 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와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와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와
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
아. 정말 좋다. 이 시집을 받아들고 이 시를 제일 먼저 펼쳐 다시 읽었는데, 역시나 좋다. 특히, 꽃이 피면 꽃이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 이 부분이 정말이지 벅찰정도로 좋다. 꽃이 피었다고 낮술 마시다니, 아, 나도 이거 진짜 잘 할수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화창하게 꽃이 핀 이 때, 사무실에 앉아 있는가....꽃이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라니, 시집을 선물 받는 여자 뺨치게 근사하다. 멋져. 흑흑.
그리고 이런 시도 있다. 낯설지 않은, 익숙한, 뼈다귀 해장국이 등장하는 시.
너무 아픈 사랑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모텔과 뼈다귀 해장국은 정말이지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이토록 완벽한 궁합이라니. 게다가 반드시 모텔에서 '나와' 가야 한다. 모텔에 들어가기 전에 뼈다귀 해장국집을 들어가서는 안된다. 그건 이 세계의 불문율 같은것이다. 이 세계란 어떤 세계? 모텔과 뼈다귀 해장국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세계. 캬~ 낮술이나 마시고 싶다. 소주잔에 소주 가득 따라 붓고, 그 마알간 소주 위로 철쭉 꽃잎 하나 떨어뜨려서,
라고 하면 독주가 되니까 진달래 꽃잎을 떨어뜨려서.
시도 좋고, 친구도 좋고, 꽃도 좋고, 날씨도 좋은 오늘! 점심 메뉴는 무려 이것.
그래, 나 점심에 삼겹살 먹는 여자다. 상추에 깻잎을 얹고 파절이와 양파를 얹고 그리고 그 위에 뜨겁게 구워진 삼겹살을 하나 얹었다. 이걸로 다일 순 없지. 생마늘을 쌈장에 푹- 찍어 마지막으로 고기 위에 얹었다. 쌈은 아주 커졌지만 나는 입을 그보다 더 크게 벌리고 그 쌈을 다 넣는다. 으음, 하는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 낮술 마실 수 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