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래'의 『영원한 이방인』은 내가 원하는 모든것을 갖춘 작품인 듯하다. 아내와 남편이 '가정부 아줌마'로 인해 말다툼을 하는 장면은 어쩌면 이토록 섬세하게 표현되었을까 감탄할 정도이다. 아직 절반정도 밖에 읽지 못했는데, 이 책을 사랑할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좋은 텍스트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것 자체는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다. 처음부터 몇몇 문장들이 콕 집어 말할수는 없게끔 부자연스러워서 약간 신경이 곤두서있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나는 80페이지에서 급기야 이런 문장을 만난다.
작년에 레이저 수술을 해서 고쳤는데, 아직 임신은 안했어. 남자가 코를 곯아서 각 방을 쓰지. 그리고 기타 항목들. 두 사람은 모로코로 신혼여행을 갔어. 보통은 외식을 하지. 함께 식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여자는 고등학교 때는 배구에서 학교 머리글자를 상으로 받아 달고 다녔지. 능력 있는 세터였어. (p.80)
여자는 고등학교 때는 배구에서 학교 머리글자를 상으로 받아 달고 다녔지, 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이게 대체 뭔말인가 싶어서 천천히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배구는 내가 아는 배구가 맞나? 뒤의 세터를 보니 내가 아는 그 배구가 맞는것 같은데. 이 문장은 대체 말이 되는 문장인가 싶어 몇번이나 다시 읽었는데도 도무지 말이 안되는게 아닌가. 물론 뜻은 알겠다. 여자는 고등학교때 배구를 잘해서 학교로부터 상을 받았다, 는 내용일 것 같다. 그게 아니면 대체 뭐겠는가. 그런데 문장상으로 보면 배구가 상을준거다. 배구로부터, 배구가 원인이 된 게 아니라 배구에서 상을 받은거고, 아이쿠야, 이게 뭐야, 게다가 학교 머리글자를 상으로 받았다는데, 학교 머리글자를 대체 어떻게 상으로 받았단 말일까? 뱃지로? 브로치로? 아니면 학교 머리글자를 종이에 쓴뒤 오려서? 이 문장이 너무 짜증이 나서 친구에게 대체 머리글자를 어떻게 받았다는 말일까, 했더니 친구는 학교 간판을 떼준것 같다고 했다. 하하하하. 그런데 그걸 달고 다녔단다. 그러니까, 뭘 받아서 어디에 달고 다닌건데? 머리글자를 대체 어떻게 상으로 받은거냐고. 후아-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더 읽을까 말까 망설였다. 잠깐 고민하다가 계속 읽고 있는데 이런 어색한 문장들만 아니면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 될것 같다.
보통의 나는 번역문에 길들여져 있어서 직역한 문장들에 대해서도 큰 어려움없이, 크게 이상하다는 생각없이 잘 읽어낸다고 생각한다. 번역문에 길들여져 있어서 내가 쓰는 글도 번역문 같을거라고 나는 나름대로 짐작한다.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나는 번역문에 대해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간혹 이렇게 신경질과 짜증을 나게 하는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이건 번역체의 문제가 아니라 문장 자체가 너무 엉망이라 뭐 어떻게 넘어가기가 짜증나는 것이다. 책 자체의 내용이 별 거 아니라면 글쎄, 그냥 패쓰했을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도 안되는 문장은 정말 유감스럽지 않은가.
아니면 원문에서도 문장은 저것과 똑같은걸까? 그러니까, 머리글자를 무언가 상으로 주고 어딘가에 달고 다니는 것은 미국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어떤 관습, 문화 인건가? 굳이 쓸 필요는 없는? 그렇다해도 문장 자체가 이상하긴 하잖아?
어제 경향신문에서 목수정의 칼럼을 읽었다. 제목은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 였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4102111115&code=990000
본문중에 목수정이 삽입한 '조에 레오나르드'의 텍스트가 몹시 마음에 들어서 인용해 보겠다.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 나는 그가 에이즈에 걸렸고, 국무총리는 의료보험도 안 되는 동성애자이며, 백혈병을 피할 수 없는 오염된 쓰레기들이 바닥에 뒹구는 어딘가에서 자란 인간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 나라 대통령이 16살 때 낙태를 했으며, 마지막 애인은 에이즈로 죽었고, 눈을 감으면 자기 품에서 죽어간 애인의 모습이 늘 떠오르는 그런 여자였으면 좋겠다. 나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냉난방이 안 되는 집에서 살았고, 병원에 가기 위해, 가족생활보조연금을 타기 위해, 고용안정센터에서 구직을 하기 위해 줄을 섰던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실업자였고, 해고당했었고, 성적으로 학대당한 적이 있으며,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쫓겨난 적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가 어느 후미진 골목에서 밤을 새운 적이 있고, 강간에서 살아남은 자였으면 좋겠다. 누군가와 지독한 사랑에 빠졌었고, 상처 입었으며, 많은 실수를 저질렀으나 거기서 교훈을 얻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 나라 대통령이 흑인 여자이면 좋겠다. 그가 썩은 이빨들을 가졌으면 좋겠고, 병원에서 나오는 맛없는 식사를 먹어본 사람이면 좋겠다. 그가 마약을 경험해 보았고, 시민 불복종을 실천해 본 사람이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왜 내가 요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지 알고 싶다. 왜 사람들은 우리로 하여금 대통령은 언제나 꼭두각시이며, 창녀의 고객이며, 결코 창녀 자신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믿게 한 건지 알고 싶다. 왜 그는 항상 사장이며 결코 노동자일 수는 없는 건지, 왜 그는 언제나 거짓말쟁이며, 언제나 도둑이고, 결코 처벌되지는 않는 건지 알고 싶다.”
나는 왜 가난한 우리 아빠가 가난하지 않은 사람을 지도자로 뽑으려는지 잘 모르겠고, 나는 왜 대학을 나오지 않은 우리 엄마가 반드시 많이 배운 사람에게 권력을 주려는지 잘 모르겠다. 그건 아마도 그들에 대한 '기대' 때문일거라고 혼자 짐작은 해본다. 내가 가지지 못한것을 가졌고 내가 배우지 못한것을 배웠으니 그들이 아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것이라는 희망. 우리 부모의 조건은 우리 부모 세대 대부분의 조건일테고 또 그들의 희망과 기대는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 수없이 아니라는 걸 보아왔으면서도 그들은 실망하는 법이 없다. 매번 절망하고 그러면서도 매번 같은 선택을 한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건지도 모르겠다. 틀렸다는 것을 더 젊은세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걸지도 모르겠다고. 대한민국 대부분을 채운 빨간 색깔이 유감이다.
강남역에서 내려 회사를 향해 걸어오는데 벚꽃나무들이 이제야 꿈틀대는 것 같다. 그래도 때가 되니까 너희들이 피기는 피는구나, 생각하다가 나는 몇년전의 회사 동료를 떠올렸다. 그가 근무한 기간은 2개월 남짓이었는데, 그는 어느날 내게 이메일 주소가 자신이 알고 있는게 맞는지 물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이메일 주소를 알아낸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주소는 내 주소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당황하더니 그러면 메일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알려줬고, 잠시후에 그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이메일을 확인해보니 거기에는 내 책상의 마지막 서랍을 열어보라고 적혀있었다. 당시 사무실은 지금과는 달라 파티션이 없이 모두에게 오픈되어 있었는데, 내가 지금 이 메일을 읽고 서랍을 열고 거기에서 뭔가 발견하게 된다면,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좀 난감했다. 그래도 궁금함을 참지 못해 서랍을 열었고, 거기에서 시디 한 장을 발견했다. 나는 다시 조용히 서랍을 닫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내게 이메일을 확인했냐고 물었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렇다고 답하고 그를 무시했다. 그리고 퇴근무렵 시디를 꺼내서 가방에 챙겨넣었고, 지하철 안에서 홀로 꺼내본 시디에는 메모가 담겨 있었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메세지였던가, 그때가 내 생일무렵이었던가, 그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직원은 자신이 이 시디를 주었다는 것을 다른 여직원들에게는 비밀로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내게 이 시디를 주는것은 '락방씨는 다르기 때문' 이라고 했다. 그 시디는 그가 좋아하는 여러곡을 담아놓은 시디였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시디에 담긴 곡들중에 아바의 노래 한 곡밖에는 기억이 나질 않고, 그 시디가 어디에 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고(버리진 않았겠지 설마), 그의 이름도 기억 나지 않는다. 오늘 벚꽃이 피려는 출근길에서 갑자기 그 일이 생각났고, 그로부터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났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엊그제 저녁부터 목구멍이 너무 아파서 어제는 병원엘 갔다. 열이 나는것도 아니고 기침을 하는것도 아닌데 목구멍만 아팠다. 닥터는 내 목구멍을 들여다보더니 원래 편도가 있는데 염증이 생겼다고 했다. 그래서 약을 처방해주겠다고. 나는 알겠다고 하며 처방전을 받아들고 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왔다. 편도가 부어 병원에 간것은 엄청나게 오랜만인데, 그 전에는 병원에 가면 닥터들은 항상 내게 잘 먹고 잘 쉬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어제 간 병원의 닥터는 내게 잘 먹으란 말을 해주질 않았다. 아, 유감스러워. 닥터들이 병원에서 내게 잘 먹으라고 말해주는 것은, 내가 집에 돌아와 지금보다 더 잘 먹는 것의 합당한 이유가 되어주었는데...왜 잘 먹으라고 해주질 않은거지? 나는 그게 너무 속상했다. 누군가 내게 왜그렇게 잘 먹느냐고 혹은 많이 먹느냐고 물으면 '닥터가 잘 먹어야 빨리 낫는대'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젠장.
도처에 유감 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