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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책마을을 가다 -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걷고 싶은 동네
정진국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그림이나 사진이 많이 들어가있는 책을 좋아하질 않는다. 블로그의 글들을 묶어서 책으로 만드는 것도 역시 좋아하질 않는다. 연예인들의 에세이를 좋아하질 않고 여행기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 책들의 대부분이 사진들이 수두룩한 가운데(특히 연예인 사진들 수두룩하면 돌아버릴 지경이 되어버림..orz), 글은 지독하게 짧고 감상에만 치우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사놓고 한동안 읽지를 못했다. 몇 년전, 신문의 신간코너에서 보고 보관함에 넣어둔지 오래였는데도 섣불리 구입하지 못했던 이유와 마찬가지, 책마을 여행기라면 사진만 가득하고 글은 별로일 것이니 다 읽지 못할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오!! 달랐다.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이 책속에 가득한 사진은 연예인의 얼굴도 아니고(만세!), 내가 그다지 감흥을 얻지 못하는 자연 풍경도 아니었다. 꺄울. 이 책속에는 책과 책이 있는 풍경과 거리,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들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맙소사.
유럽 여러나라의 책마을을 작가는 찾아다니면서 글을 썼다. 그 중에는 이렇게 책 마을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문구를 벽에 적어둔 곳도 있고 (빅토르 위고의 문장-책에는 뜻이 있었던 것 같은데 미처 메모해오지 못했음),
부엌에도 책을 가득 꽂아둔 곳도 있었으며, 책을 어지러이 꽂아둔 곳도 있었다. 와...좋아 ㅠㅠ 어딜 펼쳐도 책 사진들이 가득해서 마음이 흡족해진다. 바깥에 마련해둔 곳도 있다. 와-
이런 곳이라면 한번쯤 들러보아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 『사이드웨이』에서 마일스는 친구와 함께 포도농장을 돌아다니면서 와인을 시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영화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떠오르면서 나도 한적하게 영국과 벨기에로 프랑스와 독일의 책마을을 돌아다니며 이 책 저 책을 한번씩 들추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슬렁 어슬렁. 때로는 책마을에 마련된 유일한 숙박업소에 머무르기도 하면서.
잠시 포르투갈에 들러 프란세시냐를 먹어도 좋을테지.(응?)
게다가 책을 읽는 사람들, 내가 그 사람들을 대체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단 말인가. 아이도 엄마도 그리고 길을 지나던 양복입은 직장인도 책을 고르고, 책을 읽는 사진들이 이 책 속에 있다.
서점 앞에서 책을 읽는 주황색 옷을 입은 꼬마, 기차안에서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엄마, 서점 앞에 멈추어 서서 책을 고르는 직장인. 아- 너무나 근사하지 않은가! 물론 가장 근사한 사진은 바로 이 사진이다. 책을 읽는 청년!
머리는 좀 벗겨진 것 같지만...아저씨가 아니라 청년이라고 해야 어쩐지 로망실현...이 되니까.....( '') 기차안에서 홀로 앉아 책을 읽는 남자사람이라니. 아, 진짜 멋있잖아. 나는 기차를 탈 일이 가끔 있어서 늘 책을 챙겨가곤 하는데, 내가 연출하고 싶은 장면도 바로 위와 같은 장면이다. 와, 책을 읽는 여자사람이라니, 근사하다! 하는 그런 생각을 내 주변의 승객들에게 보여주고 싶단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잔인한 법. 기차만 탔다하면 나는 잠이 쏟아져서..책을 두 권씩 챙겨가지만 두 장도 채 읽지 못한채로 그대로 가지고 오기 일쑤다. 위의 책을 읽는 남자사람의 사진을 보노라니 영어공부를 해야겠다는 욕망이 또 잠시 쳐들어온다. 곧 사라지겠지, 그러겠지.
물론 책을 '읽기만' 하는 사람들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책 사이를 마구 활보하는 아이의 사진도 있다.
가운데, 자전거를 타고 책장 사이를 누비는 꼬마. 하하하하하.
그러나 이 책이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 작가가 관심을 가진 책은 내 관심과는 달라서 나는 그가 흥미를 느끼는 책에 그다지 흥미가 느껴지질 않았다. 작가는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깊어서 그런 책들을 발견할 때마다 흥분하곤 했는데, 나는 그 책들을 발견한 순간들의 흥분에 대해서는 짐작하고도 남지만, 그 책들에 같이 흥분하게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때로 그의 글을 읽는것은 지루하게 여겨졌다. 소설 얘기도 좀 해주지, 내가 아는 작가의 얘기도 좀 해주지 싶었던거다. 유럽의 책 마을이 애초에 신간을 위주로 파는 서점이 아닌만큼 소설은 없는건지, 아니면 소설도 역시 마찬가지로 가득가득하지만 작가가 흥미를 느낀 분야가 아니어서 별로 언급이 없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다 읽기'는 내게 쉽지 않았다. 이토록 내 마음을 끄는 사진들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아, 중간에 그가 프랑스에서 만난 청년이 그에게 이승우의 소설을 읽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작가는 이승우의 작품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그 부분을 읽는데 나는 갑자기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갔다. 후훗, 나는 읽었는데! 그 청년은 내가 만났어야 되는데. 국제결혼 한번 해줘야 되는데. 그러면 멋지게 페이퍼도 쓸 수 있었을 텐데. 이승우가 연결시켜준 프랑스 청년, 이라는 제목으로. 이국땅의 청년과 사랑하고 연애하는 과정을 멋지게 내가 글로 쓸 수도 있었을텐데! 아, 그런데 내가 불어를 못하니까 이승우라는 단어만 알아듣고 그저 땅만 쳤으려나.....
이곳 사람들에게 보트를 타고 스카제락 해협을 가로질러 한 권의 책을 찾아 이 항구에 상륙하는 일은 그저 소박한 일상이다. 곳곳에서 여개선이 운항하고 있다. 더 그럴싸한 것은 자기 보트를 몰고 이곳으로 올라온 다음, 곧장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갑판에 누워 절인 대구포나 고래포를 씹으며 독서를 즐길 수도 있다. 아니면 주말을 앞 섬 민박집에서 책과 함께 뒹굴든가 ‥‥‥(pp.217-218)
아, 어느 나라였는지 메모를 안해두었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보트를 타고 책을 읽는것은 안하겠지만, 민박집에서 책과 함께 뒹구는 며칠쯤은 보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가장 큰 생각은 고래포 에 있었다. 고래로 포를 만든다고? 얼마전에 읽은 '존 코널리'의 소설 『모든 죽은 것』에서는 악어튀김을 먹었다는 얘기가 나와서 이게 작가의 장난인지 실제로 악어튀김이 존재하는지 몰라서 구글로 검색을 했었다. 악어 튀김은 정말 존재하더라! 악어 튀김이라니! 그런데 이번엔 고래포란다. 고래포.. 검색해봤지만 고래포의 이미지는 찾을 수 없었다. 아 궁금한데..
책은 이래서 좋다. 내가 알지도 못했던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음식들의 존재를 내게 알려준다. 내가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악어 튀김을 어떻게 알 것이며 고래포를 어떻게 알 것인가. 아, 그건그렇고,
사진이 가득한 이 책을 나는 책장에 얌전히 꽂아둘 것이다. 이 책 속의 사진들을 나는 수시로 보고 싶어지게 될 것 같다. 그럴때마다 꺼내볼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의 사진도 함께. 그 사진들을 보는 순간 나는 한결 여유로워질 것 같다.
(소근소근- 그런데 지금 이 책, 반값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