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는 글을 잘 쓰시는 분이 너무나 많다. 나는 그들중 누구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알라딘 서재로 들어가 최신 서재글로 올려진 글들을 모조리 다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글을 잘 써내시는 분들이 존재한다는 걸 뒤늦게 발견하고 즐겨찾기서재로 추가하면서 어휴, 뭐하다가 이제야 이분을 알아본거야, 싶어지는 그런 때가 있다. 오늘이 그랬다. 예전부터 가끔 들러 글이 좋다고 감탄하던 서재였는데 즐찾등록이 안되어 있는게 아닌가! 맙소사. 나는 부랴부랴 넷북을 키고 그 분을 즐찾 추가했다. 아, 두근두근해....
기다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작가의 신작이 나왔고, 그걸 보자마자 너무 반가워하는 날 보면서 아, 나는 이 작가의 글을 기다렸구나, 라고 생각했다.
『사랑스런 별장지기』는 별다를 거 없는 뻔한 로맨스였다. 격정적인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듯 했으나 딱히 인상적이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로맨스 소설' 쯤이었는데, 그 후에 나온 그녀의 소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달랐다. 작가는 더 성숙해진 듯 보였고, 무엇보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게 무엇인지를 이제서야 찾아냈다는 느낌을 줬다. 현실속에 살아있는 생생한 인물들과 에피소드로 푹 빨려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래서 내 주변에 이건 피디가 있을 것 같았고 공진솔이 있을 것 같았다. 인사동의 찻집도 거기 그대로 있을것 같았고 애리는 긴 치마를 나풀거리며 차를 내어줄 것 같았다. 게다가 공진솔, 이 여자. 그 힘들다는 사랑 고백도 해내고 또 가슴 아파하다가 뒤로 물러서고 도망치는 것이, 나랑 크게 다를 바도 없잖은가!
작가는 이번 작품 『잠옷을 입으렴』으로 자신이 쓸 수 있는 소설이 비단 로맨스라는 장르 뿐만은 아님을 드러냈다. 아주 잘. 게다가 꽤 편안해 보인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심했을지 몰라도, 또 쓰는 내내 머리를 쥐어 뜯었을지는 몰라도, 일단 이 작품은 아주 편안하게 읽힌다. 게다가 어떻게 한건지 모르겠지만 작품에 전반적으로 애틋하고 아련한 마음이 느껴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마음이 들게 할 수 있다니, 이것은 이 작가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작품을 그 전 작품,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처럼 좋아하지는 못할 것 같다. 정말 유감스럽게도, 글은 잘 썼다고 느껴지지만, 캐릭터가 마음에 안드는거다. 이야기를 하는 주인공 '고둘녕'이 참 못마땅하다. 하아- 중간즈음부터 마음에 안들기 시작하더니 그 뒤로는 뭘 해도 별로 좋아지지가 않는거다. 내가 뭐 딱히 좋아할 필요가 없긴하지만, 주인공에 대한 애정이 없고 주변인물들 중에도 마음에 드는 인물 하나 없다보니 이 소설은 내게 힘을 잃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책이라는 생각은 들어서, 나는 회사동료에게도 빌려줄 생각인데, 내가 좋아할 만한 캐릭터들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질 않았다. 내 책장에 꽂힐 이도우의 책은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단 한 권이면 될 것 같다.
물론 이 책의 곳곳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들을 찾아낼 수 있다.
"스물여섯 살 때였어요. 마을에 그 아가씨 집이 있었는데 한겨울엔 얼마나 추운지 모든 게 얼어붙어요. 그해 겨울엔 유난히 더 추워서 말을 하면 입에서 말이 나오자마자 얼어붙었죠. 얼음알갱이처럼."
"‥‥‥말이 얼었다고요?"
"네, 너무 추우니까요."
나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쌀쌀하게 말했다.
"장난치는 거군요."
산호는 짐짓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안 믿네요. 그럼 얘기하지 마요?"
"계속해 봐요."
"마을 사람들은 겨울 동안엔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요. 다 얼어붙어서 허공에 떠도니까. 봄이 오면 비로소 말이 녹아 뒤늦게 들려오죠."
그의 목소리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나직해졌다.
"한동안 고향에 다녀왔더니 아가씨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어요. 산 아래 사는 부유하고 나이 많은 남자였죠. 결혼하던 날 집을 떠나면서 내게 전해달라며 무슨 말을 했대요. 내가 갔을 땐 한 발 늦어서 난 가족들한테서 그 얼음알갱이만 받아들고 왔어요."
나는 아마도 그 다음 이야기를 안다.
"봄이 되니까 말이 녹았어요. 내 귀에 메아리처럼 쟁쟁히 울렸어요. 슬프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무슨 말이었는데요."
"‥비밀."
"하지만 난 알 것 같네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렇죠?"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맞아요." (pp.94-96)
이 이야기는 책 속에서 둘녕의 삼촌이 둘녕에게 들려준 이야기인데, 둘녕이와 이웃에 사는 남자인 산호가 이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듯 해준다. 이 이야기가 원래 있었는데 책 속에 들어간건지 혹은 작가의 순수한 상상에서 나온건지는 모르겠지만 날이 추워 말들이 얼어붙어버린다니, 나는 잠시 멍한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얼음알갱이들이 녹는 순간 그 말이 전해지다니. 맙소사. 얼어붙어 버린 모든 말들이 녹게 되어 상대에게 전해질때는 그것이 어떤 말이든 그 타이밍이 맞질 않아 가슴이 아플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혹은 미워한다는 말도 상대에게 '녹아서' 전해졌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내 삶이 있고 내 미래가 있는데 언제고 얼음알갱이들이 녹아버리기만을 기다리며 살 수는 없잖아. 너무 늦게 전해지는 말들은 그저 너무 늦었을 뿐, 그 뿐이 아닌가. 어제인 토요일 오후, 잠시 외출을 했었는데 3월 24일이라는 시간과는 동떨어진 느낌으로, 오, 눈이 왔다. 바람이 세게 불었고 눈발이 날렸다. 나는 손이 시려웠다. 이거봐, 한 겨울 뿐만 아니라 시간상 봄인 계절에도 눈이 오고 바람이 불 만큼 추운데, 얼어버린 말들이 채 녹기도 전에 더 단단히 얼어버릴지도 모르는데, 왜 추울때 굳이 그 말을 하는거야. 너무 늦어, 상황은 돌이킬 수 없어진다고. 상대에게 진심으로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얼어버리기 전에, 그 전에 해야한다고!
엊그제였나, 새벽까지 여동생과 잠을 자지 않고 수다를 떨면서 텔레비젼을 봤다. 우리는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을 봤고,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봤고, 『야성녀 아이비2』(응?)를 봤다. 사랑과 전쟁의 소제목은 '마녀사냥' 이었는데, 한 여자가 '부족한 것 없이 예쁘고 능력이 있어서' 마녀로 몰리는 과정을 보여줬다. 여자는 자신보다 먼저 입사한 사람보다 더 빠른 진급을 할 정도로 능력이 있고, 성격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예쁘다. 다른 부하직원들로부터 롤모델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같은 부서의 부장의 내연녀라는 말도 안되는 오해를 받게 되고, 그 일은 소문이 되어 회사내에 떠돌아 회사내에서는 그녀 보기를 벌레보듯 한다. 그전까지는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는데. 이에 그녀는 자신은 잘못한 게 없으니 당당하게 회사에 출근하기로 마음먹고 그 시선들을 참아내며 화장실에서 울고,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회사를 그만두기를 권한다. 여자에겐 이 점이 아마도 가장 못마땅했으리라. 누구보다 자신의 편이 되어주어야 할 남편이, 네 행실이 올바르지 못하니 그런 오해를 받는것 아니냐, 는 말을 하는것. 게다가 니가 너무 잘나서 내 앞에서 나를 가로막는다, 라고 말한다. 아, 내가 여자였다면 이런 남편은 발로 뻥 까버리고 싶었을것 같다. 너 미친거 아니야? 왜 사람들에게 내 아내는 잘못한게 없는데 괜한 오해를 당한거라고 해명하지는 못할망정 네 행실이 잘못됐으니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아내를 비난하는거지? 누구보다 아내의 편이 되어주어야 할 남편이? 그리고 그녀는 왜 그런 남자와 결혼했을까? 모두가 나를 비난할때(그것도 잘못된 소문으로!), 같이 나를 비난하는 그런 남자와, 대체 왜 결혼한걸까? 결혼해서 살면서 이런일이 있기전까지, 그 남자는 최상의 남편이었던걸까? 아마 자신이 가장 허탈한게 그부분 아닐까? 내가 사랑한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고 한 남자가 이런 상황에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아, 난 견딜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런 상황은.
"내가 어떻게 사는지가 궁금했어요? 다 잊고 행복한지, 아직도 못 잊고 괴로운지 그게 알고 싶어서? 그런데 보다시피 잘 살아요. 일도 하고, 집도 있고, 가게도 있고."
"하지만 친구도 없고, 외로워 보이고, 밤이면 몽유병으로 돌아다니죠." (p.305)
책 속에서 둘녕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산호는 둘녕의 연인이 아니다.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존재가 사람에게 '연인'이라면, 그러나 그 연인에게서 언제나 위로를 받을 수 있는건 아니다. 나를 위로하고 나를 가장 잘 보아주는건 때로는 뜻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 내가 잘 있는지 궁금해하는 게 반드시 연인이 아니어도 이 지구상에 나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이미 그런 사람을 가지고 있다는 건 어찌 축복이 아닐 수 있을까. 포지션을 정하고 나면 거기에 맞는 많은 의무들을 정해버리게 된다. 넌 남편이니까, 아내이니까, 연인이니까, 내게 꼭 그래야만 해, 라고. 그래서 당연히 기대하는 것들을 상대가 내게 해주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때 그 상처는 너무나 크다. 그러나 그 포지션이 때로는 가장 큰 힘이 되기도 한다. 내게는 이렇다 할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누군가가 있지, 하는 굳건한 심지 같은것.
"가끔 생각해봤는데 그러니까 난, 이 읍에서만난 여자아이들 가운데 ‥‥‥비교적 널, 편애하는 것 같아." (p.381)
누군가가 어떠한 포지션으로 내 옆에 존재하든 , 나는 내가 비교적 편애하는 사람들이 날 편애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가 편애하는 사람이 몇 되질 않으니, 아마도 나를 편애하는 사람들도 몇 되지 않을것이다. 물론, 내가 편애한다고 그 사람도 나를 편애하리란 보장도 없다. 그들과 나사이에는 엇갈림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상대가 나를 특별히 편애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내 말들이 얼어붙어 버리기 전에 그들에게 편애한다고 말해야겠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