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극심한 형벌도 피해자나 그 가족의 고통과 복수심을 충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국가가 그 복수심을 충족시키는 도구일까요? 일정부분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도를 지나쳐서 개인처럼 이성을 잃기 시작하면 곤란합니다. 개인에게 보복을 맡겨두면 한두배가 아니라 열배, 스무배의 복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동해보복(同害報復)의 딸리오법(lex talionis)이 만들어졌고, 그 형벌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집행하라고 시민들은 국가에 역할을 위임했습니다. 시민들에게 형벌권을 위임받았다고 해서, 시민들이 연주하는 분노와 보복의 장단에 맞춰 국가가 무조건 춤을 춰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형벌은 오랜 세월 동안 어렵게 야만을 벗어나 합리화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고문과 잔혹한 형벌을 제거한 역사는 곧 인류문명이 진보해왔다는 산 증거이기도 합니다.
국가는 개인과 달리 이런 문명의 진보 수준에 발맞추어 가장 합리적인 형벌을 찾아내 집행할 책임이 있습니다. 즉 제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 상대방을 쳐죽이기를 바랄 수 있고, 그게 잘못은 아니지만, 국가에는 그런 보복감정을 넘어선 합리적이고 공정한 형벌을 입법하고 재판을 거쳐 집행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적절한 처벌을 찾아보자는 논의중에 "네 딸이 그런 일을 당해도" 따위의 직극히 개인적인 질문으로 논점을 흐리는 것은 좋은 토론자세가 아닙니다. (p.212)
나는 여전히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될 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네 딸이 그런 일을 당해도" 따위의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으로 논점을 흐리지 말라고 말하지만, 나도 어느정도 그 말에 수긍은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 말을 안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하고 싶다. 그들의 삶을 짐작이나 해보았냐고,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감히 짐작할 수 있다면 그것을 '논점을 흐린다'는 말로 대응할 수는 없을거라고. 그래, 나는 성범죄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 성범죄 피해자들의 고통과 트라우마는 타인이 절대로 짐작할 수도 없고 함부로 짐작해서도 안되는 부분이다. 그것은 가장 질이 나쁜 범죄이며 한 인간의 삶을 지옥속에 내던지는 범죄이다. 그들을 용서해야한다는 혹은 가혹한 처벌은 안된다는 대응들에 대해 나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어느정도는 그래, 그래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긴 한다. 피해자나 피해자의 가족은 이성을 잃을 수 있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성을 잃지 않는 존재도 그들 주위에 필요하다. 물론 합리적 이라는 말이 피해자나 그 가족들에게 얼마나 합리적으로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국가가 개인을 대신에 형벌을 집행한다는 것은 이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반드시, '가장 합리적인 형벌을 찾아내 집행할 책임' 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꽤 쉽게 읽힌다. 게다가 내가 불편해했던 모든것들의 감정을 조목조목 짚어준다. 여성 인권도 성 소수자 인권도 학생 인권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이 책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본적인 것을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동성애자에 대해 이해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는게 아니라 일종의 '장애'를 가졌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 의견들을 간혹 마주칠 수 있는데, 나는 그런 말을 들을때마다 불편했다. 그런데 그게 어디서 어떻게 불편한건지를 찾을 수 없으니 반박할 수가 없는거다. 장애라고? 동성애가?
어떤 사람들은 이 다름이 '그들'로부터 권리를 빼앗고 그들을 경멸하고 무시할 근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용납했다가는 그들의 잘못된 행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온 세상이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고 믿습니다. 그들이 군대 안에 들어오면 전력(戰力)이 약화되고, 그들이 방송에 나오면 청소년들에게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주며, 그들에게 결혼 같은 제도를 허용하면 전통적으로 지켜온 윤리가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환자이기 때문에 치료를 필요로 할 뿐,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도 생각합니다. 실제로 미국 심리학회의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DSM)은 1973년까지 동성애를 정신장애의 일종으로 분류했을 정도입니다. 과학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이었지요. (P.61)
이해한다고,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그 순간, 그들은 폭력적이었던 거다.
동성애자들의 인권문제는 전적으로 프라이버시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성애자들이 관용하고 말고 할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내가 우연히 이성애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약간 높은 위치에 올라서 '너희들을 받아주겠다'고 선언할 수는 없습니다. 이성애자들이 공기처럼 누리고 사는 권리들을 동성애자들도 당연히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P.88)
이성애자가 더 '많이' 존대하다고 해서 그들이 더 '우월'하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동성애자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 시작은 이 책을 읽는 것 부터가 아닐까. 정말이지, 출근길과 등교길의 길 한가운데 서서 모두에게 이 책을 나누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근로자의 인권에 대해서도 이 책은 얘기한다. 예로 든 영화가 『빌리 엘리어트』라는 것은 나를 공감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는데, 나는 이 부분을 버스안에서 읽다가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해서 몇번이고 책장을 덮어야했다. 『빌리 엘리어트』는 발레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가난한 소년이 나오는 영화이다. 이 소년은 가난한 환경속에서 발레를 향한 꿈을 키워나가려는 성장영화이지만, 그것은 이 영화의 소재일 뿐,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영화속에는 이렇든 꿈을 찾아가려는 빌리와 또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빌리의 친구가 나온다. 이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성장영화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지만, 이 영화에는 아들 빌리를 발레리노로 만들고자 하는 가난한 광부가 나온다. 탄광을 없애겠다는 정부의 발표로 일자리를 잃게되어 노조를 만들어 대응하지만, 아들을 발레리노로 키우기 위해서는 일을 손에서 놓을수가 없어서 '배신자'라는 말을 들으며 어쩔 수 없이 노조에서 빠져야 하는 빌리의 아버지. 나는 이 영화를 울면서 또 웃으면서 보았고,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이 책속에서 이 영화를 언급하며 말하여지는 부분들이 너무나 생생했다. 영국의 대처수상에 대해 읽었던 『지식e』시리즈도 생각났다. 이 노동조합과 그 노동조합을 '모두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해체하여 노동자들을 붕괴시키는 정부의 가혹한 이야기들 때문에, 나는 이 책을 회사의 모든 대표자들에게 읽히고 싶어졌다.
노조가 생기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1987년 노조가 처음 생기고 나서 4년이 지나자 300% 차등지급이던 상여금은 600%일괄지급으로 바뀌었습니다. 임금도 두배 이상 올랐고, 각종 단체협약의 인상분까지 합하면 회사가 지급해야 할 임금은 1987년에 비해 거의 열배가 늘어났습니다. 해마다 파업을 했으니 일한 날은 이전보다 더 줄어들었습니다. 과거에 노동자들 사이에 이상한 상여금 경쟁을 붙여가며 공짜로 착취하던 것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회사의 손해는 이마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현대중공업 노조가 파업을 할 때마다 곧 회사가 망할 것처럼 떠들던 보수언론의 주장이 옳다면 회사는 망해도 열번은 망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해마다 흑자가 났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이갑용 전 위원장은 이런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그만큼 착취당했다는 것, 회사가 늘 피우던 엄살은 거짓이었다는 것, 우리는 정말 바보였다는 것." (pp.181-182)
몇년전에 여자사람들과 남자사람들 여럿이서 함께 모여 술을 마시다가 영화 『연애의 목적』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남자들은 대체적으로 그 영화가 너무 좋다고 재미있다고 말했고 나는 술을 마시다가 깜짝 놀라서 나는 몹시 불쾌했다고 말했었다. 남자사람들이 내게 왜그러냐고 물었고, 나는 수학여행지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섹스를 강요하고 여자가 싫다고 말하는데도 5초만 넣고 있을게, 넣고만 있을게, 라고 말하던 장면이 구역질 났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정말 죽여버리고 싶었다고. 그리고 그 자식은 성기를 정말 넣었다고. 이건 미친거 아니냐고. 어디서 그런 짓을 하냐고. 그런데 놀랍게도 남자사람들은 그 장면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놀랐었다. 그 불쾌한 장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수학여행지의 숙소에서 "이러지 말아요. 이건 아니에요"라고 거부하는 최홍에게 이유림이 "딱 5초만 넣고 있을게요"라고 외치며 억지로 성기결합을 시도하는 장면은 사실상 강간에 가깝습니다. 아니, 그냥 강간입니다. 이걸 '유혹'이라고 표현하며 그 과정을 '발칙 유쾌한 연애의 밀고 당기기'로 묘사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영화진흥위원회 씨나리오 공모전 우수작이었고, 백상예술대상 씨나리오상도 받았습니다. (p.105)
그 장면이 그 영화를 구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었나 하면 그건 나는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이 세상의 수많은 폭력은 그런식으로 일상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그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 장면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내가 이미 본 영화와 내가 아직 보지 못한 많은 영화들이 등장하는데, 아직 보지 못한 영화들 중 몇 편은 놓쳤다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윽, 이걸 어떻게든 보고싶다, 하는 생각. 그런 영화들은 다음과 같다.
『카운터 페이터』와 『색,계』는 이 책을 읽다보니, 내가 제대로 관람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그 두 영화는 지루한 영화로만 남아있는데, 이 책을 읽노라니 오, 꽤 좋은 영화들이잖아? 이 두 영화는 다시 한번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