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고 불안하고 초조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동행은 왜 자꾸 한숨을 쉬냐고 영화가 재미 없었냐고 물었다. 밥을 먹을 때 동행은 왜 밥먹을 때 한숨을 쉬냐고 했다. 부엌에서 물을 따르던 내게 엄마는 왜 한숨을 쉬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한숨을 쉬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채로 계속 계속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반복해 듣고 나니 이제는 내가 아, 방금 한숨 쉬었구나 하고 열에 세번쯤은 알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이 책을 샀고, 읽었다.
보통의 글을 한번도 좋아한 적이 없으면서, 읽으며 무엇을 깨달은 적도 없으면서, 바보처럼 이 책은 내게 위안을 주거나 불안을 해소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친구들이 말리는데도 나는 샀고, 읽었고, 역시나 불안한 마음은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사라지질 않았다. 왜냐하면 내 불안은 내가 이유를 아는 까닭이고, 그리고 내 불안은 책 따위로는 해결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답답하고 초조하다. 아마 이번 봄도 여름도 어쩌면 가을에도 내내 나는 한숨을 쉴지도 모르겠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걸까? 불안하고 답답할 때 어떻게 해소할까? 어떻게 안정을 찾을까?
나는 웃고 싶다.
인간은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 법이다. (p.137)
그런데 나를 웃게 할 확실한 이유가 없다. 아니, 나는 오늘 또, 더 초조해지고 말았는걸. 더 불안해지고 말았는 걸.
나는 오늘 친구에게 보통의 불안을 읽고 있지만 불안한 마음은 전혀 진정되질 않는다고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나는 얼른 이 책을 마치고 소설을 읽고 싶다고, 처절한 여자주인공이 나오는 소설. 이를테면 남자를 붙잡아 두고 싶은 아주 강한 욕망이 비뚤어져서 자신의 다리를 잘라내거나 자살기도를 해서 억지로 남자를 옆에 두게 되는 그런 소설, 그런 소설을 읽으면서 그녀를 욕하고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다가 종국에는 그녀를 이해할 수 밖에 없어서 울게 만드는 그런 소설을 읽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는 그런 여자가 나오는 책이라며, [어떤 여자]를 추천해줬다.
나는 이 책을 읽어야만 할 것 같다. 아, 그런데 엊그제 알라딘 박스 도착했는데 이 책은 언제 또 주문을 해야 하는건가.
다시 불안으로 돌아가면, 보통은 내가 지금 나의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한방에 알려주기는 한다. 이렇게.
어떤 것에 계속 눈이 가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것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을 자꾸 보게 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이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임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것을 이루고 소유하면 지속적인 만족이 보장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행복의 가파른 절벽을 다 기어 올라가면 넓고 높은 고원에서 계속 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고 싶어 한다. 정상에 오르면 곧 불안과 욕망이 뒤엉키는 새로운 저지대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드물다. (p.267)
그러나 내가 해낼 수는 없는 방법이다.
조금, 위안이 되는 그림이 그런데 이 책 안에 실려있다. 흑백으로. 덴마크 화가 '크리스텐 쾨브케'의 [리메 킬른의 동네 풍경]이 그것이다.
한가롭고 여유로워서 나는 며칠쯤 이곳에 다녀와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말을 타고 달려도 좋을텐데. 나는 이 화가의 다른 그림들을 찾아본다.
불안하고 답답하고 초조하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많은 것들을 생각해본다. 나는 할 일 없는 오전이 되고 싶고, 게으른 오후가 되고 싶다. 나는 그 사람과 함께하는 외딴섬의 등대지기가 되고 싶고, 걸어다니는 비아그라가 되고 싶다. 나는 코펜하겐에서 그를 기다리는 여자가 되고 싶고, 나는 갓 내려진 뜨거운 커피가 되고 싶다. 나는 그의 방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가 되고 싶고, 그를 한걸음도 더 내딛지 못하게 하는 쌓인 눈이 되고 싶다. 나는 늑대인간이 되고 싶고, 뱀파이어가 되고 싶다.
그렇지만 나는, 그저, 월요일이 되면 출근해야 하는 도시 여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