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스타일즈 주연의 영화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에서 여자주인공 '페이지'는 의사가 되기를 희망하는 대학생이다. 페이지는 자신의 방 안에 세계지도를 붙여두고 가고 싶은 곳에 빨간 압정을 박아두었으며, 그 곳에 갔다오고 나면 빨간 압정을 빼고 그곳에 초록색 압정을 박아둔다. 셰익스피어를 잘 이해하지 못해 속상하지만, 어쨌든 페이지는 의사가 되기 위해 열심기 공부하는데, 그러다가 덴마크 왕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모든걸 내던지고 덴마크로 날아가, 덴마크의 왕비가 된다. 덴마크의 왕비 생활에 적응하고 왕자와 사랑하며 살고 있다가 어느 날 페이지는, 성 안에서 세계지도를 보게된다. 그리고 그간 잊고 있었던 자신의 꿈을 떠올린다. 나는 하고 싶었던 일도 있었고, 가고 싶었던 곳들도 있었다, 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왕자에게 내 꿈대로 살겠다고 말하며 덴마크를 떠난다.
그런데 여기, 자신이 가고 싶었던 곳을 가지 못한채로 머물러 있는 남자가 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곰스크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곰스크, 그 멀고도 멋진 도시 ‥‥‥. 언젠가 곰스크로 떠나리라는 것은, 내 성장기에 더 말할 것도 없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곰스크는 내 유일한 목표이자 운명이었다. 그곳에 가서야 비로소 내 삶은 새로 시작될 터였다. (p.10)
그 꿈을 잊고 있던 그는 이제 곰스크로 향하기로 하고 아내와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오른다. 기차표를 사기 위해서 가진 돈을 다 써버렸다. 그리고 곰스크로 향하는 기차 안, 인생의 목표가 다가온다는 전율감에 휩싸인 그는 '우리는 모든 것에서 멀어져가는 군요' 라고 말하는 아내와 함께 앉아 있다가 두시간 동안 정차하는 역에 내려 식사를 하고 쉬기로 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아내 때문에 그는 그만 곰스크로 향하는 기차를 놓치고 만다.
"기차를 놓치면 안되는데 ‥‥‥." (p.14)
그가 곰스크로 가는 것은 이제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기차가 매일 오는것도 아니고, 차표를 다시 사야 하고, 또 안락의자 때문에, 그리고 아내가 임신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는 매일매일을 곰스크에 가기 위해 잠시 정차한 역에 머무르고 있지만, 그의 아내는 잠시 정차한 곳을 좀 더 살기 좋고 아늑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두시간 동안 들르기로 했던 작은 마을에 그는 내내 머무를 수 밖에 없게 되고, 시간이 더 지나고 나니 이젠 곰스크로 가야 한다는 말조차 꺼낼 수 없게되고야 만다. 이 남자는 내내 곰스크로 가고 싶은데, 그의 아내가 그를 막았어, 그의 꿈을 좇지 못하게 했어, 하는 야속한 마음이 자꾸만 자꾸만 생기는데, 모든걸 체념하고 곰스크로 향하는 꿈을 어쩔 수 없이 계속 뒤로 미루기만 하는 그에게 그 마을의 나이 든 선생은 죽어가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나 역시 한때는 멀리 떠나려고 했소.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군요."
(중략)
"사람이 원한 것이 곧 그의 운명이고, 운명은 곧 그 사람이 원한 것이랍니다. 당신은 곰스크로 가는 걸 포기했고 여기 이 작은 마을에 눌러앉아 부인과 아이와 정원이 딸린 조그만 집을 얻었어요. 그것이 당신이 원한 것이지요. 당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기차가 이곳에서 정차했던 바로 그때 당신은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기차를 놓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 모든 순간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지요."
(중략)
"그건 나쁜 삶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의미없는 삶이 아니에요. 당신은 아직 그걸 몰라요. 당신은 이것이 당신의 운명이라는 생각에 맞서 들고 일어나죠.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반항했어요. 하지만 이제 알지요. 내가 원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만족하게 되었어요." (pp.59-61)
나는 늘 내 삶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아주 많이. 내가 노력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 수 있었을 거라고 늘 부질없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은 당연한 것이고,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원한 최선이었을 것이다.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에서의 페이지가 하필 그때 지도를 보지 않았다면, 5년후나 10년후에 자신의 꿈을 떠올렸다면, 그리고 그때 이미 페이지에게 덴마크 국민들이 의지하고 있었다면, 혹은 아이라도 생겼다면 페이지는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나기 보다는 덴마크에 머무는 쪽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신은 무엇때문이든 어쨌든 꿈을 포기했군요' 라고 함부로 말할수 없을 것 같다. 머무는 쪽을 선택했다는 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니까. 마찬가지로, 이 책속에서의 남자가 곰스크로 가는 것을 아내와 머무는 것보다, 아이보다, 더 원했다면 그는 어쨌든 곰스크로 갔을테고, 그것이 그가 살고자 했던 삶이었을 것이다.
참 이상하지. 꿈을 좇아 현재에 등을 돌리고 가는 영화를 볼때도 나는 분명히 속 시원하고 위로를 받았는데, 이 책 처럼 가고 싶었던 곳에 가지 못하고 있는 남자를 보는데도 위로를 받는다. 사실 이 책속에서 나이든 선생이 '그건 나쁜 삶이 아닙니다' 하는데, 그만 바보처럼, 나는 이 책을 껴안고 싶어졌다. 아, 이토록 아름다운 단편이라니! 시니컬하게 진행되다가, 심드렁하게 이야기하다가, 이렇게 따뜻해져버리다니! 이 책의 제목까지 확 좋아지고 만다.
어제 늦은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의 마지막 단편 『럼주차』를 아주 재미있게 읽으면서 지하철에서 내려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아주 추웠는데, 하필 내가 읽은 부분은 이런 부분이었다.
키 큰 보이 엡센은 무릎 위로 철썩대며 콸콸거리는 검은 바다를 건넜다. 격렬한 파도가 높이 출렁여 가슴까지 흠뻑 젖었다. 주변에는 안개와 밤, 그리고 철썩대며 일렁이는 바다와 안개를 타고 흐르는 창백하고 유령 같은 달이 있을 뿐이었다. (p.165)
어휴, 나는 너무 추웠는데, 손도 시려웠는데, 물 속에 서서히 잠기게 되는 보이 엡센의 이야기를 읽노라니 더 추워졌다. 그가 서있는 앞 뒤로 물길들이 다가와 그를 감싸려고 할때 내 몸이 다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책을 덮고 걸음을 빨리해서 집으로 걸었다.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오고 나서는 어두워서 책을 읽을 수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가 물이 서서히 차오르는 그 갯벌에서 더이상 살 수는 없을거라고, 그는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을 마저 읽었다. 그런데 그는 아!
끝.장.나.지. 않.았.다.
아 제길. 너무 좋잖아!
책장을 덮고 욕실로 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면서, 나도 럼주차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추웠으니까. 보이 엡센만큼. 그러나 더 많이 생각한 건 이런거였다.
그래, 삶은 그렇게 쉽게 끝장나지 않아.
밤새 내내 물 속에 서있느라 몸을 덜덜 떨다가, 새벽에 집으로 돌아와 마시는 럼주차처럼 몸을 녹여주는 소설집이다. 럼주차를 마셨으니 이제는 나를 덮어줄 따뜻한 이불만 있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