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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r Economics (Hardcover)
Esther Duflo / Public Affairs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Financial Times 에서 ‘올해의 책’ 으로 선정했다는 기사를 읽고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이에 더해 이 책에 대한 추천사중 <괴짜 경제학> 으로 유명한 Steven Levitt 이 쓴 “경제학이 (이 세상에)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것” 이라는 문구가 결정적으로 마음을 움직였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세상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경제학을 공부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고민해 보았음직한 문제이고, 그중 거의 대부분이 평생토록 명쾌한 해답을 내놓을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모든 학문은 세상에 무언가를 공헌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사회과학, 그 중에서도 먹고 사는 문제과 직결되는 경제 현상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경제학이 현대에 가지는 존재 가치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은 이 학문을 업으로 삼기로 결심한 이후 내가 거의 매일같이 생각하는 주제이다. 그에 대한 해답은 아닐지언정 어떤 힌트는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같은 것이 이 책을 읽게 만들었다.

전 세계의 거의 대부분은 빈곤에 시달린다. 세계 인구의 13%가 하루에 1달러가 채 되지 않는 돈으로 연명한다.  이 책은 부제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어떻게 하면 전세계적으로 만연해 있는 빈곤을 가장 효과적으로 퇴치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하는 책이다. ‘준비한다’ 라는 단어를 억지로 가져다 쓴 것은, 이 책이 그 자체로서 어떤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은 가장 올바른 해답을 찾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기능한다. 즉 ‘왜 빈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와 ‘그렇다면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라는 두가지 큰 질문이 있다면, 이 책은 전자에 거의 모든 노력을 소진한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그러하듯이, 이 책은 쉽게 해답을 내지 못하고, 그럴 생각도 별로 없어 보인다. 다만 특정 문제를 야기시키는 원인에 대한 효과적인 분석을 행하는 것만으로도 그 다음 단계에 행해져야 할 대안의 마련을 조금 더 용이하게 만든다. 그 대안은 각국 정부의 정책 변화가 될 수도 있고, 시민 의식구조의 개혁이 될 수도 있으며, 선진국에 의한 원조 프로그램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의 저자 두사람의 몫은 아닌 셈이다.

빈곤 퇴치에 대한 상이한 시각 두개가 존재한다. 하나는 Jeffrey Sachs 라는 컬럼비아대 교수에 의해 대표되는 공급 중심의 시각이다. Sachs 는 선진국에 의한 원조에 의해 빈곤에서 탈출하는 가장 기본적인 해결책이 열린다고 주장한다. 즉 아주 기본적인 위생 문제를 해결하고 한사람이 하루에 먹고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무상으로 제공할 수 있다면 이를 토대로 빈곤에 시달리는 국가들은 그 다음 레벨 – 빈곤 이후의 자생적인 경제 모델의 발전 – 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UN 에서 활동하는 안젤리나 졸리도 이쪽이다. 다른 하나는 William Easterly 라는 뉴욕대 교수에 의해 주창되는 수요 중심의 시각이다. 그는 무분별한 원조 프로그램은 오히려 자생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인 시장 구조를 왜곡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원조 프로그램이 빈곤을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는 원조 이전에 시장 구조를 보다 확실하게 정립하자고 주장한다. 삭스와 이스털리는 같은 맨하튼에 적을 두고 있고, 이 주제로 매년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이 책의 저자인 Banerjee 와 Duflo 는 이들과 한발 떨어진 매사추세츠 보스턴 근처의 MIT 에 재직하는 교수들이다. 그리고 이들 저자는  <Poor Economics> 에서 공급이 먼저냐 수요가 먼저냐로 다투기 이전에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간단하게 “그때 그때 달라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의 주장은 사실 그리 간단치가 않다.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이 이들의 핵심 결론이기도 하다. 수요 중심의 해결책이 먹히지 않을 때도 있고, 공급 중심의 해결책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왜” 그러한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갔는지 일일이 나누어 살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들은 놀라울 정도의 방대한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각각의 이슈들에 대한 검증을 한다. 아이보리 코스트, 인도와 중국, 브라질과 방글라데시등 빈곤층을 상당 부분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을 직접 발로 돌아 다니며 실제 빈곤층에 속한 계층을 일일이 인터뷰했다. 각각의 정책들이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미시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그 이후 이들의 삶은 경제학적으로 재해석하고, 경제학적인 “도구” 들을 이용해 원인을 분석한다. 한가지 놀라운 점은 이들이 경제학적 방법론으로 빈곤 현상을 분석할 때 사용하는 도구들은 아주 간단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경제학원론 수준의 경제학적 지식만을 이용해 세부적인 현상들에서 하나의 일관된 아이디어를 만들어 낸다. 그 과정에는 논리적인 비약도 없고 억측이나 과장도 없다. 철저히 인터뷰와 통계 수치만을 이용해 도출해낸 결과들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반박하기 힘들다. 이들이 그 이후 제시하는 해결책, 혹은 대안이라고 불릴만한 아이디어들은 원인 분석에 비해 훨씬 추상적이며 얄팍하지만 그 것이 이 책의 큰 흠집이 되지는 않는다.

간단하게나마 이 책의 “결론이자 또다른 연구의 출발점” 이 될만한 내용을 적어 본다. 즉 “왜” 빈곤층은 계속해서 빈곤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대략적인 이유 다섯가지다.  첫째, 빈곤층의 대부분은 충분한 올바른 정보를 얻을 기회가 없다. 이들은 또한 옳지 않은 정보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인 위생 문제부터 섹스, 마약, 식습관등 기본적인 것들에서조차 이들은 제대로 교육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살아간다. 둘째, 이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것들에 대해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즉 더 많은 부양 가족과 더 적은 유산, 더 불안정한 일자리등의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셋째, 이들을 빈곤으로부터 탈출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몇몇 시장들이 제대로 정의되거나 설립되어 있지 않다. 이는 정부의 부패부터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수렴되는 경제학적 행동들까지 다양한 이유들로부터 형성된다. 넷째, 빈곤층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적다. 원래부터 가진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지와 이데올로기, 저항등의 이유때문이기도 하다. 다섯째, 이들은 다음 수준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 즉 혁신이나 도전등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모멘텀이 상대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다시 처음 이 책을 구입하기로 마음먹을 당시 가졌던 질문으로 돌아가본다. 이 책이 경제학이 세상에 해줄 수 있는 그 어떤 가치를 제공해주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내 개인적인 대답은 그렇다, 이다. 이 책은 경제학이라는 학문 안에 갇혀 있지 않다. 즉 이 책의 저자들이 결론을 대신하는 마지막 장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이들은 현대 경제학이 자랑하고 내세우는 수학적인 엄밀성이나 현상들에 대한 일반화에 관심이 없을 뿐더러 그러한 경제학의 경향성을 배척하기까지 한다.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한가지, 지금 이시간에도 굶어 죽어 가고 있는 수많은 이들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는 데에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경제학이라는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 것 뿐이다. 즉 이 책은 한 학문 분야라는 “바닥” 에서 내공을 인정받기 위해 쓰는 추상적인 언어 유희가 아니다.  Duflo 가 대학원 시절 실제 인도에 가서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며 시작된 이 책은 그러한 실제적인 접근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코 성급하게 앞서가지 않는다. 지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치밀한 현상 고증과 통계적 수치를 제시하면서 그 안에 담겨져 있는 경제학적 함의를 차근 차근 설명한다. 그리고 그 치밀한 논증 위에 그들이 원래 하고 싶었던 주장을 얹는다. 과격하지 않지만 분명한 어조로 전달한다. 행동해야 한다고. 그냥 행동하면 안되고, 아주 잘, 조심스럽고 현명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그래서 이 책의 부제가 완성된다. 빈곤과 “싸우기” 위한 “극단적”인 “생각”. “싸운다” 혹은 “극단적” 이라는 단어가 이 책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그리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전적으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인 엄밀함덕분이다. 그 안에 수학 공식은 존재하지 않고, 어려운 경제학적 개념도 등장하지 않는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쉽게 읽히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 치열한 고민을 요구하고, 뒤이어 뜨거운 가슴도 요구한다. 경제학이, 아니 학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실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런 책을 쓰는 것이 아닐까.

찾아보니 아직 국내에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하루 빨리 번역되어 소개되기를 바란다. 이제 한국은 세계 20위권의 “부자나라” 이고, 빈곤에서 가장 빨리 탈출한 모범 사례로 종종 소개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 나라가 가진 노하우를 더 발전해야 하는 나라들에게 전달하고 도움을 줄 때가 왔다. 세계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이 책은 그런 고민을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여담. 젊은 경제학자가 받을 수 있는 영예로운 상들이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상 두가지는 매년 40세 이하 경제학자중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한명에게 수여하는 John Bates Clark Medal 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아주 젊은 학자에게 수여하는 MacArthur “genius” Fellowship 일 것이다. 이책의 공저자인 프랑스인 Duflo 는 이 두개의 상을 모두 받았다. 한마디로 천재라는 얘기다. 천재가 머리를 좋은 방향으로 쓸 때 세상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여담2. 유학오기 전 만났던 여자친구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라는 책을 읽고 있다고 내게 잠깐 보여준 적이 있다. 유심히 살펴 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 여자친구를 가끔 떠올리 때마다 이상하게 그 책이 함께 떠올랐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 친구는 무척 이뻤고, 이쁜 만큼 옷도 잘 입었고, 명품도 좋아하는 친구였다. 내게 항상 생각없이 산다고 구박을 들었고, 편하게 먹고 살기만 하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그랬던 친구가 왜 그 책을 20대 중반이던 그 당시 읽고 있었는지 이 책을 읽고나서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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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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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라는 작가의 글이 좋다는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이 들어 왔다. 나는 잘 모르는 평론가의 현학적인 평가보다는 나와 친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투박하게나마 표현한 칭찬에 더 끌린다. 그들이 좋다고 하면 나도 읽어볼 요량이 있다. 그래서 이 작가의 책을 한권 골라 봤다. 어떤 내용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냥 제목만 보고 가장 끌리는 한권을 골라 주문했다. 때로는 너무 많은 사전 정보가 오히려 올바른 선택을 방해하기도 한다. 사실 작가에 대한 어느 정도의 믿음, 아니 아주 약간의 호기심만 있다면 그 작가의 저작중 랜덤하게 고른다는 것은 그리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도 않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은 장편 소설이다. 주인공이 있고, 그가 회상하는 1991년이 있다.  그가 사랑했던 여자가 있고, 그가 만들어 보고자 했던 나라가 있으며 그 나라의 주변을 살아 갔던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가 회상하는 1991년은 과거 100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의 궤적속에서 존재한다. 그 역사의 거대함속에서 때로는 소멸되어 가고 때로는 서로 부둥켜 안고 버티어 내는 개인이 존재한다. 주인공은 회상이라는 방식을 통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하지만 사실 역사와 국가라는 거대한 구조물 앞에서 보잘 것 없는 개인중 하나로 존재하는 자기 자신의 위치 또한 잘 알고 있다.

김연수라는 작가가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개인을 소재로 소설을 써 왔다는 사실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씨네21의 김혜리 기자와 행한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때로는 연애와 사랑을 소재로도 글을 써 왔다는 사실도  그의 저작 목록을 확인하면서 알게 됐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도 성글고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역사와 사랑, 이 두가지에 대한 소설이다. 서사 구조는 마치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을 보는 듯 꼼꼼하게 짜여져 있다. 소설의 전반부에 깔아 놓은 복선들은 중반부에 이르러 국면이 전환되면서 소설의 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요긴하게 쓰인다. 미스테리적인 구조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제법 빠른 편이다. 재미있다는 얘기다. 구조를 파악하며 읽을 때 느끼는 지적인 흥미도 꽤 된다. 여기에 더해 (나는 비록 손발이 약간 오그라들 정도로 유치하게 느꼈지만) 소설 곳곳에서 풍부하게 제공되는 인문학적 배경들은 어쩌면 약간의 지적 허영심까지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장편 소설을 통해 이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역사의 슬픔 앞에 한없이 무기력한 한 인간이 어떻게 뒤틀려 가고 그 과정에서 소외되어 가는 인간 존재의 외로움? 혹은 그 거대한 파도 위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고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 인간성, 혹은 사랑에 대한 가치? 잘 모르겠다. 되게 재미있게 읽긴 읽었는데 글자들 사이에서 떠오르는 강한 이미지가 없었기 때문일까, 나는 책을 다 읽은 후 한참동안 생각을 골똘히 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약간 헷갈렸다.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 가며 ‘해답’ 혹은 ‘해설’ 을 읽는 행위는 개인적인 궁금증은 해소할 수 있을 지언정 그리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길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그의 문장은 정갈하게 쓰인 편이지만 가끔 허황된 욕심을 부리기도 한다.  그래서 본받고 싶지는 않다. (내가 한자 세대가 아니기 때문일까!) 나는 여자친구와 데이트할 때 그렇게 장황한 어휘를 구사하며 철학과 역사에 대해 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달콤하다거나 애달프게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맥거핀처럼 쓰이는 느낌이 들어 그리 기분이 썩 좋지도 않았다. 이길용이라는 인물을 창조해 내는 과정은 무척 흥미로웠다. 이 소설이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그의 존재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 <피와 뼈> 와 <타인의 삶> 이 생각났다. 그 영화들처럼 강렬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소설과 김연수라는 작가를 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소설 두세편을 더 읽어볼 참이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덧. 어제는 김연수의 소설을 읽었고 오늘 저녁에는 임연수를 구워 먹었다.


12. 25.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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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원의 붉은 열매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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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문학동네, 초판, 2010년.

한국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살다 보면 한국과 관련된 것들이 그리워 진다. 순대국부터 청주까지. 혹은 마을 버스부터 찜질방까지. 그 중에 언어가 있다. 나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받아 들였고, 한국어로 말하는 법을 배웠으며,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속에서 약 25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내 생각의 상당 부분이 한국어를 통해 이루어 진다. 때문에 아무리 연습을 통해 단련한다고 해도 영어를 비롯한 제2 외국어들을 접할 때 느끼는 불편함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다. “좋은” 이라는 앞에 붙이면 한국어에 대한 굶주림은 더 커진다. 한국인과 수다를 떨거나 쓰잘데기없는 글 따위를 쓰는 것으로 말하기와 쓰기에 대한 갈망은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으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좋은 문장을 충분히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꽤 많이 서글픈 일이다. 그래서 그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한국의 인터넷 서점을 통해 가끔 책을 주문하는데, 그 비용은 한국에서 책을 구입할 때의 배를 넘어선다. 가끔은 배송비가 책값보다 더 많이 나오기도 하고, 주문 후 도착까지 일주일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요즘 내 소원중 하나가 퇴근하고 교보문고에 들려 책을 한권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언제쯤 가능할런지!) 책을 읽는 버릇이 달라진 이유가 여기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한 과정을 통해 어렵사리 도착한 책들에 박힌 한글자 한글자를 소중하게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같은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읽는 즐거움, 아름다운 문장을 접했을 때의 쾌감은 내가 가질 수 없는 재능이 실현되는 장면을 목격할 때 느끼는 대리 만족과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때 느끼는 질투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논픽션이 아닌 픽션의 경우에는 이런 감정이 더 커진다. 한국어로 써진 소설은 꾸준히 읽어 오지 않았다. 가끔 어떤 우연한 기회가 닿아야 읽을 수 있는 장르였다. 한국에서 살 때에는 한국어 소설을 읽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같고, 사실 공부와 관련된 것들을 읽기에 바빠 거기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가 미국에 와서야 비로소, 그것도 최근에서야, 한국어가 가진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문장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권여선의 소설집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는 그러한 나의 한국어에 대한 굶주림과 열망을 적절히 채워주는 책이다. 일곱편의 단편 소설들은 이름이 없는 주인공들과 그들의 주변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이름이 없는 주인공들은 때로는 타인 앞에 세워진 관찰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타인들의 행위를 관찰하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뒤틀린 관계속에서 인물들은 각자 부족하고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상처를 받는다. 그렇게 벌어진 간극은 결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내가 이 단편 소설들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들을 표현하는 단어를 세개로 추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아포리즘,  기억, 반성.

그의 소설은 아름다운 문장들의 연속이다. 그런데 가끔은 소설의 서사가 주는 구성의 매력보다 한두 문장이 주는 강렬함에 더 끌릴 때가 있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이 바로 그런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모든 단편 소설들은 각각의 주제를 함축하는 한두개의 문장을 가지고 있고, 그 문장들은 읽기를 끝마친 뒤에도 계속해서 머리를 맴돌며 새로운 생각들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가끔은 작가가 그 문장을 드러내기 위해서 스토리 라인을 구성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몇개의 문장들로 그의 소설이 대변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의 소설들이 가지는 서사적 구성의 탄탄함은 단지 몇개의 문장에 함몰되지 않을 정도의 단단함을 자랑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그의 소설들은 단지 현상을 묘사하는 데에 치중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 하나의 관계가 시작되고 뒤틀어져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에 더 집중하는 듯 보인다. 즉 과거에 대한 기억이 현재의 상황에 항상 중요하게 작용할 뿐더러, 과거가 없이는 현재도 존재할 수 없다는 통시적인 관점이 곳곳에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끝은 항상 현재에 머문다. 현재의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으며, 가끔은 그 어떠한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 무책임하게- 말할 수 있지만, 그 희망을 가능케 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반성이다. 능동적인 희망의 경우에 그렇다.  그의 소설은 인물로 하여금 항상 과거를 반추하게 하고 그에 따라 현재를 다시 돌아 보게 한다. 다시 생각하게 된 현재는 분명 그 전과 다를 것이다. 후회와 절망을 뛰어 넘어 새로운 현재를 가능케 하는 반성,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다른 소설들은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글쓰기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길이 없다. 아마도 나는 그의 다른 소설들을 주문할 것이고, 그렇게 또다시 지난한 과정을 거친 후에 도착하는 책들을 소중하게 다루며 읽을 것이다. 그의 문장들은 허투루 쓰이는 법이 결코 없기 때문에 허투루 읽을 수도 없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음미하며 읽을 때 잘 쓰인 한국어를 읽는 참다운 맛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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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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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의 소식은 인터넷의 포털 사이트를 통해 접하는 것이 고작인 이 곳에서 최근 발간된 한 소설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책을 구입하게 된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소설을 자주 읽는 편이 아닌 내게는 더더욱 그렇다. 두가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검정치마의 “antifreeze” 가 소설에서 중요하게 쓰인다는 것과 (나중에 알고 보니 릴리 슈슈의 “glide” 도 나오더라)  70년대 후반, 혹은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젊은이” 들이 자녀가 아닌 부모의 신분으로 소설속에 등장한다는 것. 이 소설과 김애란이라는 젊은 작가의 이름은 내가 들르는 거의 모든 인터넷 공간에서 최소한 한번은 회자되었다. 그러다 논문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기 위해 한국의 한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주문해야 할 일이 생겼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배송비가 아까워 전부터 사고 싶었던 책들을 마구 끼워 넣던 중 이 책의 이름이 생각나 함께 주문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 책을 아주 좋게 읽었다. 단지 유쾌한 버전의 “병원 24시” 라던가 츠지 히토나리의 <사랑을 주세요> 의 한국 버전이라서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오히려 상투적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이다. 주제에서 오는 무거움과 그것을 떨쳐 내는 긍정의 기운이 오묘하게 섞여 있는 이 소설의 독창성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기술적인 장점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작가가 진심을 다해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분 부분 상투적인 표현들과 어쩔 수 없이 전개해야 하는 비소설적인 구성, 예를 들어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만드는 (이건 대부분의 현대 소설이 가지는 고질적인 병폐라고 할 수 있다) 묘사들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최소한 그러한 단점들이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 무언가를 퇴색시킬 정도는 아니다. 어린 부모와 늙은 자식의 이야기는 덜 자란 부모와 지나치게 성숙한 자식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부모를 통해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을 바라보고 자식을 통해 – 역시 –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을 바라보는 마주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작가가 아주 섬세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억지로 상황을 만들어 내는 어리석은 창조주가 아니다. 묘사에 집착해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도 않는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그려내는 한 가족의 담담한 일상을 통해 어떤 ‘선’ 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인터뷰는 아직 전혀 읽어보지 않았다) 내가 이 소설에서 받은 인상은 일종의 직선같은 것이었다. 비뚤비뚤하게 그어져 있을 수도 있고, 어떤 구간에선 희미하게 표현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결코 어느 한쪽으로 치우처져 있지 않은 곧은 모습의 선. 그 선은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몸부림치지 않는다. 그냥 주욱 앞을 향해 갈 뿐이다. 그 선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당장 내일 먹고 살기 힘들어서 받는 고통, 혹은 삶을 더이상 영유할 수 없다는 극한의 슬픔,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어떤 일상이 있다. 거대한 담론속에 함부로 묻혀버릴 성질의 것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그리고 나누어야만 하는 따뜻함이 있다.

그래서 아예 희망이 없는 존재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는 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장기적인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삶의 작은 부분에 대한 가치를 일깨우는 일은 조금 더 쉬웠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서 가장 큰 희망, 혹은 가능성을 상실한 그 존재가 영롱하게 빛나는 순간 얼굴이 벌개짐을 느낀다. 최소한 “아, 나보다 안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더 열심히,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겠구나” 같은 기계적인 교훈때문은 아니다. 그건 아주 기술적인 교훈이고 우리가 얻고자 할 때 언제든지 얻을 수 있는, 일종의 소모품과 같은 감동이다. 이 소설은 그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건 아마도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최소한 일곱 여덟번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으며 가졌던 생각이기도 한데, 굳이 의미가 통하는 단어를 선택하자면 “마주보다” 정도가 될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눈을 내리 깔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며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런 모습을 이 소설에서 느꼈다.

2011년 6월에 초판 1쇄가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내가 구입한 26쇄는 9월에 찍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괜한 안도감을 느낀다. 아마도 이 소설이 가지는 트렌디함과 늘어지지 않는 적당한 가벼움, 그리고 극적인 반전이 주는 구성에서의 매력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에서 좋은 것을 발견한다. 그것때문에 잘 읽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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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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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수다스럽다. 그는 지구상에서 한정된 조건 혹은 자원을 가지고 가장 많은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그의 재능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들중 일부는 보통이 만들어 내는 맛깔나는 문장들중 대부분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글을 계속 읽기 원할 것이다. 그는 가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또 때때로 아주 깊은 수준의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가 묘사하는 대부분은 알지 않아도 굳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없는 잔가지들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특정 사실을 묘사하거나 해석할 때 보다는 그의 머리속에서 만들어 낸 상상의 작용들을 묘사할 때 그의 재능이 더 빛을 발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후 단 한번도 그의 책에서 특정 수준 이상의 감흥을 느껴보지 못했다. <여행의 기술> 은 무척 지루했고, <우리는 사랑일까> 는 진부했다. <행복의 건축> 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별로 읽어보고 싶지 않다. 그는 지적으로 늘 자극을 주는 존재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에게 삶에 유익한 지적인 자극을 받아본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가보다 비싼 운송비를 지불해 가며 그의 에세이 <공항에서 일주일을: 히드로 다이어리> 를 구입한 이유는 (아마 영어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굳이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내가 공항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인 보통의 손끝을 빌려 묘사된 공항의 모습이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앞서 기술한 바 한정된 장소, 대상 혹은 시간에 구속되어 글을 쓰는 데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보통에게 공항만큼 흥미로운 도전도 없었을 것이다. 약간의 수고를 들여 찾아본 여러 블로그들에서도 꽤나 좋은 평을 받기도 했고.

하지만 책의 첫장을 넘기기 전부터 약간의 불쾌함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이 쓴 글과 리처드 베이커가 찍은 사진이 정확하게 절반씩의 지분을 가진 채 실려 있다. 베이커의 사진은 보통의 글과 유기적으로 얽히며 두페이지당 한페이지씩 공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표지에는 보통의 이름밖에는 없으며, 베이커의 이름은 보통이 쓴 감사의 말에서야 잠깐 등장할 따름이다. 이 책은 명백히 콜라보레이션이다. 누가 주도했든 간에 말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보통의 글보다 베이커의 사진이 더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설사 보통이 시키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고 할지라도 베이커의 사진이 주는 울림의 폭은 보통의 건조한 문체보다 더 활발하게 살아있는 편인데,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공항에서 받는 거의 대부분의 느낌들이 시각에 의해 전달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공항의 높은 천장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각종 소음들과 친절하지 못한 냄새에도 익숙해져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도시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낯선 풍경들에 먼저 압도당하기 마련이다. 베이커의 사진은 그 찰나의 순간들을 명민하게 포착해 낸다.

그에 반해 보통의 글은 여전히 수다스럽고 아주 유쾌하며 때때로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들지만 대부분은 지루하고 장황하다. 그는 일반 승객들이 갈 수 없는 공간에 고개를 들이 밀고 만날 수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권한을 일주일동안 부여받았지만, 결국 관찰에 의한 사색이 아닌 관찰에서부터 출발한 상상에 의존한 채 글을 써 내려 간다. 나는 그점이 따분했는데, 또 어떤 이들은 그점에서 보통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쉽게 읽히는 글을 쓴다는 것은 대단히 축복받은 능력이다. 그리고 그 재능을 쓸데없는 곳에 쓴다는 것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보통은 여전히 대단히 좋은 글들을 쓰고 있으며, 소소한 재미를 전달할 수 있는 몇안되는 작가이다. 하지만 나는 보통이 역사에 기록될 만큼의 존재감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이러한 의구심은 그의 책을 한권 한권 더 읽어 나가면서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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