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의 아기가 걷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그렇게 뒤뚱뒤뚱 걸으며 뛰는것에 흠뻑 빠져있을 때였다. 나는 그 아기의 뒤에 혹은 옆에 항상 붙어 있었는데도 그 아기는 창문에 손을 넣고 닫았으며, 식탁 모서리에 이마를 찧었고, 장식장에 머리를 넣고 장식장 문을 닫았으며, 심지어는 뛰면서 벽에 온 몸을 부딪치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기는 자지러지게 울었고, 나는 왜 내가 곁에 있는데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걸까 안타까워했다.
그 전부터였을것이다. 나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언제나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때때로 걱정을 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아이들에 관해서는 더했다. 나는 아이를 낳아본 적도 없고 길러본 적도 없으면서, 게다가 아기들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무심한 여자사람이면서 그래도 언제나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어떤 곳에서 아이들이 다칠까봐 혼자서 걱정을 하고 혼사서 떨고는 했다. 한번은 샤워를 하다가 아기들이, 아주 작은 아기들이 손가락을 문에 넣고 닫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어서 실제로 문에다 손가락을 넣고 살짝 닫기까지 해보았다. 다 닫기도 전에, 그러니까 아주 조금만 문을 움직였는데도 괴상한 비명을 질러댈 만큼 손이 아팠다. 이걸 아기들은 어떻게 견디지? 어른이 곁에 있어도 아주 찰나의 순간에 아기들에게는 이런일이 흔하게 일어날텐데, 그땐 정말 어떡해야하지?
대체 왜 이런 걱정들을 내가 하고 있는건지도 모르면서도 한번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아무리 잊으려고 고개를 마구 저어 보아도(실제로 나는 잊고 싶은것들이 떠올랐을 때는 심하게 고개를 젓곤 한다)쉽게 그 끔찍한 장면들이 지워지질 않았다.
그래서, 그래서, 내겐 이 책이 더할나위 없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책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각자가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누군가 감동한 부분에서 나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감동한 부분에서 다른이들은 도대체 그게 왜? 라고 반문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건 반문한다고 답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건, 그냥 그런거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이 좋아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내가 감동했다는데 뭘 어쩌란 말이냐.
그러니까 이 책에서 홀든은 순간적인 생각으로 이렇게 내뱉은걸지도 모르지만, 나는 홀든을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나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pp.229~230)
아니아니, 홀든. 너는 전혀 바보같지 않아. 지금 니가 하는 말들이 얼마나 내게 위안을 주는지!
그리고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책을 만나게 된다.
여섯살때 이미 세살짜리 아이에게 불을 지른 아이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치유가 가능하긴 한걸까? 그 아이가 여섯살이 되기까지 겪어야 했던 그 많은 일들을 그 아이에게 '없었던 일'로 만들어 줄 수가 없는데, 그럴땐 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여섯살 아이에게 그 모든것을 잊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사랑한다 속삭여주면, 널 믿는다고 속삭여주면 그것은 완벽한 치유가 될까? 아니, 이미 영혼을 많이 다친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에, 아무리 어른이라도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게 될까? 선생님이 나를 길들였으니 나에게 책임도 있는거에요, 라고 말하는 아이를 더이상 아프게 하지 않는 일이 가능할까?
나는 토요일, 부산으로 가는 KTX 안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몇번이고 책장을 덮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실화인데, 이 모두가 다 실존하는 인물들인데, 그 아픔의 크기는 도저히 현실의 것이라고 믿고 싶어지질 않아져서.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이런 상황이 아니라는 것에도 감사했다. 그러니까 이런 아이의 상처를 돌보아주는 역할을 내가 맡질 않았다는 것에. 나라면 토리 헤이든처럼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여섯살 쉴라를 언제나 끊임없이 사랑해주고 아껴주며 돌보아 주는 일을 내가 잘 해냈을리가 없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나 그런 아이들을 걱정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사람.
일요일, 부산에서 돌아오는 길. 1박을 했던 짐으로 가방은 무거웠는데, 돌아오는 길에 친구 생일 선물도 샀고, 엄마의 화장품도 샀다. 한쪽에는 내 가방이 한쪽에는 쇼핑백 두개가, 나는 어깨가 빠질 것 같았고, 그 추운 날씨에도 더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쉴라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서점까지 들러서 책을 사면 나는 길바닥에 쓰러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서점으로 향했다. 하루만 견디면 인터넷으로 편하게 배달 받을 수 있어, 심지어는 더 저렴하기까지 하지. 그러니 오늘은 그만 이 무거운 짐을 들고 집으로 가란 말이야, 라는 생각은 쉴라를 빨리 만나고 싶은 욕망에 지고 말았다.
서점에 도착해서 그 무거운 짐들을 들고 직원에게 이 책을 찾아 달라고 했다. 그리고 계산하고 다시 가방에 넣고 서점 바깥으로 나오는데, 머플러 안으로 땀이 난다. 아, 난 대체 뭘 하고 있는거지? 대체 왜 이러고 있는거지? 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쌩고생을 하는거지? 왜?
다 내가 바보라서 그렇다. 바보라서. 아, 정말 바보같아서 속이 다 상한다.
이 모든 것들과는 별개로, 나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맹세컨대, 정말로 사람은 나약해지면 끝장이다, 라고 세드릭 프레보가 말했다. 서른이 훌쩍, 아주 훌쩍 넘어도 근사한 청년 앞에서는 심장이 거세게 팔딱거리다니, 노가리를 뜯는 손이 떨리다니,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