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는 씨네큐브에 가 <리빙: 어떤 인생>을 보았다.
사실 내가 딱히 보고 싶다고 생각한 영화는 아니었는데, 친구랑 영화 한 편은 보고 싶고, 켄 로치 감독의 작품이 씨네큐브에서 한다고 했는데 아직 개봉전인것 같고, 그렇다면 무슨 영화가 하나 극장을 둘러보아도 마음에 드는 게 별로 없어서, 어차피 별로 마음에 드는 영화가 없다면 극장으로 선택하자, 하고는 씨네큐브에서 상영중인 영화를 본 것이다.
한 때는 영화를 선택할 때 어떤 정보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씨네큐브에서 뭐하나 보자~' 하고 씨네큐브를 고정시킨 뒤 본 적도 있었다. 하하하하하.
주인공 '윌리엄스' 씨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6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다고 하고 길면 8-9 개월 정도.
그는 시청에서 근무하며 부서 책임자인데 부서에 일이 들어오면 다른 부서로 넘기거나 쌓아두는 것이 몸에 배어있다. 그건 시청의 다른 부서들도 마찬가지. 그런 그가 시한부 인생을 앞두고 공터에 놀이터 짓는 민원을 처리하기로 한다.
윌리엄스 씨는 아들 부부랑 살고 있었는데 아들 부부는 아버지와 살갑지도 않고 어서 빨리 아버지와 떨어져 살고 싶다. 윌리엄스 씨의 아내가 남긴 돈은 어차피 아버지와 아들에게 남긴 돈 아니냐, 그러니 그 돈 달라고 해서 나가자, 가 아들 부부의 공통된 목표랄까.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에게 그 얘기 하기를 주저하고 그러면서도 아들 부부가 속삭이는 소리는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린다. 윌리엄스 씨는 자신이 시한부라는 것에 대해 아들에게 말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아들에게도 아들의 삶이 있으니까, 라고 말하지만 당연하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아버지가 자신에게는 병이 있음을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들은 흐느낀다. 돌아가신 뒤에 흐느끼면 뭐하나, 돌아가셨는데.
나는 아들 부부의 아버지로부터 떨어지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고 딱히 아버지랑 대화하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도 이해가 됐다. 나라고 뭐 그 아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니까. 그런 한편 내 삶의 기한이 언제까지라는 선고를 받은 윌리엄스 씨의 삶에 있어서도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오래전에는 그건 남의 일 같았는데 이제는 죽음이 나의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에게도 분명히 닥쳐올 일이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어차피 늙어 죽을건데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 라는 물음을 영화를 보면서 수차례 했다.
그런 한편, 윌리엄스 씨는 자신의 시한부 삶을 앞두고 노래 한 곡을 떠올리며 부르는데 그러다 노래 중 엄마가 언급되는 부분에서 울컥하고 노래를 멈춘다. 가사의 맥락상 내가 죽으면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라는 뉘앙스였다. 그 부분에서 나도 울컥했다. 엄마가 돌아가신다면 그 일은 내 평생 나와 함께 가야할 슬픔일텐데 그런데 내가 죽으면 엄마랑 같은 곳으로 향하는게 아닌가, 생각이 든것이다. 에휴...
영화를 보고 나와 친구와 함께 걸으면서 얘기했다.
어차피 늙고 병들어 죽을건데 인간은 왜 태어난걸까..
그건그렇고,
책을 샀다.
《북유럽의 집》이라니. 왜요, 제가 북유럽에 집 짓고 살 사람처럼 보이세요?
그럴지도..
저 책, 표지 보는 순간 닥치고 사버렸다(어쩐지 미미 님도 좋아하실듯 ㅋㅋ). 하하하하하. 아니 너무 좋지 않나요? 책 받자마자 휘리릭 넘겨가며 집들 구경했다. 이렇게 풍경이 좋고 넓은 집인데 왜 다들 서재는 별로 안꾸미나요? 나라면 서재를 어마어마하게 꾸밀 것 같은데, 나는 그들이 아니고 그들은 내가 아니며 나는 네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니다.. 뭐 그런거지. 다시 한 번 찬찬히 넘겨봐야지.
《남녀차별은 왜 생겨났나?》는 청소년 대상 책인데, 작가가 '프랑수아즈 에리티에' 여서 샀다. 《아니 에르노의 말》읽다가 언급된 작가인데, 오오 한 번 읽어보고 싶은데? 하고 검색했더니 책이 많이 검색되지는 않더라. 작가 이름부터 어려워서 이 책으로 접근해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 사실,
집에 《페미니즘의 역사》가 있기는 하다. 하하하하하. 프랑수아즈 에리티에 단독 저자는 아니지만, 이미 갖춰두고 있긴 했어. 언제나 그랬듯이..
《발코니》는 '장 주네'의 작품. 장 주네 라면 내가 잘 모르는 작가인데,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읽다가 언급되어 찜해두었던 작품이다. 케이트 밀렛은 장 주네를 극찬했는데, 오 왜 뭔데 뭔데 왜왜 이러면서 보관함에 담아둔지 오래. 중고로 나왔길래 얼라리여~ 하고 구입했다.
《생각하고 싶어서 떠난 핀란드 여행》은 '마스다 미리'의 작품. 내가 이 책을 산 걸 본 e 는 내게 '어 이건 네가 살 것 같지 않은 책인데?' 했다. 내가 마스다 미리를 읽진 않을 것 같다는 거다. 맞다. 이 책의 존재를 진작 알았어도 나는 '마스다 미리 그만' 이라고 생각해 읽을 생각도 안했다. 그러나 올해 1월 1일 나는 핀란드 배경인 영화를 보았고, 핀란드를 넣고 책들을 검색해보았고, 북유럽에 집 짓고 사는 책도 그래서 산거고 마스다 미리 이 책은 미리보기를 보니 사진이 막 있어? 그래서 꺅 좋아, 사진 보자! 하고 샀더니, 정작 실물 책에서 사진은 앞 페이지 몇 장이고 뒤는 다 글이었다. 마스다 미리의 글이 궁금했던 건 아니지만, 뭐 그래도 샀으니까.
그러고보면 미래는 예측불허 임이 틀림없다. 나는 내가 이렇게 핀란드 관련 책들을 한 권씩 찾아 보게 될 줄은 작년엔 미처 몰랐단 말이지. 1월1일에 본 영화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그리고 자꾸 이렇게 핀란드 책 보다 보니까 퇴사하지 않은 상태로 일단 한 번 다녀와봐? 막 이런 마음이 되고 그런다. 갔다가 배타고 에스토니아도 한 번 다녀오고.. 아 그런데 살짝 쫄리긴 한데. 도전? 아 모르겟다. 혼란스럽다. 이건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아니, 나 왜 갑자기 핀란드 꽂혔나요? 왜죠?
김소연 시인의 《촉진하는 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그 이유, 정희진의 오디오 매거진을 듣고 사게 되었다.
매거진의 그 회차가 참 좋았다.
지난번 다른 작가가 나왔을 때는 겨우 다 들을만큼 듣기가 싫었다. 나는 정희진 쌤과 ㅇ 작가가 함께 나누는 대화가, 그 분위기가 듣기 힘들었다. 그들은 서로 좋아한다는 듯 말했지만, 내가 듣기엔 그 합은 좋지 않았고 한쪽이 위로 올라가고 한쪽이 심하게 아래로 내려가는, 동등하지 못한 대화로 느껴졌다. 그런데 내 친구들 중에도 나랑 같은 걸 느껴서 차마 그 회차를 다 듣지 못한 친구들이 있더라. 나는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한쪽이 올라가고 한쪽이 내려가는 게 너무 싫다. 그런데,
김소연 시인은 자꾸 자기를 낮추려는 정희진 쌤을 끌어올려주고 있더라. 어느 틈에 희진 쌤도 자기를 올리게 되고 그렇게 자꾸만 균형을 맞추려는 의지가 보였다. 그건 아마도 김소연 시인의 기질일 것이다. 너 그러지마, 너는 충분히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야, 라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달까. 그래서 듣기가 참 좋았다. 목소리도 말투도 다 좋았다. 잘 몰랐는데. 시를 되게 처절하게 쓴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희진쌤과 소연 시인은 동갑이라고 했는데, 가족에 대해서도 다르면서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그에 대해서도 서로 맞는 대화를 했다. 그렇게 한참 이 두분의 시에 대한, 가족에 대한, 엄마에 대한, 사회에 대한, 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지막, 김소연 시인은, 자신의 시인 <촉진하는 밤>을 들려주었다. 이미 소연 시인의 가족과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이라 그래서였을까. 소연 시인이 직접 읽어주는 촉진하는 밤을 듣는데, 길을 걷다가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그래서 샀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의, 어떤 그림의, 어떤 시의 맥락을 물론 모두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맥락을 알고 나면 그전과 달리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 그림에, 그 이야기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 알고 접한다면 감상 자체가 달라진다. 만약 촉진하는 밤을 내가 그저 무방비 상태로 만났다면 어떻게 느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김소연 시인의 이야기를 듣고 만난 촉진하는 밤은, 정말이지, 너무 좋았다.
<촉진하는 밤>
열이 펄펄 끓는 너의 몸을
너에게 배운 바대로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느라
밤을 새운다
나는 가끔 시간을 추월한다
너무 느린 것은 빠른 것을 이따금 능멸하는 능력이 있다
마룻바닥처럼
납작하게 누워서
바퀴벌레처럼 어수선히 돌아다니는 추억을 노려보다
저걸 어떻게 죽여버리지 한다
추억을 미래에서 미리 가져와
더 풀어놓기도 한다
능멸하는 마음은 굶주렸을 때에 유독 유능해진다
피부에 발린 얇은 물기가
체온을 빼앗아 간다는 걸
너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열이 날 때에 네가 그렇게 해주었던 걸
상기하는 마음으로
밤을 새운다
앙상한 너의 몸을
녹여 없앨 수 있을 것 같다
너는 마침내 녹을 거야
증발할 거야 사라질 거야
갈망하던 바대로
갈망하던 바대로
창문을 열면
미쳐 날뛰는 바람이 커튼을 밀어내고
펼쳐둔 책을 휘뜩휘뜩 넘기고
빗방울이 순식간에 들이치고
뒤뜰 어딘가에 텅 빈 양동이가
우당탕탕 보기 좋게 굴러다니고
다음 날이 태연하게 나타난다
믿을 수 없을 만치 고요해진 채로
정지된 모든 사물의 모서리에 햇빛이 맺힌 채로
우리는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유경이 클 때
꿈에 깃들지 못한 채로 내 주변을 맴돌던 그림자가
눈뜬 아침을 가엾게 내려다볼 때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
참 좋구나
우리의
허약함을 아둔함을 지칠 줄 모름을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더딘 시간을
이 드넓은 햇빛이
말없이 한없이
북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