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 출근하기 위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내 옆으로 누군가 훅-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자신의 핸드폰을 내게 들이밀었다. 자신의 손가락으로 핸드폰 화면을 가리키는데 얼핏 보니 지하철 노선도였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건 '하남검단산' 역이었다. 아, 말을 못하시는 분인데 지하철 어떤 거 타는지 물어보시는구나, 싶어 알려드리려다가 지하철 역마다 작게 써있는 중국어를 보게 됐다. 아, 중국 분이시라 한국말을 못하시나 보구나. 어쨌든 지금 이 열차가 아니라 다음 열차를 타셔야 하는데, 싶어 그대로 한국말로 말씀 드리니 이 분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보신다. 흐음. 전혀 못알아들으시는데, 그렇다면,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
역시나 무슨 말이냐고 나를 또 빤히 보신다. 이 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중국말일텐데, 나는 중국말을 전혀 몰라? 그렇다면 지금 오는 열차가 아닌 다음 열차를 타라는 걸 어떻게 알릴 수 있지? 하다가 퍼뜩, 핸드폰에 깔린 <파파고> 앱이 생각났다. 얼른 핸드폰을 꺼내 그 앱을 실행시켜서,
"지금 들어오는 열차 타지 마시고 다음 들어오는 열차 타세요"
를 입력한 뒤 중국어로 바꿔서 화면을 보여드렸다. 그 분은 내 폰의 화면을 읽으시고는 알아들었다고 고개를 끄덕이시며 손짓으로 이 열차 아니고 다음 열차를 열심히 표현하셨다. 나는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타야 할 열차가 도착했고, 나는 열차를 탔다. 중국어만 할 줄 아시는 분께,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내가 지하철 어떤 걸 타야할지 알려드렸어. 파파고 앱의 도움을 받았더니 그게 가능했다. 이제 나 중국에 이민 가도 되겠는데? (아님)
지난 주는 회식도 있었고 친구랑 만남도 있었고 엄마 칠순(은 원래 27일이지만)이라 온가족 함께 모여 점심도 먹었다. 책을 읽지 못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또 사랑 가득한 시간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번에 아가 조카가 어찌나 내게 잘 안기는지, 툭하면 와서 안기는 바람에 한껏 안아주었다. 1월이면 36개월을 꽉 채우는 아가 조카는 나에게 왜 자기 집에 놀러오기로 하고 안왔느냐고 뭐라 했다. 그래서 '응 고모가 다음에 꼭 갈게' 했더니, 글쎄 이러는 거다.
"약속을 지켜야지."
아... 조카야, 미안하다. 아.. 너한테 그런 말을 듣는 고모라니. 잘못했다.
맞습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인데, 지금 세살 조카에게 약속 못지키는 고모가 되었습니다. 인간 다락방, 똑바로 살자 진짜루!!
사춘기 조카 두 명에게 초코밤 줬는데, 집에 돌아가서 뜨거운 우유에 타먹고 좋아했다는 후문이다. 어제는 한주간 힘들었기 때문인지 낮잠도 잤고, 일어나서 갈비찜에 밥 두그릇 먹고 백종원 스페인 식당 본 다음에 다시 밤에 또 잤다. 책아, 미안해.. 그런 주제에 책을 또 샀다!! 물론, 조금 샀다. 나에게도 있는 것이다, 양심이라는 것이..
《귀로 보고 손으로 읽으면》은 정희진 오디오 매거진을 들으면서 알게된 책. 선생님이 언급하신 영화 <사랑이 머무는 풍경>은 나도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이다. 우연히 티비 채널 돌리다가 보게된 영화였는데, 그 때 당시에 꽤나 충격이었다. 그러니까 나야말로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보게 해주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눈을 보이게 해주었는데 그 사람이 더 힘들어할 줄은 몰랐다고 해야할까. 당연히 기쁘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서, 오히려 소리들과 눈앞에 보이는 것들로 인해 더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면서 아니, 이럴 수가 있는거구나! 했었더랬다. 보이지 않는 눈이 보이게 됐을 때 좋은 건, 그전에 이미 보는 훈련이 되어 있던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 같다.
《아니 에르노의 말》은 아니 에르노를 막 좋아한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가지 복잡한 마음이 있는 작가이기 때문에 읽어보려고 샀다. 아주 오래전, 좋아하는 친구가 아니 에르노를 좋아한다고 해서 어디 그러면 나도 한 번? 하고 《단순한 열정》을 읽어보았다가 너무나 솔직해서 지나치게 솔직해서 불편한 마음을 가졌더랬다. 으앗, 내 친구는 좋아하지만 나는 아니다, 했었는데, 그 후에 몇 년이 지나 한창 사랑에 빠진 와중에 단순한 열정을 다시 읽었다. 세상에, 매 문장에 내가 이해못할 건 없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바로 이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솔직함은, 내가 사랑에 빠진 걸 솔직하게 표현했을 때 바로 그것들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 후로 아니 에르노 좋은데? 하며 몇 권 들었다가 오래 못가고 나가 떨어지게 되었는데, 너무 사랑에 집착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에르노라면 《남자의 자리》처럼, 계급 차이를 드러내는 글에서 진가가 드러나는 게 아닌가 싶었던 거다. 너무 남자남자 사랑사랑 섹스섹스 연애연애 하는데, 그 지점은 내가 되게 피곤해하는 지점이다. 그런 한편, 사랑에 빠졌어도 섹스에 풍덩 빠졌어도 아니 에르노는 날카로운 시선을 가지고 있다. 내 온 몸을 던져 사랑에 매진하지만, '이렇게 사랑에 빠진 나'를 중심에 놓고 날카로운 시선은 갖고 있긔!! '아니 에르노의 말' 이라면, 바로 그 냉철한 계급에 대한 인식 차이, 사랑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있을 것 같아서, 그것이 표현될 것 같아서 읽어보고 싶어졌다. 아니 에르노가 세계적인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냥 열정적으로 사랑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래서?' 를 표현하는 작가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무도 죽음을 모르지만》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 샀다.
작년과 올해, 나는 가까운 자리에서 죽음을 마주쳐야 했다. 그리고 죽음을 마주칠거라는 각오도 해야 했고, 그것이 닥쳐올까봐 두려워하기도 했다. 이 시간과 경험들은 나를 다른 식으로 생각하게 만들었고, 올해 '이번 해의 결산'을 한다면, 가장 좋은 책을 그 관점에서 골라두게 되었다. 노화, 죽음, 고통은 올 한해 내 화두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어휴, 세 권 사니까 책마다 산 이유 적을 수 있어서 좋구먼. 역시 책은 일주일에 3~4권만 사는 걸로 하자. 세상 간단하고 좋구먼.
이번주에는 책을 좀 열심히 읽어야 하는데 그게 될지 모르겠다. 연말이라 그런지 여러가지로 바쁘다. 그건 아버지 어머니 생신이 12월에 몰려 있어서 그렇기도 하다. 내심 연말에 2박3일인데 혼자 여행 다녀올까 생각하며 갈팡질팡 하고 있다. 맥스봉 소세지나 하나 먹어야겠다.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