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아가씨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쟁이 끝난 후의 오스트리아, 아빠도 오빠도 죽고 크리스티네는 병든 엄마를 모시며 우체국에서 일하고 있다. 그야말로 가난에 허덕이며 근근이 먹고 살고 있고 크리스티네의 삶은 어둡기만 하다. 그런 크리스티네에게 스위에서 놀러오라는 이모의 초대장이 날아온다. 젊은 시절 유부남과 불륜관계였다가 그 관계를 정리하며 큰 돈을 받고 미국으로 가 정착했던 크리스티네의 이모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언니가 그립고 한 번도 본 적없던 조카를 보고 싶어 자기가 휴가를 보내고 있는 호텔로 초대한거다. 제대로된 옷한벌 없는 크리스티네는 병든 엄마를 두고 가도 될까 걱정하지만, 크리스티네의 엄마는 적극적으로 크리스티네를 보낸다. 너도 젊음을 즐겨봐, 다른 삶을 가져봐, 엄마에게 시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봐. 그렇게 크리스티네는 기차를 타고 오랜 시간이 걸려 스위스의 화려한 호텔에 도착한다. 입고 있는 옷이 남루해 초라하게 느껴지고 자꾸만 위축되고 그래서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크리스티네에게 이모는 이곳에 걸맞는 옷을 사주고 속옷을 사주고 맛있는 음식을 사주며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고 몸소 경험하게 해준다. 이렇게 크고 깨끗한 방에서 나같은 사람이 자도 될까, 움츠러들었던 크리스티네는 비싼 옷을 입고 미용실에 가 머리도 다듬으니 한결 자신감이 생긴다. 게다가 차림에 자신감이 생기자 호텔에 머무르는 다른 손님들도 다가와 말을 건다. 자신감 뿜뿜한 크리스티네는 한결 밝아지고 밝아진 크리스티네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그런 크리스티네에게 구애하는 신사도 생긴다. 와, 이런 곳이 있어, 이런 삶이 있어, 난 여기가 너무 좋아, 짱이야!! 크리스티네는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볼품없었는지 잊고 싶고 그리고 들키고 싶지도 않아 사람들이 이모부의 성(family name)으로 자기를 착각하는 걸 애써 수정하지 않는다. 가난한 내 성으로 알려지기보다 이곳에서는 부유한 이모부의 성으로 알도록 두자, 뭐 어때.


그러나 그녀에 대한 소문이 호텔에 퍼진다. 사실 그녀의 성은 가짜라는 사실이, 아주 가난하다는 사실이, 그녀의 지금 모습은 일시적이라는 사실이. 물론 거짓을 말한 건 잘못된거지만, 그런 거짓이어야만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문화라는 건 제대로 된 것인가. 크리스티네 너무 좋다고 호들갑 떨면서 그녀와 어울리려던 사람들이, 그녀의 원래 신분을 알게 되자 차갑게 돌아서는 건 도대체 왜 때문인가. 호텔에 떠도는 소문을 알게된 뒤 이모는 그러다 자신의 과거까지 밝혀질까 두려워 얼른 크리스티네를 집으로 보내버린다. 크리스티네는 호텔에 떠도는 소문과 그리고 이모가 자신을 보내려고 애쓰는 모습에 절망하며 이모로부터 받았던 옷들을 다 그대로 둔채, 다시 원래의 초라한 옷을 입고 초라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행복하지 않다. 돌아와보니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착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대신 돌보아주던 이웃집 남자의 옷은 남루하기 짝이 없다. 우체국에서 일해봤자 몇 푼 안되는 돈을 받고 남아 있는 형제 자매들은 뭘 하든 '너무 비싸다'는 말을 하며 엄마의 유품을 가져가려고 애를 쓴다. 이 모든게 지긋지긋하다. 분명 저기 어딘가에 다른 삶이 있다는 걸 아는데, 얼마나 아름답고 깨끗하고 화려한 삶이 있는지를 분명 아는데, 크리스티네가 아는데, 그 세계에 속해 있었는데, 이제는 근근이 먹고 살아야하는게 너무 지긋지긋하다. 그런 그녀에게는 그렇게 풀지 못한 분노가 쌓여있고, 그녀는 분노에 잠식되어 있다. 그런참에 자신처럼 아니 자신보다 더 분노에 잠식되어 있는 남자, 페르디난트를 만나게 된다. 전쟁에서 두 손가락을 잃고 역시 가난에 허덕이는 남자. 일자리 구하기가 너무 힘들고 결국 가까스로 구해도 언제 짤릴지 모를 삶, 일하면서도 언제나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이 사회는 얼마나 엉망진창인가, 분노에 함몰되어 있는 남자. 너무나 가난하고 그 가난이 세상의 부조리함인것도 알겠는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는 그렇게 연인이 된다. 서로의 분노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어줄 수 있는 사람. 그녀와 함께 있길 원하는 페르디난트를 보며 나는 크리스티네에게 애원했다. 안돼, 그 손을 잡지마, 분노에 잠식당한 사람의 손을 잡지마, 안돼, 빠져나와. 그러나 크리스티네는 내가 아니고 나는 크리스티네가 아니다.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는 사실 자신들이 하는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서로가 서로밖에 없기 때문에 이 관계를 유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연인의 데이트란 얼마나 비참한가. 이들은 돈이 없다. 아무리 아끼고 아껴도 돈이 없다. 처음 성관계를 할 때 들어갔던 모텔이 너무나 후져서 크리스티네는 비참했다. 저기 어딘가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호텔이 있다는 걸 아는데, 그리고 그런 호텔에서 자신에게 구애했던 남자들은 또 돈 많은 남자들이었는데, 돈 걱정 하지 않고 아무곳이나 들어가고 아무것이나 먹을 수 있는 그런 남자들이었는데, 지금 여기 이 남자는 누구? 나는 어디? 비참하기 짝이 없지만, 그러나 가난한 우체국 아가씨, 가난한 나라의 소모품 크리스티네를 더이상 화려한 남자들이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의 가난은 이어지고 이어지고 그러니 갈 데가 없다. 남자는 자신 혼자 사는 집도 마련하지 못한 처지라 이들이 주말에 데이트를 하면 까페에 처박혀있기 일쑤다. 이 데이트가 어떻게 기쁘고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생활도 서로도 점점 더 비참할 때쯤, 남자는 심지어 다니던 직장을 잃고 자살을 결심하며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크리스티네를 찾아온다.



부자들의 화려한 휴가와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의 매일의 일을 대비시키며 드러나는 빈부의 격차는 너무나 부조리하다. 왜 어떤 사람은 매일 피곤하게 일을 해도 머물 곳이 없는걸까. 왜 어떤 사람들은 돈걱정 없이 어디든 이동하고 또 어디든 머무를까. 이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해서 페르디난트의 입을 빌어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이런 사회를 몸소 알고 있는 만큼, 언급했듯이, 그는 분노에 가득 차있다. 나는 그의 분노와 크리스티네의 분노는 합당하고 마땅히 그러할만하며 누구든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분노에 잠식된 이들을 만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나야말로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늘 말해오면서, 그러면서도 가난 때문에 분노에 잠식된 이들을 마주하고 싶진 않은 거다. 분노에 잠식당한 사람들의 옆에 있으면서 그 분노가 내게 전해질 것이 나는 너무도 겁이 난다. 크리스티네에게 안돼 도망가, 너는 지금 너의 분노도 어쩌지 못하면서 왜 또 다른 분노를 옆에 두려는거야!!



그런 한편, 나는 그동안 내가 강하게 믿어왔던 신념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러니까, 경험의 확장은 선인가? 하는 의문.


나는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더 알고 싶고,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닌 내 몸으로 체험하고 싶다. 사소하게는 '저 영화 엉망이야' 라는 말을 들어도 '그럼 안봐야지' 하는게 아니라, '얼마나 엉망인지 내가 한 번 봐야겠네'가 되는 것이다. 동시에 '나에게는 좋을 수도 있지 않아?' 하는 생각도 하고. 그러니까 나는, 내 경험을 믿고, 하나의 경험으로부터 또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유가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경험의 확장은 곧 세계의 확장을 의미했고, 이것은 언제나, 부정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참이었단 말이다. 지금까지 평생 그렇게 믿고 살았다고. 그런데 크리스티네를 보자 묻게 되는 거다.


경험의 확장은 과연, 정말로, 선이기만 한가?



크리스티네는 스위스에 휴가를 가게 되며서 경험의 확장을 맞닥뜨린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그리고 낯선 문화. 내가 와보지 않은 곳이야, 내가 먹어보지 못한 것이지, 내가 놀아보지 못한 놀이야, 나는 한 번도 이런식의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어! 이 모든 일들은 그녀를 들뜨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이런 세계가 있다니, 너무 짜릿해!! 


다시 우체국으로 돌아와서 와, 그런 세계를 경험했었지, 대단했어, 로 끝나는게 아니라, 그런 세계가 있는데 나는 왜 이모양 이꼴이지? 왜 그게 일시적으로만 허용된거지? 왜 그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나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지? 왜 내 주변 사람들은 다 가난하지? 왜 비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 하며 오히려 분노에 침몰한다. 


새로운 경험으로 내가 확장된 게 아니라 새로운 경험으로 내 자신을 절망속으로 더 밀어넣게 되었다면, 경험의 확장은 반드시 선이라고 볼 순 없는 거 아닌가. 그렇지만, '그렇게 더 비참해질 수도 있으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아' 라는 전제도 너무 엉망진창이지 않나. 



다른 세계가 저기 있다는 걸 알면서 그러나 그것이 결코 내것이 될 수는 없다는 부조리함 혹은 기이함. 도시 한 복판에 통유리창 고층 아파트에 누군가 살고 있는데, 이십년이상 아무리 일해봤자 그런 집 근처에도 가볼 수 없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하는 갸웃함. 확실히 이건 잘못됐다. 이건 이상해. 이상한 게 맞다. 이상한 거 알면서 분노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분노에 잠식당하진 말자고 꼭 당부하고 싶다. 분노는 힘이 세다. 분노에 잠식 당하면 종국에는 분노가 나를 잡아먹어 버린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크리스티네 보다 형편이 더 낫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애써 눈감는건지도 모르겠다. 이미 신경 쓰는 사람에게 '신경쓰지마' 라는 말은 아무런 힘이 없듯,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분노가 널 잡아먹게 두지마'라는 말은 얼마나 효용이 있을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이겠지.



아주 좋은 소설이었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역시 소설 안에 다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소설 안에 다 있다. 역사와 정치와 사회와 문화가. 소설은 가장 좋은 인문학이다.



"아니야! 다른 일자리는 찾지 않을 거야! 지쳤어! ‘일자리‘라는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해. 지난 11년 동안 용케도 여기저기서 비정규직 일자리를 얻었는데 그때마다 간신히 연명만 했을 뿐, 자리를 잡지는 못했어. 일자리는 항상 있었지만 실제로는 갈 곳이 아무 데도 없었지.

나는 4년 동안이나 ‘전쟁‘이라는 살인 공장에서 일했어.

그 후에는 이런저런 공장과 회사를 전전했지.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위해 뼈빠지게 일했어. 돈 많은 사업가,자본가, 소유주 들의 재산을 늘려주는 데 내 인생을 허비했어. 그렇게 죽도록 일하고 나면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어. ‘자, 이제 그만 나가! 너는 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 이제 다른 데로 가봐!‘ 그러면 나는 또 다른 일거리를 찾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어. 이제 정말 더는 못 하겠어. 지쳤어, 더는 안 할 거야!"

크리스티네가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남자가 여자의말을 가로막았다.

"크리스티네, 또다시 직업소개소에 가서 구걸하는 거지처럼 대기표를 받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짓은 못 하겠어. 그러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 그동안 나는 일자리를 찾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거절이 예정된 전화를 걸고, 답장 없는 편지를 보내고, 아침이면 청소부가 쓰레기로 가져가는 이력서와 구직 신청서를 수도 없이 썼어. 이제 더는 못 하겠어.

그나마 입사를 지원했던 회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통지를 받을 때도 있었지. 대기실에서 나와 똑같은처지에 놓인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비참한 기분으로 앉아 기다리다가 한참 만에야 호명되어 비굴하게 굽실거리며 면접실로 들어가면 면접관이라는 자들이 냉랭하고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오만하게 나를 뜯어보며 앉아있었어. 수십, 수백 명의 지원자가 일자리 하나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데,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내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면접관이 내 옷을 하나하나 벗겨내듯이 내 신청서와 이력서를훑어볼 때마다 나는 한편으로 취직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과 다른 한편으로 팔려가기를 기다리는 애완동물 상점 쇼윈도의 강아지가 되어버린 모욕감 사이를 오가며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내부 심사를 거쳐 결과는 수일 내에 개별적으로 통보하겠습니다. 그러나 통보는 대부분 ‘애석하게도………‘ 라는 문구가 달린 불합격 통지였어. 나는 취직될 때까지 그 짓거리를 계속했어. 그리고 설령 취직이 되어도 1년 후에는 어김없이 해고되었지. 나는 지금까지 많이 참았어. 전쟁 때에는 밑창이 떨어진 구두를 신고 러시아의 시골길을 일곱 시간씩 걸어 다녔어. 흙탕물을 마셔가며 어깨에는 기관총을 세 자루나 메고 다녔지.

포로가 되어 빵을 구걸하고, 삽으로 시체를 파묻고, 술에 취한 감시병에게 몽둥이로 구타를 당하기도 했어. 한끼 식량을 위해 중대원 전원의 군화를 닦거나, 음란한사진도 팔아봤어. 살아남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어. 그래도 모든 것을 참고 견뎠어. 언젠가는 그 지겨운 신세를 면하고 자리를 잡아 한 단계 두 단계 올라가면서 성공할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 그런데 매번 밑으로 떨어지기만 해. 요즘은 누구한테 구걸하느니 차라리 때려죽이거나 총으로 쏴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이제 더는 직업소개소 대기실을 어슬렁거리거나 곧바로 쓰레기가 되어버릴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쓰는 일은 안 할 거야. 나도 이제 나이가 서른이야. 더는 못 하겠어." -p.368


"미안해요. 하지만 이제는 정말 가봐야 해요." 여자가어찌할 바를 모르며 말했다.
"미안하다고요? 정말 미안해요?" 남자가 대뜸 여자에게 물어보면서 버림받는 자의 절박한 갈망을 감추지 못한 채 쳐다보았다. 여자는 남자가 망연한 표정으로 플랫폼에 홀로 서서 자신을 싣고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는 이 도시에,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 것이다. 여자는 자신에게 감정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남자의 존재가 느껴졌다. 한 남자가강렬하게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예전의 그 누구보다 강한 남자의 열망에, 여자는 온몸에 충격을 느꼈다. 자신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대단한 느낌이었다. 이제 드디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서 사랑받게 된것이다. 불현듯 남자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어졌다. 여자는 섬광처럼 빠르게 결심했다. 충동적으로 마음을 바꾼것이다. 여자는 몸을 돌려 남자를 향해 뛰었다. - P324

그리고곰곰이 생각하듯 말했다(하지만 사실은 이미 마음속으로결정한 것을 말했을 뿐이었다).
"저어…………. 당신과 같이 있어도 될 것 같아요. 내일 아침 5시 30분에 출발하는 새벽 열차를 타고 가면 되거든요. 그러면 형편없는 제 직장으로 늦지 않게 출근할 수있어요."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았다. 사람의 눈이 그렇게 순간적으로 빛날 수 있다는 것을 여자는 처음 알았다. 마치어두운 방에서 성냥불이 타오르듯이 남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여자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었다. 남자가 돌연 용기를 내어 여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요. 가지 마세요. 오늘 밤, 나와 함께 있어요." - P325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남자가 여자를 위로하며 말했다. "아무 문제도 없었잖아. 다음번에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내가 신경쓸게. 당신이 아직도그 일로 마음을 닫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내 잘못이아니잖아."
"맞아." 여자가 자신에게 말하듯 씁쓸하게 말했다. "나도 알아, 알고 있다고. 당신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야. 그렇다면, 누구 잘못일까? 왜 우리에게는 항상 그런 일이생기는 거지?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누구한테도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잖아. 그런데 우리가 한 걸음만 움직여도 세상이 우리에게 덤벼들고, 우리를 괴롭히지.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에게 아무것도 요구한적이 없었어. 난생처음 휴가를 갔고, 남들처럼 자유롭고가벼운 기분으로 휴가다운 휴가를 즐기고 싶었어.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남자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여자를 달랬다. - P350

"어쨌든, 아무 일도 없었잖아.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고. 경찰은 범인을 찾고 있었던 거야. 우리가 그 호텔에 있었던 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야."
"나도 알아, 안다고. 운이 나빴을 뿐이지. 하지만 거기서 일어난 일………… 당신은 이해 못 해, 페르디난트, 당신은 몰라.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처음 밤을 보낼 때 무엇을 꿈꾸는지, 남자를 만나기 전부터 어떤 것을 상상하고 있는지,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 나이 든 여자든 어린 소녀든 마찬가지야. 누구나 그런 꿈을 꾸지.
당신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거야.
여자들은 누구나 그 순간을 성대한 축제와 같은 것으로상상하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로 여긴다고. 어쨌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기억이 여자로 하여금 세상의 온갖 의미 없는 것들을 극복하게 해주는힘이 되는 거야. 오랫동안 당신도 그런 순간을 꿈꾸고 상상했을 거야. - P350

아니, 당신은 절대로 상상하지 않았을거야.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겠지.
그저 아름다운 어떤 것으로, 막연히 꿈꾸었을 거야. 그런데 그 꿈이 내게는 몹시 끔찍하고, 견디기 힘들고, 무서운 일이 되어버렸어. 당신은 그 꿈이 무너졌을 때 어떤 기분인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 꿈이 무너지거나 더럽혀진다면, 아무도 되돌릴 수 없어."
남자가 여자의 손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여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지저분한 바닥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해 봐. 결국 돈이 문제야. 구역질나고 더러운 돈. 그 치사한 돈 말이야. 돈만 있었다면, 지폐 두세 장만 있었다면 나도 축복받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거야. 어디든, 언제든 훌쩍 떠나버릴 수 있겠지. 아무도따라올 수 없는 곳에서 혼자 자유롭게 마음껏 여행할수 있을 거야.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멋진 인생일까. 당신도 마찬가지지. 돈만 있다면, 당신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텐데………. - P351

우리 같은 사람들은정말 개 같은 신세야. 다른 사람들이 쓰던 더러운 방에기어들어 갔다가 내쫓기듯 나왔잖아. 아아, 이렇게 참담한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여자는 얼른 덧붙였다.
"알아, 당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아직도 무서워. 당신은 내가 왜 이렇게 무서워하는지 이해해줘야 해. 시간이 필요해. 시간이 지나야 괜찮아질 거야."
"그런데………… 오늘 돌아갔다가 다시 나를 보러 올 거지?"
남자의 물음에 배어 있는 불안감을 감지하고 여자는기분이 풀렸다. 남자가 처음으로 여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래, 다시 올 거야, 믿어도 돼. 다음 주 일요일. 다만, 알지? 제발 그것만 부탁해." - P351

여자가 떠났다. 남자는 역 구내식당으로 들어가 브랜디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바싹 말라버린 목구멍으로넘어간 브랜디가 뜨거운 흔적을 남기며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뻣뻣하게 굳었던 사지를 이제야 다시 움직일 수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두 팔을 휘두르며도로를 따라 성큼성큼 빠르게 걸었다. 행인들이 놀란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공사장에서 일하러 갔을 때에도 인부들은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남자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전에는 언제나 얌전하고 조용했던 그가 걸핏하면 화를 내고늘 언짢아 보였기 때문이다. - P353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돈의 위력을 실감했다. 돈은 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없을 때에는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따라서 돈은 ‘자유‘라는 거룩한 선물을 주기도 하지만,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단념해야 할 일이 생기면 분노가 솟구치게 한다. 이른 아침 어둠 속에 앉아 뿌옇게 밝아오는 창밖을 바라볼 때나, 황금빛으로 물든 커튼이 돈 많은 사람에게 안식과 자유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화가 치밀어올랐다. 부유한 남자들은 원하는 여자들과 함께 아름다운 커튼이 쳐진 방 안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갈 곳도 없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무거운 걸음으로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자연계에서는 오직 바다만이 내포하고 있는 잔인함과 같은 것이었다. 바다는 엄청난 양의물을 가지고도 사람을 갈증으로 죽게 할 수 있다. 세상에는 아늑하게 햇빛이 들어오고 폭신한 침대가 있는 조용하고 안락한 방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 P356

수십만, 수백만 개의 방, 셀 수도 없이 많은 방, 아무도 사용하지않거나 비어 있는 방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는 그 방 한 칸이 없었다. 잠시 서로 기대거나 입을맞출 공간이 없었다. 온종일 쏘다니며 느꼈던 미칠 것같은 갈증과 분노를 풀어줄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으리라고 자신을 속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거짓말을 시작했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카페에 앉아 신문 구인 광고를 읽거나 구직 신청서를 썼고 괜찮은 일자리에 대한 전망을여자에게 들려주었다.
"전쟁 때 만난 친구가 꽤 큰 건설회사의 관리직으로일자리를 구해주기로 했어. 그 회사에 다니면 돈을 많이벌어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내 꿈이었던 건축사가 될 수 있겠지." - P357

여자도 이야기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빈으로 자리를 옮겨달라고 본청에 전근신청을 냈어.
그리고 힘을 좀 써달라고 삼촌을 찾아가 부탁도 했으니까 1, 2주 후에는 틀림없이 좋은 소식이 올 거야." - P357

"솔직히 말해봐 우리 만남에 무슨 의미가 있어? 둘이 추레한 행색으로 거리나 카페에 앉아 있는 것이 전부잖아. 서로 도움도 되지 못하고, 서로 거짓말이나 해야 한다면 네 마음도 아프잖아. 우리가 그렇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우리에게 희망이란 게 있어? 내 나이지금 서른이야. 그런데 원하는 일을 할 기회가 없어. 늘 취직했다가 쫓겨나기를 반복하다 보니, 한 달이 1년처럼 느껴져. 나는 세상을 너무 몰랐어. 사람답게 살아본 적도 없고, 그저 ‘나도 성인이 되었으니 이제 내 인생을 시작하는구나.‘ 하고 막연하게만 생각했지. 하지만 이제 내게는 아무런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
내게 어느 날 갑자기 좋은 일이 생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나는 끝났어. 이제는 일어설 수가 없어. 당신도 앞으로 나 같은 남자는 만나지 말아야 해. 나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해. 당신 언니가 그것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내가 프란츠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원치 않았던 거지. - P371

지금은 내가 당신의 마음마저 혼란스럽게 하고 있을 뿐이야. 아무 의미 없어. 우리 이제 그만 헤어지자."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건데?"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여자는 여전히 긴장한 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지팡이 끝으로 땅바닥에 작은 구멍을 냈다. 그리고마치 온몸이 그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크리스티네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그, 그럴 생각은 아니겠지?"
"맞아." 남자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야. 난 지쳤어.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아, 끝내고싶어. 러시아에 있을 때 전우 넷이 그 길을 택했지. 순식간이었어. 나는 마지막 순간에 그 친구들의 행복한 표정을 봤어. 어렵지 않아. 이토록 힘들게 살기보다 훨씬 쉬워!" - P372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orgettable. 2023-06-01 0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로 읽었는데 원제가 그대로 제목으로 번역되어 새로 나왔군요. 이 원제가 더 나은 듯.. 와 저 이거 읽을 때 제목과 책의 1부를 읽으며 느꼈던 감정이랑 2부때랑 너무 달라서 괴리감에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같은 책 맞냐며.. 크리스티네 자체도 애정이 가는 캐릭터는 아니었어서 정말 마지막 부분은 괴롭게 읽었었네요..

다락방 2023-06-01 12:16   좋아요 2 | URL
이 책이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인줄 모르고 제가 있는데 또 사지 않았겠습니까? 에휴..
맞아요, 1부에서는 이 아가씨야 그러지마, 변신에 도취하지마! 막 이렇게 되었다가 2부에서 분위기 급반전 분노 팡팡 터지는데 와.. 저도 너무 괴로웠어요. 일하는 것도 괴롭고 버티는 것도 괴롭고 그러나 그들의 결심도 괴롭고 말이지요. 가난한 연인들의 데이트 너무 싫었네요 ㅠㅠ

잠자냥 2023-06-01 10: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의 원작에 비할 만큼 아주 좋은 리뷰입니다!
경험은 늘 선인가.... 이건 저도 회의적인데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크리스티네의 경험 같은 것에서도 분노만 하기보다는 그 분노를 조절할 줄 알거나 분노 외에 다른 것을 이끌어내는 능력도 필요한 것 같아요. 이를테면 부장님이나 저나 계속 월급쟁이로 살면서 다달이 떼가는 세금 이 정부 들어 더 올랐어?! 근데 고소득자들은 오히려 떨어졌다며? 분노 이글이글.........그런데 그 분노에 잠식당하면 답 없어요... 분노는 하지만 분노만 하고 있지 말고 그러니까 투표로....(님들아 제발 제대로 투표해... ㅠㅠ) 아니면 그 분노를 다른 식으로 돌리거나... 뭐 이런 거요.
페르디난트랑 사랑에 빠질 때 저도 아이구 이 아가씨야 도망가, 했답니다.

좋은 소설은 정말이지 가장 좋은 인문학입니다.
부장님 오늘 세 가지 메뉴 드세요~ ㅋㅋ

다락방 2023-06-01 12:15   좋아요 5 | URL
네, 잠자냥 님. 분노 외에 다른 걸 끌어낼 수 있어야 하고 그게 제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도 그렇게 살아주길 바라지만, 그러나 그들은 다른 걸 끌어낼 수 없을만큼 이미 모든 힘을 다 쏟지 않았나, 너무 열악한 환경 아닌가, 그정도도 끌어낼 수 없을만큼 지쳐버린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래서 분노에 잠식당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이게 오히려 저의 오만인것 같기도 하고, 참 여러가지로 복잡합니다. 그러다가 또다시 이게 그러니까 다 이 세상 탓이다!! 이렇게 되면서 세상이 미워지고요. ㅠㅠ

저는 소설을 비웃는 사람들은 소설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 얼마나 좋습니까, 소설 말이지요. 츠바이크의 이 소설은 정말 좋았어요!

은하수 2023-06-01 11: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저 또 저 문장들에 잠식당해요...
모든 문장을 다 인용하고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문장들이죠!
분노에 잠식당하지 않아야 하는데 ㅠㅠ 크리스티네와 페르디난트는 그럴수가 없었죠 전 그게 너무 이해되니까 저 두 사람을막을수가 없는거 아닐까 생각하게 됐거든요. 사실 어떤 선택을 하든 다 이해된다는게 너무 슬프죠!

다락방 2023-06-01 12:12   좋아요 2 | URL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돈의 위력을 실감했다. 돈은 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없을 때에는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는 문장을 읽을 때, 와 이건 참이다, 이건 사실이다 했어요. 몇 권 안되지만 츠바이크 책 읽으면서 저는 이 책이 제일 좋지 않나 싶어요. 음 <연민>도 좋았는데.. 아주 재미있게 그렇지만 답답해하고 안타까워 하면서 읽었습니다. 크-

은하수 2023-06-01 13:50   좋아요 2 | URL
네... 정말 쵝오 쵝오입니다~~^^
우리 플친님들 다~~ 읽으셔야 해요!
다 아는 사실인데 왜 뻔하게 느껴지지 않는걸까요?

얄라알라 2023-06-05 01:49   좋아요 0 | URL
은하수님,
서재 플친님들 리뷰를 그토록 기다리셨는데 다락방님께서 드디어^^

한국어판 책 제목이 두가지라는 것도 오늘 알았네요

˝소설 안에 다 있다˝^^

새겨 듣고 갑니다.^^

다락방 2023-06-05 10:09   좋아요 1 | URL
얄라알라 님, 이 책 참 좋아요.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좋은 소설책 안에는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거 같습니다. 후훗.

책먼지 2023-06-02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아 다락방님 이 책을 읽고 이런 명제를 던져주셔서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좋네요ㅠㅠ 저는 20대 후반에 엄청 돈이 많은 사람과 아주 잠깐 사귄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과 갔던 곳들, 그 사람의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 향유하는 문화, 사용하는 물건들 이런 거에 엄청나게 주눅들었던 한편으로 그 사람 곁에서 내가 느끼는 세계 외의 다른 건 다 너무 시시하고 초라하고 하찮아 보였거든요.. 그 사람과 다니면 걸을 일이 거의 없었고 무언갈 기다리거나 인내할 필요도 없었고 모든 게 다 편리하고 정돈되어 있고 맞춤한 그런 느낌이었는데 데이트 끝나고 돌아오게 되는 제 현실은 그게 아니니까 그 간극이 너무 커서 엄청난 감정의 진폭과 가치관의 혼돈이 왔었어요!! 지금에 와서는 그 사람과 사귀었던 경험을 여행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고 경험하고 나왔으면 됐다고 (나와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게 됐지만 돌이켜보면 당시에 저는 내가 얼마나 초라한 사람인지 들켜서 그 사람 세계에서 금방이라도 쫓겨날까봐 엄청난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시달렸었어요ㅜㅜ (사귀는 동안 불면증 엄청 심했고 음식 먹는 게 너무 힘들었어서 인생 최저 몸무게 갱신..) 어우 이 책 저는 교보문고에서 츠바이크 이름만 보고 낼름 집어왔는데 읽어봐야겠습니다!!!

다락방 2023-06-05 10:13   좋아요 2 | URL
저는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소설은 저를 반성하게 하는데요,
경험은 언제나 선이라고 믿고 있던 제 신념에 금이 가버렸어요. 저는 회복가능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데, 그러나 그 회복도 회복가능할만큼의 여건이 있었기에 가능한게 아닌가 싶고요.
제가 몇해전에 한남동에서 콘서트를 보고 당시 애인하고 가볍게 와인 한 잔 하고 주변 레스토랑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가장 저렴한 병와인이 99,000원 이더라고요. 가만있자, 그게 언제인가.. 14년은 아니고 13년도 아니고, 아마도 2012년 쯤이었을텐데요, 와, 제일 저렴한 와인이 99,000원인데 어떻게 마시냐! 이러고 완전 쫄아서 생맥주 두 잔 시키고(그것도 비쌌어요)병아리콩 샐러드 하나 시켜서(그게 제일 거기서 저렴했어요) 먹고 후딱 나가자 했거든요. 그런데 그곳의 모든 테이블에는 다들 병 와인이 놓여있더라고요. 그런데 거기 앉아서 병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이 다 저희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거예요. 심지어 ‘내일 레포트 제출할 수 있어?‘ 하고 오고가는 대화들에서 대학생인거 다 알겠는데, 직원 부르더니 대리 불렀다고 오면 알려달라고 하고 … 그날 대충격이었어요. 나는 구만구천원 와인 못마시는데, 고개를 돌려 내 애인을 보니 내 애인은 나보다 더 가난해 …
그러나 그런 기억이 있었고 나는 이제 한남동 안간다 어휴 할 수 있는건, 내가 빠져나올 수 있을만큼만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고요. 아무튼 경험은 선인가? 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 매우 좋은 책입니다.
책먼지 님이 이 책을 읽고 써주실 감상이 진짜 너무 기대됩니다!!

건수하 2023-06-02 17: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는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더 알고 싶고,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닌 내 몸으로 체험하고 싶다. 사소하게는 ‘저 영화 엉망이야‘ 라는 말을 들어도 ‘그럼 안봐야지‘ 하는게 아니라, ‘얼마나 엉망인지 내가 한 번 봐야겠네‘가 되는 것이다. 동시에 ‘나에게는 좋을 수도 있지 않아?‘ 하는 생각도 하고. 그러니까 나는, 내 경험을 믿고, 하나의 경험으로부터 또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유가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경험의 확장은 곧 세계의 확장을 의미했고, 이것은 언제나, 부정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참이었단 말이다.

저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지라 반가웠어요.

저는 요즘 다니엘이 부른 <인어공주> OST를 들으며 (예쁜데 노래도 잘하는 다니엘!) 이 만화 내에서 인어공주는 어떻게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 궁금해졌어요. 어릴 때 읽은 동화에는 왕자를 구한 후 왕자를 좋아하게 되어서 사람이 되려고 했으나, 요번 OST가사에는 사람을 궁금해하는 마음이 (아마 왕자 만나기 전인 거 같은데) 느껴져서요.


‘걸어다니는 걸 뭐라고 불러? 아, 다리‘
‘지느러미로는 멀리 못 가 다리가 없으면 춤도 못 춰‘
‘돌아다니는 곳을 뭐라 그러지? 아, 거리‘


다리, 거리, 춤추는 것.. 모두 알고 있는 거니까. 인어공주는 책을 읽었을까요?


그래서 사람이 사는 세계에 관심이 많았으니 왕자도 좋아하게 되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래 들으며 별 생각 다함...)


근데.. 지느러미로는 멀리 못 간다는 건 너무 인간 중심의 생각 같아요. 인어는 바다를 누빌 수 있는데. 지구 표면적만 봐도 바다가 70% 육지가 30% (대략) 인데.. 게다가 바다는 깊은데... 깊은 바다 속을 인간은 보지 못해서 배를 띄우고 뭘 내려보내고 난린데...

그니까, 남의 세계를 애매하게 조금 안다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이 책 읽고 싶네요. (급 마무리)

인어공주 평이 별로 안 좋다던데 엉망인지 한 번 보고 싶기도 하지만... 언제부턴가 영화는 우선순위가 밀려서.. 책만 읽고 있는지라 안 보게 될 것 같네요.

다락방 2023-06-05 10:16   좋아요 0 | URL
수하 님, 차라리 모르면 알고자 노력할 수 있는데 수하님 말씀처럼 남의 세계를 애매하게 조금 아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 맞는 것 같아요. 조금 아는 걸로 안다고 추측하고 함부로 판단하기가 너무 쉬운 것 같아요. 저는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그건 나쁘다 그러지말자고 결심하고 있지만, 제가 번번이 그것에 성공하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영화도 좋고 책도 좋은데, 그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마도 책을 읽는 사람들은 어느정도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최근에 <토리와 로키타>를 보고 다시 영화에 대한 사랑에 불붙어서 조만간 또 보러 가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후훗.

수하 님, 여행가셨죠?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습기도 가득 느끼시고 즐겁게 다녀오세요!!

Falstaff 2023-07-07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 책을 신청하자마자 (정말로 한 시간? 아니, 몇 분 안 지나서) 딱 ˝이달의 당선작˝으로 선정이 됐네요. 아주 기대가 되고 즐겁습니다. 다락방님을 흉내내서..... 그럼 이만... ㅋㅋㅋ

얄라알라 2023-07-07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이책을 빌려왔습니다^^표지가.얇아서 딱.데리고 다니기 좋은 질감^^설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