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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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언 고닉은 수많은 작가에게 '작가들의 작가'로 불린다는데, 아무튼 나의 작가는 아니다. 

다른 글이었다면 모를까, 에세이의 비비언 고닉은, 삶과 관계의 통찰이 곳곳에서 튀어나오곤 하지만, 내 타입 아님. 

"진짜 사랑하는지 어떻게 아냐고? 그냥 아는 거야."
엄마는 말하곤 했다.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잘 모르겠으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이 문장은 시나이 문자처럼 엄마에게서 내게로 계승되었다. - P38

시티칼리지가 지성의 산실이라는 명성을 얻은 건 교수들이 아니라 학생인 우리 덕분이었다. 그건 우리의 지성이 특출났기 때문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성에 굶주린 우리의 에너지가 그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지적인 삶이라는 개념이 우리 안에서 불길같이 일어났다. 우리는 사상이나 개념을 하나씩 배우면서 그제야 자기가 누구이고 타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디어 세상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발 딛고 설 땅을 찾았으며 우주에 설 자리가 생겼다. 시티칼리지에서 우리는 내면의 사색과 정신의 명료함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의식했다. - P164

침묵. 예상치 못한 긴 침묵이다. 메릴린은 한숨 쉰다. "넌 여전히 너희 엄마랑 똑같구나." 그가 말한다.
"뭐?" 나는 숨을 들이쉰다. "무슨 말이야?"
"딱히 대단할 것도 없는 남자를 골라, 그런 다음 엄청나게 이상화를 해. 그다음엔 그 사람이 더 다가오지 않는다는 걸 믿을 수 없어 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서 충격을 받아. 그 사람들이 모를 것 같니? 자기가 아니라 네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할 거라는 걸? 그다음부턴 네가 무조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내려다보지."
"그게 어떻게 우리 엄마랑 닮았다는 거야."
"너희 어머닌 결혼 자체를 너무 이상화하셨잖아, 그리고 그 결혼이 끝나버리니까 …… 넌 그러지 마라. 공허감은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거야." - P193

"몇 달 전의 너희 엄마 만났는데." 엄마는 말을 이었다. "너 연락 없다고 뭐라 하시더라. 자식들이란 애들이 하나같이 왜ㅡㄹ 그러니!" 나는 거의 경외심을 담아 엄마를 바라본다. 엄마는 20년 만에 만난 매디슨 사피로 앞에서도 당신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매디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지하철로 향하는 길을 막아선 우리를 못마땅하게 흘겨보거나 툭툭치고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엄마를 꽉 안았다.
"어머니들이야말로 하나같이 왜들 그러세요." 그는 애정을 담아 대답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만약 샤피로 아줌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고통으로 어두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 입에서 이 말들이 나왔을 땐 인정 넘치게 지독하고, 후덕하게 짜증스럽다. 가끔 이렇게 한발 떨어져서 보는 순간에 우리 인생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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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3-15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가의 표현이나 문장은 좋은데... 그게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지지 않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그래서 뭘 써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사나운 애착> 읽고 <짝 없는 여자와 도시>를 더 읽으니 <사나운 애착>이 조금 더 이해가 되기는 했습니다 ^^
(연결되는 이야기가 있어서)

다락방 2023-03-15 15:55   좋아요 1 | URL
저도 리뷰를 뭐라고 써야할지 감도 안잡혔고요 무엇보다 비비언 고닉이 음.. 저랑 잘 안맞는 사람인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며칠전에 < 짝없는 여자와 도시>제목에 끌려 사려고 했는데 <사나운 애착> 읽고 안사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ㅎㅎ

수이 2023-03-15 15: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태그 보고 또 한참 웃고 갑니다. 귀여운 사람이야 암튼. 저는 이 책은 아니고 다른 책 읽었는데 잘 맞으리라 여겼다가 아이쿠나 하고 읽다가 반납했어요. 제목은 좋아요, 사나운 애착. 으르렁거리고 싶어진다 으르렁.

다락방 2023-03-15 15:58   좋아요 1 | URL
<사나운 애착>도 제목 좋고 <짝 없는 여자와 도시>도 제목 좋은데, 저는 비비언 고닉이 제가 별로 안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인것 같더라고요. 저는 비비언 고닉이 좀 음.. 에너지 뱀파이어 느낌이었어요 ;;

저는 위 인용문중 193 페이지의 ‘메릴린‘ 이 제 타입입니다 ㅎㅎ

잠자냥 2023-03-15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에너지 뱀파이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태그로 추가해요.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3-15 17:26   좋아요 0 | URL
그건 너무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라 비비언 고닉 좋아하시는 분들 노여워하실까봐 ㅋㅋㅋㅋㅋㅋㅋ 제가 현실에서 별로 안 좋아하는 류의 타입인 것 같습니다. 흠흠.

독서괭 2023-03-15 18:45   좋아요 0 | URL
에너지 뱀파이어라니 ㅋㅋㅋㅋ 뭔지 궁금하네여 ㅋㅋㅋ

다락방 2023-03-15 21:39   좋아요 2 | URL
쉽게 말하면 ‘친하게 지내면 기빨릴 것 같다’ 가 될 것 같네요? 껄껄..

잠자냥 2023-03-16 10:04   좋아요 1 | URL
공감…. 친구는 하기 싫음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3-16 13:42   좋아요 0 | URL
저도 친구하기 싫은 타입이에요. 친구하면 저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3-15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의 작가도 아니긴 해요. 내가 작가가 아니라서 그런가 봅니다. ㅋㅋㅋㅋㅋㅋ 수잔 손택하고 비교하고는 하던데, 읽을수록 손택하고는 좀 많이 다른 사람 같아요

다락방 2023-03-15 17:29   좋아요 0 | URL
저는 역시 에세이를 읽기에 적합하지 않은 인간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비비언 고닉이 쓴 에세이 아닌 다른 책을 읽어보는 게 저한테는 나을 것 같아요. 너무.. 인간이 보였어요. 하핫;;

난티나무 2023-03-15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너지 뱀파이어!!!!! ㅋㅋㅋㅋㅋㅋ 듣고 보니 그럴 듯 한데요? ㅎㅎㅎ

다락방 2023-03-15 21:39   좋아요 0 | URL
고닉은 제 타입 아니라 고닉 읽기는 일단 멈춤 입니다 ㅋㅋㅋㅋㅋ

시에나 2023-03-16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이 책도 읽어보셨어요? 저는 이 책에서 에세이 몇 개는 무지 좋았는데 나랑 안 맞는다고 하신 그 느낌이 뭔지 살짝 알 거 같기도 해요. 저는 은유와 자기 해석이 많이 들어가는 에세이를 선호하지 않고 건조한 문장을 좋아하는데, 고닉은 제 기준에선 전자였거든요. 오히려 조앤 디디온 처럼 팩트만 건조하고 시크하게 다소 냉정하게 쓰고 독자에게 그 해석과 정서를 맡기는 문장이 좀 더 제 타입이긴 합니다. 고닉의 책은 한 권 읽고 나머지 읽으려고 사두었는데.. 기본적으로 이 사람은 외로움 많이 타고 사람하고 가까이 찰싹 붙어있는 거 좋아하는 타입인 거 같고 그게 마음처럼 안 되는 걸 미친듯이 성찰하면서 절절하고 고독한 느낌의 글이 나오는 거 같았어요.저는 사람하고 붙어있는 거 자체를 원래 안 좋아하다보니..아..문장은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데....이게 그렇게까지 간절할 일인가?? 뭐 이런 생각도 조금 했고요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3-16 13:51   좋아요 2 | URL
저 비비언 고닉은 이 책이 처음이었어요. 그리고 이 책 읽으면서 다른 에세이는 읽고 싶은 생각이 안들더라고요. 에세이는 특성상 작가가 너무 잘 드러나는데, 시에나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절절하고 들러붙고 집착하고 그런 면들이 싫어서요. 어쩜 지점에서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너무 잘 인지하고 그래서 표현도 심하게 과잉되고 그런 느낌이라 에세이 한 권 읽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ㅠㅠ
저는 조앤 디디온의 <푸른 밤> 읽었는데 이것도 되게 힘겹게 읽었어요. 제가 에세이를 잘 못읽는 것 같아요. 저란 사람이요. 뭐랄까, 에세이를 읽으면 이렇게까지 이 사람을 잘 알고 싶지 않은데 너무 잘 알게 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지점이 절 멀어지게 합니다.. 으...

잠자냥 2023-03-16 15:06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은 에세이를 쓰는 사람 ㅋㅋㅋㅋㅋㅋ
근데 어디선가 다락방님 에세이 보면서 아, 이 인간이 너무 느껴진다. 이 사람하고 친구하면 밥 먹고 술마실 때 기빨려서 친구하기 싫다 이러고 있는 독자 있을지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p

다락방 2023-03-16 15:46   좋아요 1 | URL
잠자냥 님, 정말 그런 후기 읽었습니다. 어떤 남성 독자였는데 ‘소개팅으로 만나며 애프터 신청을 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후기를 썼더라고요? 껄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세상에 글을 내놓았다면(말도 다르지 않지만) 어딘가의 누군가는 싫어하거나 반박할 수도 있다는 것은 감당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인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에나 2023-03-16 16:04   좋아요 1 | URL
으하하 잠자냥님, 제가 다락방님 댓글 읽고... 딱 쓰려던 말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에세이를 잘 못 읽는 독자인데, 저는 에세이(진짜 기 제대로 빨리는 에세이)를 쓴다면서요. ㅋㅋㅋㅋㅋㅋㅋ 몇년전부터 진짜 자주 하던 말이었고 이러니 그만쓰고 때려치우자며...(하면서 계속 쓴다....)

저도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노골적인 거 같고, 작가의 자아가 너무 크게 느껴지면 읽기 힘들어요. (그러면서 나는 그런 글 쓰고 있다.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3-16 16:05   좋아요 3 | URL
시에나 님, 찌찌뽕 입니다. 저는 에세이를 쓰면서 에세이 읽기를 싫어합니다. 저는 소설에서 작가가 보이는 것도 싫은데 에세이는 대놓고 너무 작가가 드러나고 독자와의 거리가 확 좁아지잖아요. 그게 저랑 잘 안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소설을 훨씬 더 좋아하는데 소설은 제가 쓰지를 못하는 사람이더라고요? 하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저는 에세이를 쓰려던 게 아니라 어릴때부터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그런데 소설은 쓸 수 없고 에세이만 쓰는 사람이 되었어요. 인생은 왜 계획한대로 바라는대로 흘러가지 않을까요?

시에나 2023-03-16 16:08   좋아요 2 | URL
악 너무 웃겨요.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시 인생.ㅋㅋㅋㅋㅋ
저는 인문서를 쓰고 싶었는데 쓰다보면 사생활 에세이가 됩니다. 아흑.........왜 이럴까........

난티나무 2023-03-17 00:33   좋아요 1 | URL
댓글 늠 재밌어요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3-17 06: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역시 사람 도사 다락방 ㅋㅋㅋㅋ 사람이 보여버려 ㅋㅋㅋㅋ 저는 다락방님이 선물해주신 <아무도...>를 읽었으며 2물결 페미니즘 이후의 페미니스트들이 어떻게 흩어지고 다시 자신에게서 페미니즘을 굳혔는지..... 부분을 집중해서 읽으면서 매우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가 그랬거든욬ㅋㅋㅋ 페미니즘 과몰입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시기?!?ㅋ) 세차례의 로맨스 상실. 사랑, 공동체, 일이라는 세번의 로맨스(페미니즘 안에도 로맨스가 있었던 거죠~)를 끝내고 그녀는 *읽고 쓰고 도시를 걷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리고 말하죠. 물론 처음의 그 페미니즘의 열정은 아니지만 페미니즘은 내 안에 살아있다고. 안읽으신다고 하셔서 소개하고 갑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3-03-17 14:48   좋아요 0 | URL
저는 저라는 인간에 있어서도 그런것 같아요. 처음 페미니즘을 읽어볼까 하다가 읽게 되고 또 바로 습득하면서(안할수가 없지요, 대한민국의 여성들이라면) 온 몸으로 흡수했었고 그걸로 무장했었는데 이제는 좀 유연해진 것 같아요.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면 유연해질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누구나 무언가를 받아들일 때 그런 식으로 흐르지 않을까 싶어요. 흡수하고 뻗뻗하다가 힘을 좀 빼고 유연해지는 과정이요.

아무튼 저는 고닉은 당분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