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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에덴 2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평점 :
《마틴 에덴》1권에서는 마틴과 루스의 만남이 시작된다. 항해하는 남자, 그래서 육체적으로 탄탄한 마틴이 자신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세계에 살고 있는 루스를 만나 반하게되는 만남. 루스 역시 마찬가지. 부잣집에서 교양있는 가족들과 함께 대학 교육까지 받아가며 살아온 루스는 자신이 그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던 남자의 출현에 심장이 벌렁거린다. 세상에, 너같은 남자는 너가 처음이야! 루스는 그것이 사랑인지도 모르는채로, 자기에게 찾아온 감정이 뭔지도 모르는채로 속절없이 그에게 끌려간다. 매력적이야 너무 매력적이야, 그는 그녀에게 마치 동물처럼 느껴진다. 그의 뿜어져나오는 남성미는 그녀를 감싸고 돌아.. 라는 내용만으로도 사실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데, 그런 후에는 세상 짜릿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마틴이, 자신이 흠뻑 빠져들게 된 루스의 세계로 진입해 그녀의 옆에 당당하게 서기 위해 그들과 같아지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그들의 옷차림을 관찰하고 식사 예절을 관찰하고 그들의 청결을 관찰한다. 그의 생활 방식 자체가 더 나아진 것은 물론이요, 무엇보다 그는 지식을 향한 열망에 휩싸인다. 자신이 제대로 된 문장을 혹은 단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루스로부터도 배우지만 수많은 책들을 읽어가면서 점점 더 나은 문장을 갖게 되고 그리고 지식을 차곡차곡 쌓게된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 다르게. 그는 세상에 읽을 책이 너무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너무 많아서 가족들 모두의 이름으로 대출카드를 만들어 도서관에 틀어박히고 책을 빌려오면서 읽고 또 읽는다. 그가 단순히 지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네이버 지식인에 답하기 위해서도 읽은게 아닌, 그는 그 자체가 정말로 그 지식을 원해서 탐구했으므로 누구보다 더 빨리 많이 아는 사람이 되고, 예전에는 감히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던 지식인들과의 사이에서도 이제는 어떤게 엉터리인지-사실 대부분 다 엉터리-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가 맹렬하게 지식을 탐구해가는 과정은 너무너무 짜릿했는데, 아마도 한 인간의 성장을 보고 싶은 사람들, 노력해서 무언가를 얻게 되는 과정을 얻는 걸 보는게 좋은 사람들은 마틴 에덴의 이런 부분에 끌리지 않을까 싶다.
그런 마틴이 글을 쓰고 싶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쓴다. 맹렬하게 책을 읽고 공부했듯이 맹렬하게 쓴다. 쓰고 쓰고 또 쓴다. 그가 항해하면서 모아뒀던 돈은 다 바닥났지만 그래서 그는 굶으면서도 쓴다. 자신이 쓴 에세이와 소설과 잡문을 잡지사에 보내고 또 보내고 또 보내지만 모두들 그에게 원고를 돌려보낸다. 그는 내 글이 팔리면 얼마의 돈이 들어올건지 나름 계산하며 외상도 졌었는데, 아무 원고도 채택되지 않으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그는 자신의 자전거를, 외투를, 정장을 전당포에 맡긴다. 그의 모습이 점점 더 빈곤에 가까워지는 것도 당연한 수순. 그러나, 그 가난에 대해 루스는 이해할 수 없고 알아채지도 못한다. 루스가 살아온 삶은 그런게 아니었으므로 마틴의 달라진 외양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 그녀는 그 안까지 볼 순 없었다. 대신, 세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으며 마틴에게 방을 빌려준 마리아는 그를 궤뚫어본다. 저 사람, 굶고 있구나. 가난은 가난의 흔적을 재빠르게 캐치한다. 고된 노동을 하며 벌어들이는 돈은 별로 없는 마리아이지만, 굶는 마틴을 그대로 둘 수 없어 그녀는 자신의 음식을 내어주고 그가 아파 몸져 누웠을 때는 그를 간호해준다. 마틴은 그런 마리아에게 네가 원하는 삶은 어떤 삶이냐 묻고 농장을 갖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네 말대로 될거라고, 당신은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마틴은 열심히 썼다. 어디서도 마틴의 원고를 실어주지 않았는데도 돌려보내기만 하는데에도 열심히 썼다. 쓰고 쓰고 또 쓰고 보내고 보내고 또 보내고 그렇게 그가 써둔 원고가 쌓여갔고, 그러다 더러 잡지에 실린 적도 있지만 잡지사는 원고료를 주지 않거나(떼먹는다) 소액만 주었다. 간신히 먹고 사는 삶을 유지하던 그를 루스가 그리고 마틴의 가족이 곱게 볼 리 없다. 루스는 제발 일자리를 가지라고 애원한다. 마틴은 자신이 쓴 글을 언제나 루스에게 읽어보라 주지만 루스는 읽고 좋은 글이지만 그런데 팔리지는 않잖아, 하며 자신의 아버지 회사에서 월급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마틴은 잠자는 시간까지 아까워하며 읽고 썼는데 마틴의 매형은 지독한 게으름뱅이라고 마틴을 욕한다. 마틴은 그 누구보다 깨어있는 시간 맹렬히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을 했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는 일자리도 마다하는 사람이었다. 루스의 가족은 처음부터 루스와 마틴의 사랑을 반대했지만 이제 더이상 두고볼 수 없다 하고 루스는 그에게 이별을 고한다.
자, 그러나 마틴의 노력은 보상받는다. 아니 그것을 보상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틴이 원하던 때에 주지 못하는데 그것은 과연 만족할만한 보상일까. 그의 원고 하나가 책으로 나오고 초판은 1,500부 였는데 서평들이 쏟아지더니 미친듯이 팔려 재인쇄 재인쇄.. 그러다가 다른 나라에서도 막 앞다투어 번역하기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이제 누구나 알 수 있는 이름이 되고 그의 원고를 달라고 출판사들마다 요구한다. 마틴은 이미 써둔 원고들을 슝 슝 보내고 그의 통장에 돈이 쌓인다. 그는 명실공히 엄청난 작가가 되었고 출판사에서는 그에게 줄 인세를 높이고 선인세를 주는등 마틴 모시기에 급급하다. 그의 명예가 더욱 무게를 더할수록 당연하게도 그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는데, 그를 어리석은 사회주의자라고 욕하던 판사도 그를 우리랑 다르다 무시하던 루스의 가족도 그외 다른 모든 사회 각계 인사들이 그를 정찬에 초대한다. 그를 무시하던 매형도 매제도 그를 식사에 초대한다. 일도 하지 않는 천하의 게으름뱅이이며 쓸모 없는 놈이었던 마틴은 세상 모두가 어떻게든 알고 지내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는 거다.
마틴은 이런 일들에 혐오감을 느낀다. 나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데, 나는 그냥 나인데. 하물며 지금 계속해서 책으로 나오고 잡지에 실리는 그 모든 글들은 뭔가 달라진 마틴이 쓴 게 아니라 게으름뱅이에 쓸모없는 놈이란 욕을 듣던 바로 그 당시에 썼던 바로 그 글들인데, 자기가 잠도 줄여가며 썼던 그 글들을 썼을 때는 세상 쓸모없는 놈이 이제는 누구나 함께 밥먹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다니. 그런걸 보는게 너무 역겹다. 나는 변한게 없는데? 왜 내가 굶주려서 그 무엇보다 식사가 하고 싶을 때는 아무도 나에게 밥을 주지 않았지? 왜 내가 내 돈주고 밥 사먹는게 충분해진 지금은 모두들 밥을 주겠다고 하지? 왜 가장 절실했을 때는 아무도 없었던거지? 그리고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밥을 먹자고 하는데 나는 외롭지?
그는 정찬 초대를 무수히 받았고 일부에 응했다. 사람들은 그를 정찬에 초대하기 위해 그와 안면을 텄다. 사소한 일이 큰일이 되어 그는 어리둥절했다. 버나드 히긴보삼이 그를 정찬에 초대했다. 그는 더욱 황당했다. 자신이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는데 아무도 정찬에 초대하지 않던 시절이 생각났다. 그 시기는 저녁 식사가 절실하고, 식사를 하지 못해 몸이 허약해지고 현기증이 나며, 순전히 굶어서 체중이 빠지던 때였다. 역설이었다. 그가 저녁 식사를 원할 때는 아무도 주지 않았는데, 이제 수십만 번이나 외식을 할 수 있게 되어 식욕을 잃은 판국에 사방에서 저녁 식사를 들이밀었다. 그런데 왜? 이건 공정하지 않은 일이며, 그가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한 모든 일은 그 일을 수행하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때 모스 부부는 마틴이 게으름뱅이에 뺀질이라고 비난하면서, 루스를 통해 사무실의 직원이 되라고 몰아쳤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가 해 놓은 일을 알고 있었다. 그의 원고는 쓰는 족족 루스의 손을 거쳐 그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들은 그 원고들을 읽었다. 그의 이름을 모든 신문지상에 올려놓은 것은 바로 그 작품들이었는데, 그들은 그의 이름이 모든 신문지상에 올랐다는 사실 때문에 그를 초대한 것이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모스 가 사람들은 그라는 사람 자체나 그의 작품 때문에 그를 만나려 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지금 그들이 그를 원하는 이유는 그라는 사람 자체나 그의 작품 때문이 아닌, 그가 가진 명예 때문이었다. 그가 발군의 인물이고, - 왜 아니겠는가? - 또수십만 달러쯤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부르주아 사회가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이니, 어떻게 그렇지 않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2권, p.206~207
그는 자기에게 들어온 돈으로 자신이 은혜를 입었던 마리아에게 집을 사주고 낙농장을 마련해준다. 자신에게 돈을 바라고 접근하는 가족들에게도 원하는 만큼의 돈을 준다. 이 모든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진 원고도 이젠 다 돈으로 받고 없겠다, 배나 타고 섬으로 가야겠다, 생각하는데 그의 과거 연인 루스가 온다.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가 그에게 온다. 자신의 사랑은 변한게 없다고 자신은 용기를 내어 이제 마틴과 사랑하겠다고 하는거다.
"그런 짓을 왜 전에는 저지르지 않았어?" 그는 거칠게 물었다. "내가 일자리가 없을 때는? 내가 굶고 있을 때는? 남자로서 또 예술가로서, 내가 지금과 똑같은 마틴 에덴이었던 그때, 당신은 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 숱한 날을 나는 그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해 왔어…당신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 관해서. 당신도 보다시피 나는 달라지지 않았어. 나에 대한 평가가 급상승하는 바람에 나 스스로도 내가 달라지지 않았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해야 하지만 말이야.
나는 예전과 똑같은 살을 뼈에 붙이고 있고, 예전처럼 열 개의 손가락과 열 개의 발가락을 달고 있어. 나는 똑같아. 없던 능력과 장점을 새로 개발하지도 않았어. 내 뇌는 예전의 그 뇌야. 그 이후로는 문학이나 철학에 새로 덧붙인 말조차 없어. 나라는 개인의 가치는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던 예전과 똑같아.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이제 왜 나를 원하는지 영문을 모르겠어. 그들이 나 자체 때문에 나를 원하는 건 분명히 아니야. 왜냐하면 나 자체는 그들이 원하지 않던 예전의 나와 똑같으니까. 그들은 뭔가 다른 것, 내 외면의 어떤 것 때문에 나를 원하는 게 틀림없어. 무엇인가 내가 아닌 것 때문에! 그게 뭔지 당신한테 얘기해 줄까? 내가 얻어 낸 명성이야. 그 명성은 내가 아니지. 그건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거니까. 또 내가 벌었고 지금도 벌고 있는 돈 때문이야. 그런데 그 돈도 내가 아니야. 돈은 은행과 이 사람 저 사람의 호주머니 속에 있잖아. 당신이 나를 이제 원하는 것도 그것, 명성과 돈 때문인가?"
"당신은 말로 내 가슴을 후벼 파고 있어." 그녀는 흐느꼈다. "내가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당신을 사랑해서 내가 여기 왔다는 걸, 당신은 알잖아."
"당신은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내 말은 이거야.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나를 사랑하게 된 거야? 그때는 당신의 사랑이 나를 거부할 정도로 약했잖아." -2권, p.226-227
나는 마틴의 울분을 이해한다. 그가 이제야 비로소 알게된 사람들의 속물적인 면에 대한 경멸 역시 이해한다. 자신이 그렇게 동경했던 그 위치가 굉장히 보잘것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의 허무를 이해한다. 또한 그가 그렇게나 책을 읽고 알고자 노력하며 결국 이전과 달라진 사람이 된 것에 대해서라면 너무 좋다. 현실에서의 내가 마틴 친구라면 그를 응원해 주었을 것이다. 굶주리는 그를 위해 가끔은 밥을 사주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험한 일을 겪었고 육체적 으로 탄탄하면서 이제 지식까지 갖춘 그를 좋아하지 않기란 불가능하겠지만, 그러나 나 역시 루스가 된다. 나는 루스다. 내가 상류층 여성이란 얘기가 아니라, 만약 내가 마틴의 매력에 빠져 그와 사랑하고 연애하게 되었다면, 나 역시 계속해서 돈을 벌지 않고 자신의 글이 잘 될거라는 장담만 하는 그를 기다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글을 읽고 그 글이 좋다고 감탄한다 한들, 그 글이 돈을 벌어다주지 않음에 나는 '그런데 말야, 일단 일자리를 잡아서 일을 하고 돈을 벌면서 글을 쓰면 어떨까?' 를 결국엔 말했을 것이다.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내가 글로 돈을 벌거라고! 그가 장담한다해도 번번이 퇴짜맞아 돌아오는 원고를 앞에두고, 그러면서 굶주리는 그를 보고 나는 마냥, 계속해서, 내 사랑 뽀에벌~ 하면서 기다릴 순 없었을 것이다. 마틴은 왜 명예가 없는 내 옆에서는 떠나고 명예가 있는 내게로 돌아오냐고 루스를 원망하지만, 그 원망은 마틴으로서는 너무나 타당하고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나였어도 마틴을 떠났을 것이다. 일을 하라 젊은이여, 나가서 돈을 벌어오라! 나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글을 쓰는 그를 보면서 결국은 고개를 젓고 돌아섰을 것이다. 내가 지금 당장 재벌이 되어 나를 호강시켜달란 말을 하는게 아니라, 매달 이백만원이라도 네 손으로 벌라는 말이야, 라고 돌아섰을 것이다. 사실 이 책 속의 루스는 그와 결혼하게 되면 그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해야 하므로 그의 노동이 절실했다. 너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잖아, 가 루스의 답답한 지점이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나는 조금 다르다. 그가 이백만원씩이라도 꼬박꼬박 번다면, 그와 내가 함께 산다고 했을 때 일상의 고단함이 조금 더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백만원씩이라도 꼬박꼬박 번다면, 설사 나와 헤어졌어도 그는 자신을 챙기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원하는 건 돈을 벌어'오라'가 아니라, 돈을 '벌어'라는 것이다.
루스가 마틴에게 일자리를 갖길 원하는게 잘못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틴의 생각대로 루스에게는 시야가 좁았던 지점이 있다. 루스는 가난을 모르니까. 누구나 노력하면 돈을 벌고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순진하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고된 노동에 시달려도 루스의 아빠만큼은 결코 벌 수 없다. 그렇다면 마틴에게 일자리를 구하라고 말하는 나는 마틴을 사랑하는게 아니었나? 사랑했다. 사랑했지만, 내 사랑은 그런 식이었던 거다. 그러니까 내 사랑은 꼬박꼬박 이백만원을 벌고자 하는 사람에게 향하지 번번이 퇴짜맞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 향하지 않는다. 문제는, 내가 그 글을 읽었고 그 글이 좋다는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팔리지 않는다면, 내가 볼 때 훌륭하므로 그 글이 잘될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마냥 기다릴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읽고 좋았어도 지금 세상이 원하지 않아, 게다가 내가 기다리지 않았던 것도 아니야. 나는 얼마간 그를 지켜봤고 또 얼마간 그가 일하기를 바라면서 조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못하겠다, 하고 돌아섰다면,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는가?
나는 결국 사랑은 머리로 한다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에는 '나만' 사랑을 머리로 한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나의 속물된 지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머리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을 알거나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상대를 사랑하는 기준이나 원인이 나랑 달랐다는 거지, 나는 사랑에는 머리가 관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내 사랑은 그렇다면 그 기준을 노동하는 삶에 둔 것일테다. 물론,
마틴은 노동했다. 글을 맹렬하게 썼다. 그가 노동하지 않은게 아니었다. 그는 게으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말처럼 그렇게 일자리가 있는데 박차고 굶주림을 선택한 사람이 아니다. 마틴은 글을 쓰는 삶을 선택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삶에 대한 기준이 달랐다. 루스, 루스의 가족들, 마틴의 가족들, 마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살고 그 눈높이로 보고 있을 때 마틴은 그런것과는 다른 방향을 보고 다른 삶을 살고자 했던 거다. 나는 그런 마틴의 방향성과 삶의 태도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내 곁에 두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된다. 가끔 만나 밥을 사줄 순 있지만 그와 사랑하고 함께할 순 없다. 그는 그의 의지대로 삶을 선택한 것이고 그가 선택한 삶이 내가 선택한 삶과 다르다면 세이 굿바이 해야 하지 않겠나. 마틴 에덴의 루스에 대한 원망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리고 그 원망 나 역시 받아 마땅하지만, 그러나 그렇다해도 나는 나의-루스의-그런 선택이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잭 런던은 마틴 에덴을 통해 계급을 드러낸다. 저기 저 멀리 신기루처럼 보이는 잘 사는 사람과 바로 여기에서 오늘 먹을 밥을 궁리하는 고된 노동의 삶. 그 격차를 과연 사랑으로 메꿀 수 있을까? 메꿀 수 있다고 맹목적으로 믿으며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젊은이인 마틴 에덴을 보여줌으로써 사랑은 믿음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현실의 간극은 이렇게나 크다. 나는 잭 런던이 보여주는 이 간극이 아프지만 너무 좋다. '좋다'는 표현은 이럴 때 적절한 표현이 아닌 것 같지만, 잭 런던의 마틴 에덴을 읽으면서 가난의 이쪽과 부유함의 이쪽에 있던 사람들이 만나 어쩔 수 없이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다른 작가들을 생각해본다. 샐리 루니가 그랬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랬다. 아, 진짜 자지러지게 좋다. 그런 한편 나는 현실에서 한 번도 상대와 빈부격차로 인해 괴로웠던 적이 없다는 것도 깨닫는다. 한마디로 돈 많은 남자와 연애해본 적은 없다는 거다. 아마, 내가 앞으로 연애한다고 해도 그럴 일은 없겠지.
다른 계급의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는 걸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책은 재미있는데, 그 다른 계급 속으로 기어코 향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뛰어난 점이다. 그러나, 그토록 맹렬히 필사적으로 자신을 불살랐던 젊은이에게 필연적으로 닥쳐올 시간은 어떤 것이었을지, 책장을 덮으며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하면서도 씁쓸해진다. 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좋다고 살고 있고 돈이 세상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돈이 나에게 해주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은 분명 없을 거라고도 생각한다.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역시나 씁쓸한 결론을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을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본주의를 박차고 나갈 수 없다는 것 역시도 알고 있고, 그러므로 나는 마틴 에덴을 이해하지만 루스가 될 수밖에 없다. 아,
한가지 루스와 내가 다른게 있다면, 나는 내가 돌아선 남자가 내가 떠난 뒤 명예를 얻고 부자가 됐다고 해서, 그를 다시 찾아가지는 않을 거라는 거다. 그가 그렇게 된 뒤에 나를 찾아와 '이런 나를 받아주면 안되겠니?' 한다면, 웃으며 받아줄 순 있지만, 내가 찾아가서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어'라고 그의 명예 뒤에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 그것은 나의 자존심이며 그것이 나의 인간된 도리이다.
이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