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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평점 :
이 책의 주인공이 암벽 등반을 하는 남자라는 걸 내가 알았다면, 그래서 등반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라는 걸 내가 진작 알았다면, 아마도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등반하는 이야기가 뭐 재미있을 일이람? 지루하기 짝이 없을거라고, 나는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 배경의 이야기가 재미있을 수는 없을 거라고, 나는 그렇게나 숱하게 소설을 읽어왔으면서도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거다. 책장을 넘기다가 비로소 어라, 이 남자 등반하는 거야? 알게 되었고, 그리고 그 등반에 대한 얘기가 너무 흥미로워서 놀랐다. 등반이, 흥미로워? 감히 내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책을 읽다가 스포츠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수영이나 마라톤을 하는 등장인물들은 얼마나 많이 나오던가. 그런 운동들은 그러나 내게 '그들이 하는 운동'이었다. '그들이' 즐기는 스포츠. 아, 그런데 제임스 설터가 그려낸 암벽 등반이 자꾸만 내것이 된다. 그래서 몹시 힘들다. 그 발디딜 곳 조차 찾기 힘든 절벽을 오른다는 것이, 이미 오른 이상 때로는 내려갈 수 없다는 것이, 정상에 오르는 것만이 내려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 위를 한없이 바라보다 저 방향으로 가고 저기에 손을 뻗고를 생각한다는 것이 자꾸만 내 일처럼 느껴질줄을 몰랐다. 높고도 높은 곳, 몇십 미터를 오르고 또 올라도 오를 곳이 더 많이 남아있는 절벽을 오르는 일, 함께 등반하는 동료를 신경쓰는 일, 이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낙석으로 인해 부상을 당한 동료를 두고 갈 수 없고 자꾸만 오르게 해야 하는 일은, 그 상황에서 얼마나 절망적이며 또 얼마나 필사적이었을까. 피를 흘리면서도 오를 수밖에 없을 때, 쉴 곳 조차도 그 암벽의 한가운데일 때, 그 때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 내가 혹은 상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애써 감춰가며 우리는 할 수 있다고 한 발 또 한 발 내딛는 것을 보는게 너무 힘들었다. 오죽 힘들었으면 나는 읽다 말고 분식집에 들어가 라볶이를 주문했다. (응?)
그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살면서 꼭 해보고 싶은 일이었는데, 그래서 며칠을 기다리고 살피며 드디어 그 때가 되었고, 그렇게 올랐는데, 그런데 그곳에서 부상을 당해 나는 이제 틀린 것 같아, 라는 생각을 하는 당사자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런 동행을 바라보는 마음은. 죽음이 올 것 같아, 를 알면서 할 수 있다고 자꾸 되뇌어야 하는 그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만약 내가 사랑하는 내 주변 사람들이 암벽등반을 하고 싶다고 하면 말릴 것이고, 나 역시도 시도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겠지만-세상에, 낙석이라니!- 그런데 한 번 해봤던 사람이 또 하고자 하고 한 번 했던 사람이 더 높은 곳에 오르고자 하는 그 마음이 너무 생생한거다. 그게 뭔지 알겠는거다. 내 팔과 다리 그리고 코어에 집중하는 일, 온전히 내 육체에 집중하는 시간이 암벽등반하는 동안 찾아들 것이었다. 땀범벅이 되는 육체와 이제 더이상 힘을 낼 수 없을 것 같은 내 육체가, 그러나 정상에 이른 순간 그 기쁨을 만끽할 것이었고, 하산한 후 열여덟시간을 내리 자는 것은 세상 그 어떤 잠보다 달콤할 것이었다. 아, 하지 말아야지, 내 육체의 온 힘을 만끽하고 그 피로를 덜어내는 이 일이, 암벽을 등반하는 그 며칠-세상에, 몇 시간이 아니라 며칠이다!-이 얼마나 고되고 그래서 짜릿할지 상상이 되어서, 나는 시도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만약 그걸 시도한다면, 나는 아마 한번만 더, 한번만 더를 외칠 것 같은거다. 오르는 중간에 아직도 내가 오를 곳이 저렇게나 많이 남아있다는 것에 지치고 때로는 발을 헛디뎌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로 죽음에 가까워져 두려워도, 그러나 기어코 다 오르고 다시 내려오고 그리고 깊은 잠을 자고 나면, 그 충만함으로 몇 개월을 살다가 다시 또, 나는 오르고 싶어질 것 같은거다. 또 오르고 또 오르고 싶어질 것 같아서 나는 아예 시도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맙소사, 암벽 등반에 이토록 몰입하는 나라니. 나는 정말이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게 단순히 등장인물의 암벽등반에 이입해서 이뤄지는 간접경험이 아니라, 자꾸만 내 온몸으로 느끼고 싶은거다. 현실의 나는 구름사다리도 못건너는데!!
주인공 랜드는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다. 그에게 암벽등반은 그의 살아있음, 그의 삶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는 정착하지 못하는 남자이고 등반하는 남자이다. 몽블랑 근처로가 친구와 함께 높은 산을 등반하고, 그 과정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진 친구를 격려하고 내려와서는 또 등반하고 또 등반한다. 동행을 찾지 않고 혼자 등반하기도 하고 친구의 다른 등반 소식에 자신을 부르지 않은것에 상처받기도 한다. 어느 날은 날이 좋아지길 기대하며 등반할 때를 노리다가, 암벽 한가운데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의 소식을 듣고 그들을 구출하러 가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구출하기까지 한다. 그는 그 순간 영웅이 되고 프랑스의 사람들은 그를 보기 위해 찾아든다. 너는 정말 산을 사랑하는구나, 라는 누군가의 말에 그는 "산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삶을 사랑합니다." (p.195) 라고 대답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적확한 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사랑하는 건 산이 아니라 삶이다. 이 모든 것들을 해내는 자신의 삶, 오르는 과정을 기어코 겪어내고 그리고 오르고 다시 내려오고 다시 또 오른 곳을 찾고 그걸 해내고 또 찾아내고, 이 모든 걸 해내는 그 자신의 삶을, 그는 사랑하는 것이었다. 삶을 사랑하는 방식은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그가 찾아낸 방법, 혹은 그가 삶을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던 수단은, 바로 이 암벽등반이었던 것이다. 오롯이 내 육체만으로 그리고 내 정신력만으로 이루어내는 일, 그리고 그걸 해낸 나. 만약 내가 암벽등반을 시작한다면 나 역시도 그것이 나의 삶을 그리고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나도 생각할 터였다. 그러나,
랜드가 사랑한 삶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삶이었다.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삶. 물론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의 삶까지 사랑해줄 필요는 없다. 자기의 삶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인간은 충분히 이타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누이 얘기하지만, 내 한 몸을 잘 건사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지독하게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을 돌보지 않았다. 조난당한 사람을 구하러 위험한 절벽에 오르는 일은, 그 자신을 위한, 그 자신의 삶을 위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산을 타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랜드는, 자신을 돌보아준 여자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배려하지 않았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신경쓰지 않았다. 하는 일이라곤 오로지 등반 뿐인 그에게 잘 곳을 제공하고, 식사를 차려주고, 차를 빌려주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였다. 랜드는 이 여자가 마음에 들면 이 여자를 찾아가 섹스하고 그 집에 머물고, 그러다가 저 여자가 마음에 들면 그 여자에게로 간다. 한 여자랑 자면서 그녀의 친구와 바람을 피우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여자들이 상처 받을 거란 사실에 대해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심지어 등반하지 않는 그동안의 그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돌보아준 한 여자는 임신을 한다. 그런데 랜드는 그녀에게 그 아이를 지우라고 한다. 나는 아버지가 될 생각이 없어. 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아버지가 될 생각이 없다면 섹스를 하면 안되고, 섹스를 하게 된다면 피임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개념 자체를 아예 가지고 있지 않다가 임신한 여자에게 '나는 아버지가 될 생각이 없어' 라고 하다니. 얼마나 생각없고 무책임한 쓰레기인가. 그리고는 임신한 여자를 남겨두고 그는 또 떠난다. 그렇게 다른 여자를 찾아 머무는데, 놀라운건, 랜드가 거쳐간 그 많은 여자들이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기다린다는 거다. 이거야말로 놀랄 일이 아닌가. 왜 배신을 당하고도 그를 원망하지 않는걸까. 왜 그를 죽이려고 시도하지 않는걸까? 루이즈, 카트린, 콜레트, 시몬,수전 그 여자들은 왜 자신들이 벌어온 돈을 쓰고 그저 섹스만 하고(때로는 그것도 잘 못하고), 임신을 시키고도 지우라는 말만 하는 그를, 왜 여전히 그리워하기만 할까? 왜 그들중 누구도 랜드를 살해하지 않을까?
두 사람은 아내가 아니었다. 아내가 될 운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목격자였다. 어째서인지 그는 여자만 신뢰했고, 여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조금씩 달랐다. 그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그의 이야기의 전달자였다. -p.211
왜 암벽 등반을 하고 정상에 오르는 건 랜드고, 루이즈, 카트린, 콜레트, 시몬, 수전은 그의 이야기 전달자이기만 할까? 아내가 될 운명이 아니라니, 도대체 이런 빌어먹을 남자를 만난 재수없음을 왜 여자의 운명탓으로 돌린단 말인가. 옮긴이는 이 책에서 랜드가 여자들을 가볍게 대했다고 지적하는데, 이걸 가볍게 대했다는 걸로 퉁칠 수 있는 일일까? 랜드는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 그런데 그는 오로지 자신의 삶만 사랑했다. 자신이 가는 길에 만나는 여자들은 그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섹스해주는 자비로운 천사들이었다. 자비로운 천사들이라는 건 즉, 그와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야말로 빌어먹을 개자식이 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설터는 이런 인물을 그려낸것일까. 왜 자신의 삶을 이렇게나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은 내팽개치는 인물을 굳이 그려낸 것일까. 왜 이 아름다운 암벽등반을 기어코 해내는 위대한 육체와 정신에 대해 보여주면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엉망진창인 이기적인 '남자'를 보여주는걸까. 아. 나는 옮긴이의 말을 읽다가 비로소 알게 된다. 맙소사. 랜드는, 실존 인물이 모델이었다. 실존인물인 산악인. 누가 봐도 특별해 보이는 한 산악인이 모델이었다고 한다. 설터는 그 사람에 대해 '꼼꼼하게 조사하고 편지를 비롯한 관련 자료를 열심히 찾아 읽은'(p.284) 후에 쓴 작품이라고. 그러자 랜드라는 이 한사람이 가지고 있는 괴리감이, 모순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설터가 굳이 '이런 남자'를 만들어낸 게 아니라는 거. 현실 속 인물이었다는 거. 아, 그렇지, 현실 속 인물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면서 그러나 여성을 혐오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까지 저지르는 인물, 이런 인물은 현실속에 많지. 실존인물이라고 하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아주 많은 남자들은 그렇게 하면 안되는 일을 저지르면서 그러나 바깥으로는 남들에게 추앙받는 삶을 살기도 하니까.
나는 오히려 설터가 편지와 자료들을 조사하다가 어떻게든 이 실존인물을 긍정적으로 그리려고 노력했던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그 여자들을 그렇게 대하는 걸 보면서도 '그는 여자만 신뢰했고' 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랜드가 여자들에게 한 행동이, 과연 신뢰일까? 그것이 신뢰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걸, 여자를 같은 인간으로 생각한게 아니라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몽블랑도 아는데, 설터가 굳이 이렇게 쓴 까닭은, 그가 실존인물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여성혐오는 아무리 감추려하고 감싸주려고 해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랜드가 여성을 같은 인간으로 대하지 않은 것은 누가봐도 자명한 사실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감히 생각해보지도 못할 저 높은 암벽을 등반하고, 그러기 위해서 몇날 며칠을 기다리고 살펴보고, 오르는 동안 오롯이 내 육체에 집중하고, 그렇게 정상에 올라 자신에게 만족하고, 내려와서는 깊은 잠을 자면서 행복해하기도 하는 이 남자 랜드는, 지독하게 자신의 삶을 사랑했지만, 정말이지 지독하게 자신의 삶'만' 사랑했던 이기주의자였다. 그가 이루어낸 업적이 무엇이든,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기억하든, 그는 이기주의자였다.
그런데 나는,
암벽등반을 욕망하기 시작했다.
"이 방으로 할게요." 전구가 하나 달린 화장실이 있었다. 모든 것이 꾸미지 않고, 페인트칠도 하지 않은, 다만 세월과 더불어 때가 탄 것들이었다. 그날 밤 랜드는 저녁도 먹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리를 들었고, 얼마 있다가 창문 밖에서 내리는 비를 보았다. 많은 것을 냄새로 아는 짐승처럼 그는 심란하지 않았고, 오히려 평온하기까지 했다. 담요 냄새, 나무 냄새, 흙 냄새, 프랑스 냄새…… 이 모든 냄새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침댕 누운 그는 육체적인 차분함보다는 훨씬 더 깊은 어떤 것, 삶 자체의 고동 같은 것을 느꼈다. 확고한 기쁨이, 따뜻함과 충만한 행복감이 차올랐다.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고, 그는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이를 대신할 수 없었다. - P46
아침이었고, 빛은 여전히 새 빛이었다. 멀찍이서 이름 없는 보초들이 흐릿하게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랜드는 그 산들을 가질 수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멀리 떨어진 봉우리들을 태양처럼 어루만졌고, 봉우리들은 그의 존재에 눈을 떴다. 그 생각이 그를 무모하게 만들었다. 엄청난 힘을 느꼈다. 산등성이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자신의 불멸의 모습을 보았다.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도 바치리라 생각했다. - P121
"당신은 산을 사랑하는군요……." 그들이 말했다. "산이 아닙니다." 그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산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삶을 사랑합니다." - P195
두 사람은 아내가 아니었다. 아내가 될 운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목격자였다. 어째서인지 그는 여자만 신뢰했고, 여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조금씩 달랐다. 그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그의 이야기의 전달자였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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