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때론 어떤 사람들에게, 더 적은 수의,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름 아닌 독자들이다. 가던 길을 남들이 포기하는 여덟살 혹은 아홉 살 무렵에 이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독서의 길로 뛰어드는 그들은 언제까지나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그 길이 끝이 없음을 알고 기뻐한다. 기쁨과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그들은 출발점에, 첫 경험에 집착한다.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경험이다. 그들은 언제나 그 지점에 머무르며 삶이 다해가는 순간까지 책을 읽는다. 고독을 발견했던, 그러니까 언어들의 고독과 영혼들의 고독을 발견했던 첫 경험의 언저리에 머문다. 그들은 황홀감에 취해 세상에서 물러나 이 고독을 향해 간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고독의 골은 깊어진다. 더 많이 읽을수록 아는 건 점점 더 적어진다. 이 사람들이 작가와 서점, 출판사, 인쇄소를 먹여 살린다. -P.14~15
아 너무 좋지 않나.
세상에는 책을 아예 안 읽는 사람들이 있고 어쩌다가 베스트셀러를 한 권씩 읽는 사람들도 있다. 어릴때는 책을 읽지 않았다가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책을 읽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고, 어릴 때는 책을 좀 읽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책과 멀어진 사람들도 있다. 나로 말하자면, 크리스티앙 보뱅이 말한 것처럼 어릴때 독서의 길로 뛰어들어 언제까지나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가는 사람이다. 여덟살 혹은 아홉살이 아니라, 나는 한글을 좀 일찍 습득했기 때문에 좀 더 일찍 읽기 시작했다. 집에는 책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집에 갔다가 책이 보이면 책장 앞에 서서 이 책 저 책 뽑아 읽었더랬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고 진학하면서 엄마가 책을 조금씩 사주긴 하셨지만 한없이 부족했다. 고등학생 때부터는 당시에 책대여점에 가 돈을 주고 빌려 읽었었고 대학때도 마찬가지. 대학 졸업후 시간이 한참 지나 대학동창들을 만났을 때 '너는 학교때도 계속 책을 들고 다녔어'라고 친구가 말했더랬다. 그리고 직장에 들어가고나서 책을 사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권 두권이었고, 처음으로 다섯권 정도를 샀던 날은 너무 신나서 막 팔짝팔짝 뛰고 흥분했더랬다. 그때만해도 내가 사둔 책은 다 읽고 다른 책을 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어느 정도까지는 잘 지켜졌던 것 같은데 왜, 언제부터 나의 삶은 이렇게 되었나. 왜 열권 사면 한 권 읽는 사람이 되었나. 왜, 왜때문에, 왜... 아무튼,
책 읽는 거 너무 좋다. 나는 재미있어서 책을 읽었다. 책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국민학교때 엄마가 사준 책중에 세계문학 전집인가 100권짜리 있었는데 1번이 그리스로마 신화였고 98번이 헬렌켈러였고, 여튼 집에 있는 그걸 다 읽고 옆집 친구네 가서 옆집 친구네꺼 또 백권시리즈 다 읽었더랬다. 왜냐면, 재미있어서 그랬다. 나는 그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재미있었다. 신화는 신화대로 위인전은 위인전대로 재미있었다. 책은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재미있어서 읽는다. 재미있어서 읽는데, 책이 내게 주는 건 그저 재미뿐만은 아니었다. 다른 삶, 다른 이야기, 다른 목소리, 다른 환경, 다른 생각. 이 모든 것들을 책이 알려주었다. 책 진짜 만세 아니냐. 다른 사람들이 써준 훌륭한 글을 읽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크리스티앙 보뱅에 의하면 나같은 독자가, 이 한낱 티끌같은 독자가, 작가와 서점, 출판사와 인쇄소를 먹여 살린다고 한다. 만세! 여러분 모두 부자되고 행복하세요! 제가 계속 먹여살려 드릴게요!!! >.<
뭐, 아시다시피 이미 충분히 그러고 있지마는...
책이 좋은 이유에 대해 하나 더 언급하자면 지식의 축적이다. ㅋㅋㅋㅋㅋ 아니, 그러니까 내가 어제 얼마나 짜릿했냐면, 어제 점심 먹으면서 넷플로 영화를 한 편 보기 시작한거다.
<키싱부스>의 여주인공인 '조이 킹' 주연의 <인 비트윈>
아직 다 보진 않았지만 어쨌든 청춘 남녀의 로맨스물이다.
사진찍는 걸 좋아하고 전공하려고 하는 '테사'는 극장에 들어가 영화 <베티 블루>를 보려고 하는데 자막이 나오질 않아 당황하는 거다. 마침 관객이 자기 외의 단 한 명 뿐이라 기사님께 자막이 없다고 언급해보지만 기사님에게 가 닿지 않고, 그런데 저기 저쪽에 앉아있던 관객이 테사 옆으로 오더니 '내가 번역해줄게' 라고 한다. 이 영화는 놓치기 아까운 영화라며. 어이없어 ㅋㅋㅋㅋㅋㅋㅋㅋ상황 진짜 겁나 어이없어. 그런데 그때 다가온 그 다른 관객이 잘생긴 또래의 남자아이일 확률은? ㅋㅋㅋ 여튼 그 남자애가 옆에서 번역해주는 바람에 좋은 영화를 감동깊게 잘 보고, 극장 바깥으로 나와 그들은 서로의 이름만 알려준채로 세이 굿바이 하는데, 이것은 로맨스 영화. 이들은 우연히 재회한다. 아니 글쎄, 자신이 다니는 학교와 조정경기를 하는 상대 학교의 선수였던 것이고 무려 우승자인 것이다. 이 남자애 스카일러는 조정경기 챔피언이라 근육질이면서, 아버지가 외국어 교수였던 관계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와 또 뭐더라..암튼 외국어를 세 개나 하고, 게다가 제인 오스틴을 읽는 남자인 것이다. 자신은 해피 엔딩을 좋아한다며. 아직 10대의 남자아이가 근육질에 운동 챔피언이면서, 외국어를 3개 마스터하고, 제인 오스틴을 읽을 확률은?
뭐 아무튼 그런 영화인데, 영화에서 스카일러가 테사를 집에 바래다주면서 그들이 대화를 하다가 '연쇄살인마'라는 단어가 나온다. 번역으로 연쇄살인마가 먼저 뜨고 실제 주인공의 입을 빌어 말해진 건 약간의 시간차가 있었는데, 나는 번역된 자막의 연쇄살인마를 보고는 중얼거렸다.
"serial killer"
그리고 바로 이어서 남주가 "시리얼 킬러" 라고 말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내가 아는 단어다. 으하하하하하하하. 그렇다면 내가 이 단어를 어떻게 아느냐? 아니 글쎄, 요즘 읽고 있는 원서 헤이팅 게임에서 이 단어가 수시로 등장하는 거다. 루신다는 조슈아를 보면서 가끔 '시리얼 킬러'같은 눈빛이라고 하는거다. 그런 눈빛은 조슈아가 루신다를 향한 욕망으로 드글거렸을 때 보인 눈빛이었다. 나는 도대체 시리얼 킬러가 뭔가 해서 찾아봤지. 그랬더니 연쇄살인마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erial killer eyes." I wish I didn't sound so scared. He looks over my shoulder at gis reflection in the shiny wall fo the elevator.
"I see what you mean. You've got your horny eyes on." He spirals his finger dramatically over the elevator button panel.
"Nope, these are my serial killer eyes too." -p.67
"또또 저 연쇄 살인마의 눈."
부디 겁에 질린 티가 나지 않았기를.
조슈아는 내 어깨너머로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네. 그러는 당신은 어떻고? 또 그 야릇한 눈빛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과장되게 손가락을 뱅글뱅글 돌렸다.
"아닌데요? 이게 내 연쇄 살인마 눈빛인데요?" -책속에서
이야.. 책을 읽으면 이렇게 단어를 습득하게 된다. 영어책 읽으면서 도대체 나아지는게 뭐냐고 울부짖었지만, 단어를 나도 모르게 외우고 있었어. 물론 한 권 읽고 단어 하나 외우는 것은 너무.. 소득이 없는 것이긴 하지만..뭐 그래도 하나도 모르는것 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러니, 책을 읽어야 한다. 만세! 책 만세!
그나저나 ㅋㅋㅋ 로맨스 소설이나 영화속의 주인공들 너무 완벽남이라 ㅋㅋ 돌아버리겠네. 현실에서 제인 오스틴 읽는 남자사람은 얼마나 될까. 책 읽는 남자사람도 얼마 안될 뿐더러 그중에 제인 오스틴 읽는 사람이라면 더 적을텐데. 나도 현실에서 내가 만나는 남자사람 친구중에 제인 오스틴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한 남자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다. ㅋㅋ 그런데 운동해서 근육질에 외국어를 몇 개씩 하다니.. 뭐 이건 굳이 남자까지 갈 건 아니다. 나만 해도 몸 근육질 어림도 없고, 외국어 하나도 못하고, 제인 오스틴 안좋아함... 흐음.. 나 역시도 이런 이상형에서는 완전히 멀어져있으니 내가 딱히 할 말은 아니구먼. 여튼 현실 존재 가능성 거의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영화나 소설속에서라도 굳이 만나려고 하는건지도 모르겠다. 영화속 스카일러 너무나 현실 존재 불가능 캐릭터이고, 무엇보다 헤이팅 게임의 조슈아..
아니, 조슈아는.. 그런데 현실불가능인가? 어쩌면.. 아니야, 그런 희망 따위 가지려고 하지마. 그걸 가져서 뭐해.
아니 그래도.. 평범한 직장인인데 관심 있는 여성에게 진지하고 애를 쓰고, 헬스장 다니면서 등근육 멋지게 키워낸 남자.. 라면 .. 내가 조슈아에 왜그렇게 빠지나 했는데, 이 남자가 등근육으로 나를 끌어당긴 줄 알았는데, 아니 글쎄 이 남자,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이었어. 집이 세상 깔끔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고, 오믈렛을 루신다에게 만들어줄 때 야채도 가지런히 잘 썰고 뚝딱 요리해내는 남자였어. 그러니까 내가 못하는 거 다잘하네. 나는 이상형이 정리정돈 잘하는 사람인데. 책 속에서도 루신다는 정리정돈을 잘 못하는 사람이고 조슈아는 잘하는 사람이다. 저는 정리정돈 잘하는 사람이 그렇게나 멋지더라고요. 그거랑, 계란 한 손으로 깨는 남자...
그만두자, 이런 얘기는...
그만두자..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면 삶에서 아무것도 배울 게 없고 알아야 할 것도 없다. 물론 혼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이르려면 누군가를 거쳐야 한다. 어떤 사랑을, 어떤 말(言)이나 얼굴을 거쳐야 한다. 아니면 화사한 어린 말(馬)을. - P60
그녀는 글을 쓴다. 온갖 색깔의 노트에다, 온갖 피로 만들어진 잉크로. 글은 밤에 쓰는데,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 장을 보고, 아이를 씻기고, 아이의 학과 공부를 돌봐준 뒤이다. 그녀는 저녁상을 치운 뒤 같은 식탁에서 글을 쓴다. 밤늦도록 언어 속에 머무른다. 아이가 깜빡 잠이 들거나 놀이에 빠진 사이, 그녀가 먹이는 이들이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 순간에 글을 쓴다. 이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그녀 자신이 되어 있는 순간 그녀는 홀로 종이 앞에 앉는다. 영원 앞에 나와 앉은 가난한 여자이다.수많은 여성들이 얼어붙은 그들의 집에서 그렇게 글을 쓴다. 그들의 은밀한 삶 속에 웅크리고 앉아. 그렇게 쓴 글들은 대부분 출간되지 않는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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