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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ㅣ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평점 :
친구1과 친구2는 함께 산다. 친구1이 나의 친구였던 것이 먼저, 그 후에 친구1과 친구2는 동호회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고 마음이 맞아 함께 살기로 하였다. 자연스레 나와 친구2도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나와 친구2가 친구가 되는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친구가 된 이후로는 누구보다 아끼고 좋아하는 친구가 되었지만.
둘이 동호회에서 만난 만큼 그들의 어떤 취미가 겹쳐졌던 것은 그 시점에서 분명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그들은 대부분 같은 길을 갔다. 수영을 좋아하는 한 명이 다른 친구에게 같이 수영하자 말했고 그 둘다 퇴근하면 수영장으로 향했다. 그들은 어느 틈에 바다수영까지 하는 능숙한 수영꾼들이 되었다.
지난 주말 내가 방문한 건 이 친구들의 집이었다. 친구들은 이제 집주인이 되었는데, 그들의 집은 온통 식물들로 가득했다. 식물에 관심 없던 젊은 시절이 분명 있었건만, 어느 틈에 친구들이 하나씩 둘씩 식물에 관심을 갖는다. 식물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나이 먹으면서 자연스런 수순인건가, 우리는 이야기하며 깔깔 웃었지만, 그러나 나는 아직 식물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 친구1이 집 안을 식물로 채워두면 친구 2는 가만히 식물 앞으로 가, 그 식물을 관찰한다. 여기 새로 순이 돋아나는 걸 보라고, 너무 기특하고 예쁘지 않냐고 친구2는 내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친구가 신기했다. 친구1이 식물 좋아해 키워도 너는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다행히도 너 역시도 같이 좋아하네? 라고 내가 말하니, 처음엔 자신도 딱히 관심이 없었는데 이렇게 가만 바라보는 시간이 생기더라 했다. 같이 살기로 했다고 해서 모든 취미와 취향이 비슷할 순 없을텐데, 이들은 하나씩 둘씩 맞춰가고 있고 그러다보니 비슷해졌다. 이들이 비육식을 함께 실천한지도 벌써 오래되었다.
황정은의 신간을 읽으면서 내내 함께 살고 있는 나의 친구들이 생각났다. 황정은의 일기 속에 수시로 동거인이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황정은은 동거인에 대한 신상의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 공간에서 사는 이상 뚝 떨어져 오롯이 자신만의 이야기만 하기는 힘들 터. 동거인과 이야기 나누었던 것, 동거인이 물끄러미 식물들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동거인과 함께 하는 외출까지 늘 일상인듯 적어두었다. 읽다보니 그들이 서로의 동거인이 된지도 십년이 훌쩍 넘은것 같았다. 서로 다른 사람 둘이 만나 한공간에서 그렇게나 오래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은 내게는 너무나 경이롭게 느껴진다. 그런데 내 친구들이 그걸 해내고 있고, 황정은이 그걸 해내고 있다. 친구들이 서로의 운동과 취미를 공유하는 것처럼 황정은은 동거인과 세상을 보는 눈을 공유하는 것 같다. 황정은이라는 개인이 여전히 해마다 목포를 찾아가는 일이야 본인의 신념에 대한 일이라해도 그 길에 늘 동거인이 함께한다는 것은 그 신념이 그 둘에게 공통적으로 자리한다는 것이다. 오가는 길에 번갈아 운전을 하고 함께 밥을 먹고(황정은도 비육식하지 오래된 듯하다) 산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동거인이 식물을 관리하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그들의 베란다에 날아드는 까치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이지만 그러나 아무나와 아무때나 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친구1과 친구2에게도 말한 적이 있지만, 그렇게 다정하게 함께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큰 복인것 같다. 내가 아무리 세상은 똥이고 인간은 결국 혼자이다! 라고 주장한다 해도, 그렇게 나의 친구들처럼 황정은처럼, 같은 공간에서 함께 취미와 일상을 공유하며 오래 같이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지내는 동안 얼마나 큰 힘이 될까. 오래되어서 이제는 자연스러워 졌겠지만 그런 사이, 그런 관계가 그리 쉬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오래 함께 지낼 수 있는 상대가 있는 것은, 그들이 이 생에서 받게 된 큰 복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러다보니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인가 생각했다. 어느 날 하루 날잡고 만나 이야기 나누고 먹고 마시는 일을 잘 할 순 있지만, 그러나 며칠을 몇달을 그리고 몇년을 함께 보내는 것이 내게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나는 종종 생각하곤 한다. 나의 취미가 상대의 취미와 일치하지도 않을 뿐더러 일치시킬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단 며칠을 같이 있는 동안에도 나는 상대에게 난 이렇게 할게 넌 그렇게 하렴, 나 나갈게 넌 안에 있으렴, 넌 그쪽으로 가 난 이쪽으로 갈게, 넌 그거 먹어 난 이거 먹을게, 하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다른 사람이 선곡한 음악을 들을 때 더러는 괴로웠던 적도 있었다.
나는, 나는 괜찮은가. 나는 너무 혼자 잘난맛으로 살고 있진 않은가.
좋아하는 국내 작가가 몇 되지는 않지만 황정은은 그 안에 있다. 언젠가 친구들과 좋아하는 작가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각자 다른 작가들 얘기를 하는데 우리 모두가 황정은에서 겹치는 걸 알게 됐다. 그 때 한 친구가 말했다. 그게 바로 천재 작가라는 뜻이구나, 라고. 천재는 모두가 좋아하는구나. 나는 황정은의 모든 소설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내가 언제나 신간을 기다리는 작가가 황정은이다. 그래서 제법 여러권을 읽었고, 그렇게 황정은의 소설을 좋아하며서도 그러나 '이 사람과 나의 결이 같다'고 생각하진 않았더랬다. 어쩌면 황정은에게는 천재의 기운이 감돌아서였을까? 황정은 천재 나는 not천재?
그런데 황정은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그러나 우리가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러니까, 매혹되는 이야기에 있어서 그렇다.
예외가 물론 있기는 하지만,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돌아오는 이야기에 나는 늘 매혹된다. 성공하지 못하는 귀환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p.31
돌아오는 이야기, 결국은 그래서 닿는 이야기를 내가 얼마나 환장하고 좋아하는가. 그런데 황정은도 돌아오는 이야기에 매혹된다고 한다. 내가 돌아오는 이야기가 좋아서 그 뭐야, 솔베이지 나오는 희극, 페르귄트 읽었는데, 아니 페르귄트 너무 다 늙어 죽기 직전에 돌아와서 개쌍놈이라고 내가 얼마나 욕했던가. 그런데 솔베이지는 기다렸다. 솔베이지 바보 똥구멍 ㅠㅠ 왜 기다려, 왜, 왜, 왜, 왜... ㅠㅠ
그리고 황정은은 <헝거>의 리뷰에서 자신이 어릴적 당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마 책으로 꺼내 놓기 까지는 무수히 많은 시간을 고민과 갈등으로 보내야하지 않았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황정은은 자라는 내내 어린 자신을 혼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지못해 요구에 응해주는 척하며 내 사촌이 늘 덧붙이는 말이 있었다. 커서 뭐가 되려고.
내가 자라며 그 말을 셀 수도 없이 곱씹어다는 걸 말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성장기 내내, 어린 시절 '내 놀이'에 대한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당시에 내가 어렸다는 사실은 내게 위안이나 도움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더 비참하고 수치스럽게 여겨지는 조건이었다. 어린 게 ……커서 뭐가 되려고. -p.179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자라는 내내 어린 자신에게 혹독했을까.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자라는 내내 어린 자신을 혼내주었을까. 나 역시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어른이 된지 한참 지난후까지도 어린 나를 종종 혼내곤 했다. 어린 게, 어린 게, 어린 게..
황정은은 이 일을 드러냄으로써 혹여나 사람들이 자신을 그 피해자의 틀에 가두려고 할까봐, 자신에게서 그것만 읽으려하고 그것을 찾으려 할까봐 걱정한다. 일전에 정희진 선생님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얘기했었다. 자신에게 어떤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고 했다. '왜 이런 일을 하시냐, 성폭행 피해 경험이 있냐' 라고.
그리고 황정은은 아니, 지금의 나를 만든 건 그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내 삶은 그 일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 말고도 다른 일들이 내 삶에 있었고 나는 삶과 읽기와 쓰기를 통해 조금씩 학습하면서 본의든 아니든 조금씩 변해왔다. 그 일은 내 전부가 될 수 없다. 거울은 여전히 내게 문제이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나는 이제 내 얼굴의 흔을 흉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나를 탓하지 않는다. 그 일들을 내가 원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이렇게 된다고, 결국엔 무감해지고 괜찮아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경우엔 마날 때마다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친척들과의 왕래를 뒤늦게나마 중단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내가 겪은 어려움이 그것만은 아니었다는 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커서…… 바벨을 데드리프트로 하루에 백번씩 들었다 내리느 소설가로 살고 있다는 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내 키보드와 고양이와 ……만화책을 포함해 내가 여태 읽은 책들과 앞으로 읽을 책들에 대한 기대가 내게 도움이 되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록산 게이가 『헝거』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름다운 체리 파이"245면 를 만드는 것, 그러 즐거움을 내가 알며 그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다는 점, 그것을 내가 운 좋게 알고 있다는 점이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들을 잊은 적은 없다.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그 일을 말할 수 있었다.어느 순간 문득 말하기 시작했고 말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그 일을 말하고 싶어했다는 것도 알았다. 그 일을 얼마나 말하고 싶어했는가도. -p.181
좋은 일기였고 좋은 읽기였다.
황정은이 소설을 계속 써주길 바라지만 에세이도 계속 써주길 바란다. 소설가에게 에세이를 기대하는 일은 내게 좀처럼 없는 일인데, 황정은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가만가만 정좌와 근력의 힘으로 쓰는 황정은의 글을 계속 읽고 싶다. 앞으로 읽게 될 황정은의 글에도 예의 동거인과 함께 하는 시간, 동거인을 바라보는 시간이 등장하는 것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