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죽일 수밖에 없었어》라는 제목은 이 책을 읽고 싶어 샀으면서도 읽기 싫어지게 만들었다. 원제가 《Silent Scream》인데 굳이 '너를 죽일 수밖에 없었어'라는 제목으로 바꿔야 했을까 싶지만 읽다보면 왜 그렇게 했는지도 알겠다. 그래도 원제를 그대로 살렸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일런트 스크림이라니, 이걸 어떻게 살린담. 사일런트 스크림, 이라고 쓰는 것도 별로고 그렇다면 침묵의 비명.. 정도 되어야 하는걸까, 하다가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음..그만두자.
요즘에는 여성 작가들의 추리/미스테리 소설을 읽는 일이 즐겁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과 그 사건을 구성하는 사회적 요인에 대해 날카로운 시각을 갖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고딕 미스테리 장르의 샤론 볼턴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그래서 모든 작품을 읽고 싶어하는 작가이고, 작년에 읽은 '카밀라 그레베(애프터 쉬즈 곤)'와 '레이철 케인(스틸하우스 레이크)'도 좋았다.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두려움 그리고 성적대상이 되는 일, 스토커 범죄와 포르노까지, 여성인 한 개인이 모든 여성으로 과대표화 되는 현상까지도 그들이 쓴 책에는 다 들어 있다.
안젤라 마슨즈는 '킴 스톤'이라는 경위를 주인공으로 해 '킴 스톤 시리즈'를 써냈고, 이 책은 그 중 1권이다. 킴 스톤은 어머니로부터 학대당했고 여섯살에 남동생을 잃었으며 그 뒤로 위탁가정과 보육시설을 옮겨다니며 사람이나 세상에 대한 신뢰를 잃었지만 마지막 만났던 위탁부모들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켜봐준다는 게 어떤건지 그리고 사랑이 어떤건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너무 짧았고, 그리고 지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도 잘 할 줄 모르고 돌려 말할 줄도 모르는 강력게 경위가 되었다. 킴 스톤은 혼자 살며 혼자 지낸다. 그의 동료 직원들은 그를 대장으로 모시며 그에게 충성하지만 그녀는 딱히 살갑거나 다정한 사람이 아니다. 오토바이를 수리하면서 가장 안정적인 시간을 느끼고 혼자인 게 편한 사람이며,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경찰의 룰 몇 개쯤은 그냥 어기는 사람이다.
자, 그녀에 대한 소개중 처음. 나는 이 부분부터 마음에 들었다.
킴 스톤은 가와사키 닌자를 빙 돌아가 아이팟 볼륨을 조절했다. 스피커가 비발디 <사계>중 여름 콘체르토의 낭랑한 선율에 맞춰 춤을 추며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인 '폭풍'이라는 이름의 피날레로 달려가고 있었다. -p.12
크-
클래식에 무지한 나지만 비발디의 사계중 여름만큼은 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그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하게 됐고, 영화에서 너무 인상적이었어서 한동안 유튜브로 그 연주만 들었던거다. 게다가 영화속에서 등장인물이 '폭풍이 오고' 하면서 연주했었기 때문에, 나는 폭풍이 오는 부분에서 감탄하며 여기가 바로 폭풍이지, 하면서 음악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부분은 내가 비발디의 여름을 통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지만 폭풍 뒤에 오는 하이라이트가 있다. 빰~ 바바바 빰~ 바바바 빰~ 바바바 빰~ 하고 '빰' 부분에 강하게 바이올린이 연주되는 부분은 진짜 압권이다. 그런데 우리의 킴 스톤이 비발디의 사계중 여름을, 게다가 폭풍이라는 피날레를 좋아한다는 게 아닌가.
게다가 그녀의 팀원인 '케빈'에 대한 설명은 어떤가.
킴의 팀원 중 셋째인 케빈 도슨 경사는 특별한 사람의 사진은 한 장도 책상에 올려놓지 않았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놓았다면 그는 아마 업무 시간 내내 자기 사진을 마주보고 앉아 있어야 했을 것이다. -p.24
헉...케빈, 당신 뭐야?
이 설명에 웃었다. 자기애가 나 못지 않은데? 자기애 뿜뿜하는군, 하면서 좋아라 읽는데, 그러다가 이내 내가 케빈한테 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놓는다고 했을 때 내 사진을 놓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하지만, 누구도 나만큼 나를 사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내 사진 올려놓기는 좀 거시기 하지 않나요? 흠흠.
어김없이 살인사건이 일어나면서 시작한다. 그 사건은 연쇄살인인 듯 보이고 그리고 그 살인 사건은 과거의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것임이 드러난다. 매장된 뼈가 있을 거라 짐작해 고고학자들이 오고 그렇게 킴 스톤은 '세리스'를 처음 만나게 된다.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는 우리의 킴 스톤은 세리스가 이 일에 적합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 대놓고 묻는다. 그리고 여성으로서 고고학자 학위를 따고 여기에 오기까지에 대해 킴 스톤 역시 말하지 않아도 그 고충을 알 거라고 세리스는 짐작한다.
"이 일을 할 만한 자격은 갖추고 있습니까?" 킴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세리스는 미소를 감추려 했지만, 두 눈이 반짝 빛나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8년 전 옥스퍼드에서 고고학으로 학위를 땄어요. 그런 다음 고고학 프로젝트를 하면서 주로 서아프리카 지역으로 4년간 여행을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법의학 학위를 땄고, 지난 2년은 남초 영역인 이 전쟁터에서 존경을 받고자 노력해 왔죠. 왠지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요, 경위님?"
킴은 큰소리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함께하게 돼서 반갑습니다." -p.116
얼마나 고생했는지 더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 것 같지 않은가.
얼마전에 윤여정이 나오는 티비 프로그램을 보는데, 그녀가 한국에서 일하면 이제 감독을 비롯한 다른 배우들이 자기의 말을 잘 들어준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보면 자기가 도태될 수 있어서 미국에 가 작품을 찍었노라 얘기한거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이제 여기에서 얼마만큼의 명예나 위치를 차지했으니 자기에게 힘이 좀 생겼다는 뉘앙스였다. 그리고 그 힘에 침몰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도. 그 얘기를 하는 윤여정을 보면서 엄마랑 그런 얘기를 했었다.
"엄마, 저렇게 이제 사람들이 내 말을 잘 들어주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생했겠어."
"야, 말도 못하지. 엄청 힘들었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얼만큼 어디에서 어떤 고생을 했다, 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천천히 혹은 빨리, 속도야 어떻든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또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그 순간순간들이 매번 힘들었을 거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가혹한 평가를 받고, 어떤 실수나 잘못 하나는 크게 부풀려질 것이고, 그것은 고정관념이 될 것이고.. 킴 스톤과 세리스는 그 점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거였다. 이런 대화들이, 이 소설 속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주변의 이야기들 보다도 더 좋았던 건 이 이야기의 중심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과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 피해자인 보육원의 '질 나쁜' 아이들. 이 청소년들에 대해서 살아생전의 그들의 모습을 아는 사람들은 그 죽음에 크게 아쉬워하지도 않고 고통스러워 하지도 않지만, 보육원에서 살면서도 번호로 불렸을 아이들이 죽어서도 번호로 불리는 것을 킴 스톤은 참을 수 없어한다. 피해자에게 이름을 찾아주려고 그녀는 애를 쓴다. 자신 역시 보육원에서 넘버링 되었던 기억만 있었기에 그런 일은 참을 수가 없다. 그녀는 피해자에게 이름을 찾아주고,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그들의 죽음을 슬퍼해주고, 무엇보다 그렇게 죽어간 그녀들의 범인을 찾고자 이를 악문다. 그녀는 그들이 그렇게 '질 나쁜' 청소년 일수밖에 없었던 이유릉 이해한다. 무엇보다 자신 역시 그런 시절을 거쳐왔기 때문에. 몇번이고 그녀는 피해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삶을 살아왔든, 그 뒤에 담긴 배경을 이해한다.
킴은 자신의 동기에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필요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사건과 다른 사건에 아무 차이가 없다고 자신을 설득하려 애써봐야 소용없었다. 차이가 있었으니까. 킴은 이 아이들이 과거에 겪은 고통을 알고 있었다.
그중 누구도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자기 앞에 그려진 미래를 살아가기로 선택한 건 아니었다. 아이들이 비행 청소년이 되었다고 해서 그 이유를 특정한 날에 일어난 사건으로 딱 짚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들은 상황이 끝끝내 희망을 질식시키기까지 정점과 저점을 찍는 느린 여행을 거쳐온 것이다.
큰 사건이 벌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킴은 자신이 오직 '아동'이라고만 불렸던 게 생각났다. 직원들은 굳이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없도록 모두를 '아동'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자신의 동기가 이렇게 잊혀버린 아이들에게 정의를 세워주려는 욕구에서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발걸음이 늦춰지지 않으리라는 것도. 그래서 킴은 자신과 보조를 맞춰주려는 모든 사람이 고마웠다. -p.215-216
그녀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쌓여가고 있었다. 아무리 나쁜 짓을 했다지만, 이 소녀들은 죽어마땅한 아이들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그들의 목숨을 없애버려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니 역겨웠다. 그녀가 바로 이런 소녀 중 한 명이었다. 그들 모두에게는 싸워볼 기회가 주어져야 했다.
삶을 시작할 때 형편없었다는 이유만으로 미래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킴이 그 사실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였다. 그녀의 유년 시절은 범죄와 마약, 자살 시도, 어쩌면 그보다도 나쁜 것들로 이루어진 삶을 약속하는 것만 같았다. 모든 표지판이 삶을 파괴하는 길을 가리켰다. 킴자신의 삶이든, 다른 사람의 삶이든. 그러나 킴은 미리 결정된 존재 방식에 엿을 먹였다. 세 피해자라고 해서 같은 일을 해내지 못했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p.241-242
킴 스톤이 이렇게 말해줄 때마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건을 수사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위안이 됐다. 죽어가는 순간에 고통에 떨었을 피해자들에게,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인류애를 붙들게 해주었다. 그래서! 킴 스톤을 더 읽고 싶어졌다. 킴 스톤이 어떤 사건을 맞닥뜨리고 또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지, 무엇보다 그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떤 생각과 행동을 보여줄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 책을 또 사야겠다.
물론, 오늘 아침 뜯은 택배 박스에서는 이 책들이 나왔지만!!

무릇 월요일이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도착한 책 박스를 뜯고 새 책을 주문하는, 그런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