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만의 허기
레온 드 빈터 지음, 지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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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만은 1968년 9월 6일 이후로 줄곧 불면증에 시달려왔다. 그날 이후 그는 자신의 죄수가 되었다. -p.48



59세의 펠릭스 호프만 대사는 네덜란드에서 체코로 발령받았다. 젊은시절 서기관으로 일을 시작했던 호프만은 타고난 식탐이 있긴 했지만 사랑하는 '마리안'과 결혼하고 그토록 염원하던 딸들을 한꺼번에 둘이나 얻음으로써 그 식탐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는 행복했고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딸중에 한 명이 어릴 때 백혈병을 앓고 사망하는 일이 일어나고 그는 그 이후로 불면증에 시달린다. 대사를 환영한다는 연회가 열린 자리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먹고 마시고 혼자 있을 때도 밤이 새도록 먹는다. 그는 잠을 자기 위한 노력을 하는 대신 날이 밝아오는 걸 보면서 먹고 그렇게 한참을 먹다가는 위에 밀어넣었던 음식들을 손가락을 넣어 게워내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신의 식탐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1968년 딸 하나를 잃어 그가 불행을 맞이하게 됐다면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 남은 딸은 성인이 되어 약물중독으로 죽었다. 그는 진작 승진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대사가 되어 발령받았고 그러나 사랑했던 딸 둘은 자기보다 일찍 죽었으며, 아내와는 그저 한 집에 살 뿐 더이상 다정하지도 않다. 다만 외교관들을 상대로 한 부부 모임에서 정확히 그 역할들만을 해낼 뿐. 그는 허기졌고, 그래서 먹는다. 의사가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며 그만 먹으라고 말리는데도, 그는 콜레수테롤이 정말 건강에 안좋은건지 믿지 못하겠다며 자기 고집대로 한다. 사실 그는 딱히 살 의지도 없고 의욕도 없어 보인다. 그런 그에게 친한 친구이자 직장 동료는 말할까 말까 망설였다며, 최근에 극장에 가 본 포르노 영화에 네 죽은딸이 배우로 나왔다고 말해준다. 이에 호프만은 놀라서 그 영화를 보고, 그리고 은퇴후 자신의 비상금으로 마련해두었던 돈을 모두 쏟아부어 그 필름의 원본과 복사본을 사들인다. 내 딸이 사람들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는 이 필름을 사람들이 보게할 수 없다.



이렇게 삶에 있어 뭐하나 재미도 행복도 없는 것 같았던 호프만이 스피노자를 읽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에서 체코에 마련해준 관저에는 그간 머물렀던 대사들이 놓고 간 물건들이 쌓여있고, 그 다락방에서 우연히 스피노자의 『지성의 개선 및 지성을 사물의 참된 인식으로 인도하는 방법에 대한 논고』를 발견하게 된거다.

과거 한 때 철학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인생에 대한 고민도 했던 그인만큼 비트겐슈타인도 읽었고 버트런트 러셀도 읽었으며 한나 아렌트도 읽었지만 또한 시오랑과 레비나스의 책을 읽어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스피노자는 감히 가까이해볼 생각이 없는 호프만이었다. 그런 호프만이 스피노자를 읽기 시작한다. 캐비아를 먹으면서, 샴페인을 마시면서, 거위간을 먹으면서, 와인을 마시면서, 햄을 먹으면서 스피노자를 읽는다. 구절 하나하나 읽으면서 그는 자신의 식대로 해석하고 또 자신이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예를 든다. 이건 이런 뜻이 아닐까, 이건 이렇게 예를 들면 될것이다, 하면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진실과 지식과 지복에 대해서 알고자 하고 깨닫고자 한다. 그리고 계속 읽고자 한다. 그가 스피노자를 읽는 것은 그러므로 먹는 중에도 계속되고 그가 배설하는 중에도 계속 된다. 딸의 과거에 대해 알고 고통스러운 가운데에도 계속되고 그가 문제에 휩싸여 도망치는 와중에도 그는 스피노자를 들고 간다. 심지어 그의 죽음을 늦춰야 하는 이유도 스피노자에 있다. 끝까지 읽고 싶다는 그 열망에 그에게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심한 허기를 가진 호프만의 스피노자 책 읽기가 전부인 책이 아니다. 호프만 보다 먼저 등장하는 엄청난 비만인-세계에서 가장 비만한 백 명 가운데 한 명- '프레디 맨시니'라는 미국인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프레디 맨시니는 다이어트에 도움이 될거라며 아내의 설득에 넘어가 유럽여행을 가게 되고 그렇게 체코에 도착했다. 때는 1989년. 저녁 식사때 패키지 여행객들의 스테이크까지 다 먹어치운 그였지만 새벽 두시에 허기가 져서 참을 수가 없다. 그러나 프라하의 호텔은 그 밤에 룸서비스가 불가능하고 그가 밖으로 밥 먹으러 나가겠다는데 호텔 보안요원들이 제지한다. 이 새벽에 나간다고? 안돼. 너 불량한 자들에게 잡혀가. 그러나 그는 기어코 바깥으로 나갔고, 택시를 잡아타고 이 새벽에 영업하는 식당을 향해 가려다가 가진 돈을 다 털리고, 그런 와중에 납치사건을 목격하게 되는 거다. 그런데 그 납치된 자가 미국 정보부요원이었고 이에 그는 증인이 되어 '안가'로 불려가고 그런데 그 안가에서는 그를 극진히 대접하며 세상 최고 맛있는 칠면조 요리를 대접하고 그래서 그는 거기에서 집에 가기 싫어지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면 이 책으로 '레온 드 빈터'는 밀란 쿤데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책을 읽기 전의 나는 그 표현을 보고 '이런거 진짜 별로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장 읽지도 않고 오 맞네 맞네, 밀란 쿤데라 완전 딱이네, 하게 되었는데, 특히나 이 책의 끝부분 프레디 맨시니의 삶을 보노라면 '밀란 쿤데라'의 《농담》도 생각나는 것이다. 이중 스파이와 시대적 상황에 대한 갈등과 한 인간의 깊은 내면에 대해 드러내면서 그런데 스피노자까지 배치하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겉으로 보면 프레디 맨시니도 그리고 호프만도 그저 식탐에 차 건강을 챙길줄도 모르는 비만인이다. 그런데 프레디는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걸 먹는 걸로 채우고 있으며, 호프만 역시도 지독한 불면증과 고통을 갖고 있었다. 호프만은 자신의 딸들이 이른 나이에 둘다 사망한 것에 대해 '내가 벌을 받은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일찍이 나치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나를 쉬게 해줄 사람들은 내 부모님 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일에도 딱히 열심이지 않고 자기 몸 하나 챙길줄 모르는 호프만이지만 그 내면과 정신이 누구보다 치열했다. 내가 이러는 것은 이 나이에 해서는 안될짓이겠지 너무 수치스러워, 하면서 삶의 지복을 찾고자 하고 진실을 찾고자하는 그라는 인간을, 겉에서 호프만 대사로 만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들여다볼 수 있을까. 왜 어린 시절 부모의 상실감을 겪었던 그에게 청년시절 찾아왔던 행복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으스러졌을까. 그는 자꾸만 자꾸만 죽어갔던 어린 딸에 대해 생각하고 상황을 망치는줄 알면서도 연회에서 과음하다 쓰러진다. 어쩌면 이것이 상황을 망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지옥불에 뛰어들기도 한다. '어떤 연줄이 있어서 운좋게 저 자리에 있는 것 같은 저 뚱뚱한 인간' 인 호프만이 가지고 있는 그 자신만의 역사가 무엇인지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타인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알지 못하는 채로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과연 온당할까.



현재를 살고 있는 호프만이지만 늘 불행한 과거와 함께 가고 있었다. 불행환 과거는 당연하게도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미래까지 손을 뻗는다.



파괴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은 그 방법도 다양하지만 대상을 달리하기도 한다. 나를 파괴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을 파괴하기도 한다. 프레디가 이혼을 통보한 아내를 죽여버리고 싶어하는 그 욕망과 원망은 자신을 망가뜨리면서 살아온 그가 그 대상을 달리한 게 아닐까.



아주 재미있고 똑똑한 소설이다. 밀란 쿤데라를 좋아하는 이들과 밀란 쿤데라를 모르는 이들, 스피노자를 좋아하는 이들과 스피노자가 대체 뭔데 하는 이들 모두 읽으면 좋을 책이다.



무엇보다 호프만이 스피노자의 『지성의 개선 및 지성을 사물의 참된 인식으로 인도하는 방법에 대한 논고』를 완독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 책 안에 그 답이 있다.






그는 허기를 채우기 위한 여정에서 부딪히는 모든 난관을 무조건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다. 그는 약자였다. 위장의 노예였다. - P21

모에 샹동 맛도 그리 나쁘지 않으나 호프만은 테탱제를 선호했다. 동 페리뇽이 최고라고들 하지만 호프만 생각으로는 값만 터무니없이 비싸며, 돈푼이나 있고 감식력은 전무한 졸부들을 위한 샴페인이었다. - P39

스피노자도 직장을 가진 한 가족의 가장이었고, 다른 사람들처럼 부를 추구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의혹을 품기 시작했고, 결국 양자택일하는 도박을 감행하기로 했다. 즉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포기하고 지복을 찾아 나설 수도 있었고 아니면 소유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 수도 있었다. - P49

스피노자는 지성의 개선과 정화에 이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무엇보다 먼저 대중이 이해할 수준에서 말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다. 이것은 학교 교사나 이미 개선된 지성을 갖춘 교양인에게 해당되는 규범이었다. 그래서 호프만 같은 초보자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이었다.
두 번째 규범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바로 그만큼만 쾌락을 즐길 것‘, 세 번째 규범은 ‘반드시 생계를 꾸리고 건강을 유지하며, 목적에 저해되지 않는다면 돈이나 다른 물질은 관습에 맞춰 살만큼만 소유하도록 할 것‘이었다. - P71

"프레디, 당신은 그냥 뚱뚱한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은 우리 미합중국에서, 말하자면 세계에서 가장 비만한 백 명 가운데에 들 겁니다. 우리 비서가 요즘 당신들이 애독하는 잡지의 편집부에 문의해봤는데 백 명의 가장 비만한 사람들 가운데 기혼자는 겨우 네 명에 지나지 않고 또 그 네 명 중 셋은 본인 못지않게 뚱뚱한 상대와 결혼해 누구랄 것 없이 부부가 모두 생활의 대부분을 끝없이 먹기만 하며 지낸다고들 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랑으로 결혼 생활을 유지한 사례는 단 한 명뿐이었는데, 그 유일무이한 실례의 장본인이 다름 아닌 바로 프레디 당신이었다는 겁니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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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6-08 1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전 이 책 미국인 맨시니 나오고, 호프만 나온 부분까지 읽다가 지금 다시 다른 책 읽고 있는데, 걍 쭉 읽어야겠어요. 호프만 딸한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중얼중얼.

다부장님은 스피노자 안 읽으세요? 이 책 보니 읽으실 거 같은데. ㅋㅋㅋㅋ

다락방 2021-06-08 11:35   좋아요 3 | URL
잠자냥 님.. 저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계시네요?
마침 스피노자 입문서 친구가 추천해줬던 거 있어서 사려고 했는데 절판이에요.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중고도 판매자 중고밖에 없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피노자 읽으면서 호프만의 허기 같이 읽으면 좋을것 같아요. 저는 호프만의 허기를 재독할 예정입니다. 후훗.

Falstaff 2021-06-08 1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흥미 돋습니다. 일단 보관.
그럼 이만.

다락방 2021-06-08 11:33   좋아요 3 | URL
제가 이 책 읽으면서 폴스타프 님과 잠자냥 님 두 분을 생각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 두 분은 좋아할 것이다!! 폴스타프님은 이 책 읽으시면 엄청 재미난 리뷰 적어주실 것 같아요!

syo 2021-06-08 12: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의 동물 우화>가 절판인 관계로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가 차선입니다. 심지어 얘는 더 쉬워!
그렇지만 가능하면 먼저 대출을 권합니다.....

다락방 2021-06-08 14:56   좋아요 1 | URL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메모메모.
오케바리. 땡큐!

그레이스 2021-06-08 13: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을것 같네요
똑똑한 소설,
일단 밀란 쿤데라 좋아하고, 스피노자에 관심있으므로 읽어봐야겠네요.

그레이스 2021-06-08 14:36   좋아요 2 | URL
빌려왔죠
제발 읽고 반납해야 하는데...^^;;

다락방 2021-06-08 14:56   좋아요 2 | URL
아니 댓글 쓰고 한시간만에 가서 빌려오셨네요? 행동력 천재십니다! ㅋㅋ

그레이스 2021-06-08 15:06   좋아요 2 | URL
마침 반납할 책이 있었어요^^
도서관이 집앞이라...

새파랑 2021-06-08 14: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쿤데라라고 하니까 급 읽고 싶어지네요 ㅎㅎ 스피노자는...잘 모르지만 ^^

다락방 2021-06-08 14:57   좋아요 3 | URL
새파랑 님 정말 재밌게 잘 읽은 소설입니다. 크- 추천추천합니다!
저는 스피노자도 모르지만 이 책 펼치기 전에는 스피노자 나올 줄도 몰랐답니다? ㅋㅋ

북다이제스터 2021-06-08 19: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스피노자를 읽었다. 에서 ‘그리고’가 긴 여운으로 맘에 와 닿습니다.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다락방 2021-06-08 20:06   좋아요 2 | URL
여운으로 마음에 와 닿았다니 좋네요. 잘 읽어주셔서 기쁩니다. :)

붕붕툐툐 2021-06-08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결론은 모두 읽어도 좋다인거죠? 다부장님의 추천이라면 기꺼이~😉

다락방 2021-06-09 08:49   좋아요 2 | URL
네네 모두 읽어야 한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붕붕툐툐님은 항상 캐치가 빠르세요. 감 천재 이십니다! ㅋㅋ

새파랑 2021-07-07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옆에 있는 서재의 달인 메달이 장난 아니네요👍👍 당선 축하드려요 😄

다락방 2021-07-08 10:13   좋아요 2 | URL
아이쿠, 감사합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1-07-07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축하합니다

다락방 2021-07-08 10:13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초딩 2021-07-07 23: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관왕 축하드려요~

다락방 2021-07-08 10:13   좋아요 3 | URL
아이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