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벽 1 발란데르 시리즈
헤닝 만켈 지음, 권혁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예전에 블로그에 썼던 리뷰를 다듬어서 가져옵니다)

-시리즈의 정체성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즉, 이번에도 발란더가 신나게 말립니다. 폴 셸던이나 조니 마린빌이 비평가를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기자를 싫어하는 발란더 씨는, 2장부터 기자에게 말리기 시작해 소설 끝날 때까지 세력다툼에 말리고, 사건에 말리고, 여자 문제에 말립니다. 당뇨 증세는 좀 나아졌고 체중 감소에도 성공했습니다만, 리가에 계신 바이바 씨는 전화할 생각을 안 하네요. 딸 린다 역시 얼굴 보기도 힘들거니와 목소리 듣기도 힘듭니다. 결국 발란더 아저씨는 교제광고를 내기로 결심합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찢어낸 신문조각을 꺼내 다시 교제광고란을 읽어 보았다. 자신의 광고문안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당뇨증세가 있고 자기 업무에 대한 흥미를 점차 잃어가는 50살의 수사관, 그리고 숲을 산책하기 싫어하고 저녁에 벽난로에 불을 피우거나 요트를 즐기는 낭만도 없는 남자에게 대체 어떤 여자가 관심을 보일 것인가?
 신문조각을 내려놓고 광고문안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아내와 이혼하고 성년이 된 딸이 있는 50살의 수사관이 고독을 떨치려 하고 있음. 용모나 나이는 문제되지 않음. 하지만 가정적이고 오페라를 즐기는 여자를 선호함.
<97수사반>으로 연락 바람.


 모든 것이 거짓말투성이였다. 여자의 용모는 중요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고독을 떨쳐버리려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 두 가지는 다르다. 함께 잘 수 있고 자기가 원할 때 같이할 여자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평화롭게 내버려두는 여자. 종이를 찢어버리고 문안을 처음부터 다시 적어보았다. 이번에는 너무 솔직한 문안이 되었다.

 아내와 이혼했으며 성년이 된 딸이 하나 있고 당뇨증세가 있는 50살의 수사관이 때로 함께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고 있음. 예쁜 얼굴, 늘씬한 몸매를 갖추고 에로틱에 관심이 있는 여자를 원함.
 <올드 독>이라는 사람에게 연락 주기 바람.


 광고문안을 적어놓고는 누가 도대체 이런 교제광고에 응답할까 싶었다. 제정신인 여자라면 응답할 리 없다.
 메모장을 넘기고 다시 문안을 작성해 보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 노트를 했다. 시계를 보니 12시였다. 회그룬트였다.
 그는 문득 교제광고문이 실린 신문조각을 책상 위에 그대로 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신문조각을 집어 휴지통에 내던졌다. 하지만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그녀가 눈치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나서 다시는 교제광고문 따위는 쓰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행여 회그룬트 같은 여자가 광고문을 읽고 대답할 위험이 있었다.

 
   

 이 부분을 읽은 직후 저는 상당히 울컥했습니다. '행여 회그룬트 같은 여자가 광고문을 읽고 대답할 위험이 있었다' 라니, 너무 하잖습니까. 저는 쿠르트 발란더라는 캐릭터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안-브리트에 대한 이 사람의 평가는 좀 왜곡된 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발란더는 안-브리트를 너무 싫어해요. (...) 그녀는 예쁘고 성격좋고 똑똑하고 일 잘하고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좋은 엄마가 되려고 애쓰는 캐릭터입니다. 그러다가 이혼하고 혼자 경찰 일을 하면서 애들을 키우느라 현재 생지옥을 맛보고 있죠.

 어쨌든 안-브리트의 결함을 있는 대로 다 뽑아낸다 하더라도, 한 마디로 상대가 안 됩니다! 발란더'따위'가 안-브리트에게 저런 식으로 말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예쁘고 성격좋고 똑똑하고...결정적으로, 언제나 발란더 편이잖아요. 제발 그냥 회그룬트랑 살아... 

 바로 전의 책에서 안-브리트의 이혼 이야기를 들고 나왔을 때, 그녀를 이혼하게 한 것은 나중에 둘이 어쩌구저쩌구하려는 복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은(갑자기 [테하누] 가 생각나는데요) 저 뿐만이 아닐 겁니다. 작가가 미국인이기만 했어도 좀 더 기대했을 거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스웨덴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한여름의 살인]의 영화판을 보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

 이번 책도 사건 자체보다 발란더가 더 강합니다만,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번 표지도, 책 판형이 바뀌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드는데 두 권인 건 마음에 안 드는군요. 그래도 제가 끈질기게 불만이었던, 안-브리트 회그룬트가 발란더에게 반말 찍찍 하고 '자네'라고 부르던 번역이 바뀌었습니다! 직급이 그만큼 차이가 나고 나이가 그만큼이나 차이가 나는데, 한국어의 '자네'는 쓸 말이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Trivia
과잉 친절이랄까...시리즈를 순서대로 읽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면 '이본느 안데르'의 이름 뒤에다 그런 역주를 다는 건 하지 않아도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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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컨이라는 사람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썼다는 게 사실이 아닌가요? " 하고 포피가 물었다.
 "그런 건 요즘엔 이미 한물간 얘기야. " 데이비드가 친절하게 말했다. "그런데, 당신, 베이컨에 대해서 알고 있기라도 하오? "
 "화약을 발명한 사람이잖아요. " 포피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로저, 프란시스, 로저...
 전 신촌 홍익문고에서 굴러다니다, 괴테와 단테를 신나게 헛갈리는 아가씨도 본 적이 있지요.

 -[창백한 말]을 아직 읽지 않았고 읽을 생각이 있다면 www.agathachristie.com의 이 소설 섹션은 절대 보지 말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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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네도 문학도라면 그 정도 환각은 봐야지. 자네는 소설가인 주제에 상상력이 전혀 없어. 원래 소설가 하면 말 자체가 장사 도구 아닌가. "
 "계속 실례되는 말을 하는군. 내 상상력은 샘물 같네. "
 "그렇다면 문학도 선생은 불사리(佛舍利)라는 게 얼마나 있는지 아시나? "
 이번 질문은 아마 농담일 것이다. 그는 평소 바보 취급하는 용도 이외에는 나에게 선생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다.
 "불사리라는 것은 석가모니의 뼈를 말하는 거지. 불사리탑은 전국에 있고, 아니 일본뿐만이 아닐 거야. 얼마나 많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걸. "
 "모든 탑에 들어 있는 뼛조각을 모으면 코끼리 한 마리분의 뼈는 된다고 하더군. 자, 선생은 그 얘기를 어떻게 생각하시나? "
 "어떻게 생각하다니, 바보 같은 얘기지. 그렇게까지 해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사원의 권위를 높이고 싶었든가, 아니면 뼈를 나눌 때 다른 걸 더 넣은 놈이라도 있든가-" 교고쿠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내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그러니 상상력이 없다는 걸세. 어째서 '흐음, 석가모니는 그렇게 커다란 사람이었나? '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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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도연대 雨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이길진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올해 2월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다소 다듬어 올립니다)

 -우연한 계기로 쿄고쿠도 시리즈의 영화판 캐스팅을 알게 된 이래, 제가 좋아하는 에노 씨 역을 그...분이 맡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아찔한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무서운 일이 일어난 건 [백기도연대 雨]를 읽기 시작한 후였습니다.

 ......환청이 들리는 거예요, 아베 히로시의 목소리로!

 큰일났다, 진지하게 생각하기는 틀렸어... 별로 진지하게 볼 책도 아니지만-저는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새벽 세 시라는 엉뚱한 시간에 깨어 어느 방향으로 누워도 불편한 상황에서 한 권을 다 읽고 나니 난감함이 덮쳐왔습니다. 읽었으니 뭔가 써야만 할 텐데, 에노 씨 팬이 아닌 사람들(이를테면 우리 아버지)에게 이 책에 대해 대체 뭐라고 설명한단 말입니까? 작가 동인지? 스핀오프 시리즈? 딱히 스핀오프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여기서도 일은 쿄고쿠도가 훨씬 많이 한단 말입니다!

 ...어떻게든 흥분을 가라앉히고, 과연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차분하게 써 보도록 하지요.

 [백기도연대 雨]는 장미십자탐정 에노키즈 레이지로가 해결, 아니 '분쇄' 한 세 건의 사건을 모은 단편집입니다. 저 과격한 용어는 본문에서 등장한 것이니 저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는 탐정이되 사건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을 분쇄할 뿐이지요. 애초에 모든 것이 보이는 사람에게 추리나 해결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하찮은 중생에게도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인내심 강한 탐정들에게 익숙해진 우리는 시작부터 창백해진 채로, 에노 씨의 뒤를...

 ...쫓을 필요는 사실 없습니다. 인내심 강한 쿄고쿠도가 다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호저Porcupine.
으헉, 이 사진 귀엽다!


 에노 씨의 수준에 맞춰 주변 상황이나 분위기나 소도구가 귀엽게 하향평준화되어 있기 때문에(호저!), 쿄고쿠도의 주워섬기기도 평소와는 좀 다른 모습을 띱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주워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주워섬기는 쿄고쿠도'를 처음 보았을 때는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만... 이번 권의 화자인, '부하라고는 해도 정식 부하가 아니라 사실은 그 탐정의 피해자'는 좋은 관찰자입니다. 세키구치가 쿄고쿠도에 대해 쓸 때만큼 노골적으로 촉촉히 젖은 눈을 반짝이지도 않고, (아직까지는) 비현실에 치여 빈사상태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나리가마鳴釜 : 본문에 등장한 애들 중에선 얘가 제일 귀엽군요.


 공정하게 말하자면 제가 더 관심을 가질 쪽은 이 책보다는 모티프가 된 [畵圖百器徒然袋(がずひゃっきつれづれぶくろ)] 쪽입니다. :] 제가 츠쿠모가미라면 그저 덮어놓고 좋아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위키페디아에 생각보다 많은 수가 꽤 좋은 화질로 올라와 있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귀여워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세 편 중 가장 훌륭했던 것은 역시 [가메오사 : 장미십자탐정의 울분] 이고, [나리가마 : 장미십자탐정의 우울]은 세 편 중 가장 처지고, [야마오로시 : 장미십자탐정의 분개]는 그럭저럭 재미있는 단편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코토후루누시琴古主 : 그냥 훑어본 애들 중에선 얘 디자인이 제일 좋군요.
하지만 이 분은 雨에도 風에도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흑.


 [가메오사]를 높이 치는 것은 사건의 진상이랄까 내용물이 예측 가능했음에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주요 배경인 '항아리 저택'의 컨셉과 묘사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노 씨 깽판치기가 잘 살아있는 것은 [야마오로시] 쪽이고, 의외의 쿄고쿠도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나리가마] 쪽이지만, 그 모든 것을 다 합치더라도 저 항아리 저택 하나에 완패입니다. 쿄고쿠 나츠히코의 배경에 이렇게 찬성해 보기는 또 처음이군요.

 저는 여전히 에노 씨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이 책을 다 읽고 났더니 제가 왜 좋아하는지도 분명치 않아졌어요. (싫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마자케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우겨 보고 싶습니다. 뒤돌아서서 어깨를 들먹거리며 숨죽여 웃고 있는 쿄고쿠도를 본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요? (만약 제가 쿄코쿠도를 실제로 아는 사람이라, 눈 앞에서 저 광경을 보았다면 전 기절해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제 3자의 눈으로 이 자들의 관계에 대한 확증을 내린 걸로? 그래, 이 놈들 역시 누가 봐도 친구가 아니라 '일당' 이었던 거예요! -_-;

Trivia
번역은 약간 문제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오타가 꽤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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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8-11-18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저도 읽어 봤는데 정말 웃기더라구요.추리소설이라가 보다는 무슨 기문괴담류의 글을 읽는 느낌이었읍니다요 ^^

eppie 2008-11-21 15:59   좋아요 0 | URL
원래 시리즈의 방향이 그쪽이다 보니...^^; 그리고 꽤 유머가 강하죠.
저는 오히려 이 [백기도연대] 가 쿄고쿠도가 등장하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미스터리로써는 충실한 게 아닐까 생각해요. [망량의 상자]를 몹시 좋아하기는 하지만...
 
추억의 학교 우리문고 9
조반니 모스카 지음, 김효정 옮김 / 우리교육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ABE 전집 1권 [나의 학교 나의 선생]을 2004년 새로 출간된 버전으로 읽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 별 두 개는 원작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잘못 집으면 짧게는 반나절에서 길게는 반평생까지 우울해지는 것으로 유명한 ABE 전집의 책들 중에도 트라우마 걱정 없이 남에게 권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이야기들이 가끔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나의 학교 나의 선생]입니다. ABE 전집을 고분고분 순서대로 읽어제꼈던 저는 가장 먼저 읽은 [나의 학교 나의 선생]을 예나 지금이나 사랑하고, 저 전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책 [추억의 학교]는 아닙니다.

이 책의 원제가 '추억의 학교Ricordi di scuola' 라고 해서, 이 소설의 가치가 '추억' 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다만 어떤 추억이냐가 문제지요. ABE 전집에서 [나의 학교 나의 선생]을 꺼내 읽을 때, 생각하면 좀 아득해지는 것 같은 상황들조차도 결과적으로는 행복하게 넘어갈 수 있게 했던 것은 작가 조반니 모스카 선생의 다소 뻔뻔하고 따뜻한 유머감각이었습니다.

새 책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물론, 문체가 바뀌었습니다. '합니다' 대신 '한다' 로 바뀌었습니다. 좀처럼 이런 종류의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저도, 이 작품에는 '합니다' 체가 어울린다고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문체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새 판에서는 유머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가 힘들다는 점입니다. 아래 인용문은 ABE 전집 판에서도 제가 상당히 좋아했던, '옛날 시험문제와 요즘 시험문제의 차이' 대목의 도입부입니다만 새 버전에서는 이렇습니다.

   
  (...) 교사 생활을 한 지 이십 년이 지난 뒤에도 교사들은 모두 똑같다. 모두 똑같은 패션의 넥타이를 구입한다. 벤젠 냄새를 풍기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똑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아이네아스는 어린 아들 아스카니우스와 함께 테베레 강 하구에 상륙했다' 혹은 '로렌초 씨는 지름 14미터의 둥근 지붕을 가지고 있는데, 그 지붕을 구리판으로 덮으려고 한다' 등등.
그러나 나이 든 교사들만 그렇게 말한다. 젊은 교사들의 수학 문제엔 여러 사람과 장소가 등장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공책에 이렇게 적는다. '늙은 옷감 장수가 48미터의 천을 산다.' 혹은 '고모가 돌아가셨다. 잔네토와 루이지노는 한 송이에 0.05리라 하는 꽃을 가져가려고 한다. 잔네토는 1리라를, 루이지노는 50첸테시모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런 말도 있다. 늙은 옷감 장수는 길고 하얀 수염을 기르고 있다. 그런데 그가 깃털이 아름다운 앵무새를 어깨에 놓는 걸 누가 방해할까? 아이들은 그러므로 앵무새를 상상한다. 늙고 착한 상인의 상점에 행복하게 들어가서 앵무새를 쓰다듬으면서 문제를 푼다.
 
   

문제가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저는 위 문장들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 저는 조반니 모스카가 저런 문장을 썼다고 믿고 싶지가 않습니다.

 
모스카 선생님과 아드님들.


이 책에는 ABE 판에는 없던 챕터 세 개가 더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린 이유는 알겠어요. 아마 '비교육적' 이라서일 겁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그러니까 젊은 시절의 조반니 모스카 선생이-대학 입시 준비를 하면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장면 따위가 나오거든요. :] 그 부분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어요.

하지만 이 책에는 '저의' 모스카 선생님이 없습니다.
덕분에 다시 이탈리아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참 공부를 안 했더니 원제를 보고 겨우 사전 없이 무슨 뜻인가 알 수 있고, 위키페디아 첫부분 한두 줄을 이런 뜻인가 넘겨짚고, 이걸 읽어보고 어느 장면인가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의 쪼렙이 됐지만...이 책을 원문으로 읽고 싶다는 소망은 여전합니다.

Trivia
1. 물론 이 책에는 그런 종류의 아주 끔찍한 애들은 나오지 않습니다. 미화라기보다는 생략이라고 생각해요.
2. 늙어서 다시 보니, 이렇게까지 눈물나는 이야기였던가 싶은 부분이 꽤 있었습니다. (안토니오 가르비니 선생님 ;ㅁ;)
3. [나의 학교 나의 선생] 하면 역시 이 분 빼고 갈 수는 없지요. : ] 다들 기억하시죠?


 
Camillo Benso, conte di Cav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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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2008-11-24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발췌하신 부분을 보니 확실히 어색하네요. 느낌이 다릅니다, 달라요! 자칫하면 꽤 우울할 수 있는 이야기까지 참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재미있는 책이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갓 부임한 선생님이 문제아 반을 맡아서 큰 파리를 종이총으로 잡는 걸로 아이들의 존경을 얻는 이야기라던가, 국가에서 요구하는 자격 때문에 시험을 치는 노동자 아저씨들의 시험을 감독하게 된 선생님이 슬쩍 힌트를 주는(?) 그런 이야기가 기억이 나네요. 다시 읽고 싶어요.^^ 근데 새로 나온 책은 사야 하나 고민이 되네요.

eppie 2008-11-25 10:07   좋아요 0 | URL
내용이 저 짝인데도 다시 내 줄 계획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어서, 좀 난감합니다. ㅠ_ㅠ 그냥 ABE 판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봐요. 저도 그 자격시험을 보러 온 노동자 아저씨들 이야기가 굉장히 좋았는데요. 노처녀 선생님 이야기도 좋았죠. 마르티넬리의 금화를 돌려받으려고 여선생한테 공작(?) 하는 얘기는 예나 지금이나 좀 씁쓸하지만...가르비니 선생님(저축한 돈으로 말을 한 마리 사고 싶어했던 그 분이요)이야기같은 아예 슬픈 이야기랑은 다른 종류의 씁쓸함이 있었어요. 그래도 보석 님 말씀대로, 전체적으로 분위기 조절이 잘 된 책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