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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도연대 雨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이길진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올해 2월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다소 다듬어 올립니다)
-우연한 계기로 쿄고쿠도 시리즈의 영화판 캐스팅을 알게 된 이래, 제가 좋아하는 에노 씨 역을 그...분이 맡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아찔한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무서운 일이 일어난 건 [백기도연대 雨]를 읽기 시작한 후였습니다.
......환청이 들리는 거예요, 아베 히로시의 목소리로!
큰일났다, 진지하게 생각하기는 틀렸어... 별로 진지하게 볼 책도 아니지만-저는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새벽 세 시라는 엉뚱한 시간에 깨어 어느 방향으로 누워도 불편한 상황에서 한 권을 다 읽고 나니 난감함이 덮쳐왔습니다. 읽었으니 뭔가 써야만 할 텐데, 에노 씨 팬이 아닌 사람들(이를테면 우리 아버지)에게 이 책에 대해 대체 뭐라고 설명한단 말입니까? 작가 동인지? 스핀오프 시리즈? 딱히 스핀오프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여기서도 일은 쿄고쿠도가 훨씬 많이 한단 말입니다!
...어떻게든 흥분을 가라앉히고, 과연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차분하게 써 보도록 하지요.
[백기도연대 雨]는 장미십자탐정 에노키즈 레이지로가 해결, 아니 '분쇄' 한 세 건의 사건을 모은 단편집입니다. 저 과격한 용어는 본문에서 등장한 것이니 저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는 탐정이되 사건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을 분쇄할 뿐이지요. 애초에 모든 것이 보이는 사람에게 추리나 해결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하찮은 중생에게도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인내심 강한 탐정들에게 익숙해진 우리는 시작부터 창백해진 채로, 에노 씨의 뒤를...
...쫓을 필요는 사실 없습니다. 인내심 강한 쿄고쿠도가 다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호저Porcupine.
으헉, 이 사진 귀엽다!
에노 씨의 수준에 맞춰 주변 상황이나 분위기나 소도구가 귀엽게 하향평준화되어 있기 때문에(호저!), 쿄고쿠도의 주워섬기기도 평소와는 좀 다른 모습을 띱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주워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주워섬기는 쿄고쿠도'를 처음 보았을 때는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만... 이번 권의 화자인, '부하라고는 해도 정식 부하가 아니라 사실은 그 탐정의 피해자'는 좋은 관찰자입니다. 세키구치가 쿄고쿠도에 대해 쓸 때만큼 노골적으로 촉촉히 젖은 눈을 반짝이지도 않고, (아직까지는) 비현실에 치여 빈사상태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나리가마鳴釜 : 본문에 등장한 애들 중에선 얘가 제일 귀엽군요.
공정하게 말하자면 제가 더 관심을 가질 쪽은 이 책보다는 모티프가 된 [畵圖百器徒然袋(がずひゃっきつれづれぶくろ)] 쪽입니다. :] 제가 츠쿠모가미라면 그저 덮어놓고 좋아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위키페디아에 생각보다 많은 수가 꽤 좋은 화질로 올라와 있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귀여워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세 편 중 가장 훌륭했던 것은 역시 [가메오사 : 장미십자탐정의 울분] 이고, [나리가마 : 장미십자탐정의 우울]은 세 편 중 가장 처지고, [야마오로시 : 장미십자탐정의 분개]는 그럭저럭 재미있는 단편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코토후루누시琴古主 : 그냥 훑어본 애들 중에선 얘 디자인이 제일 좋군요.
하지만 이 분은 雨에도 風에도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흑.
[가메오사]를 높이 치는 것은 사건의 진상이랄까 내용물이 예측 가능했음에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주요 배경인 '항아리 저택'의 컨셉과 묘사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노 씨 깽판치기가 잘 살아있는 것은 [야마오로시] 쪽이고, 의외의 쿄고쿠도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나리가마] 쪽이지만, 그 모든 것을 다 합치더라도 저 항아리 저택 하나에 완패입니다. 쿄고쿠 나츠히코의 배경에 이렇게 찬성해 보기는 또 처음이군요.
저는 여전히 에노 씨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이 책을 다 읽고 났더니 제가 왜 좋아하는지도 분명치 않아졌어요. (싫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마자케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우겨 보고 싶습니다. 뒤돌아서서 어깨를 들먹거리며 숨죽여 웃고 있는 쿄고쿠도를 본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요? (만약 제가 쿄코쿠도를 실제로 아는 사람이라, 눈 앞에서 저 광경을 보았다면 전 기절해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제 3자의 눈으로 이 자들의 관계에 대한 확증을 내린 걸로? 그래, 이 놈들 역시 누가 봐도 친구가 아니라 '일당' 이었던 거예요! -_-;
Trivia
번역은 약간 문제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오타가 꽤 있더군요.